현실 안 보는 브랜딩 지랄러들 좀 어떻게 못 해주나?

브랜딩 같은 소리하네


아 깜짝이야 뭔가 했네

회사에서 나는 개발자이고 하는 일은 주로 콘텐츠 시스템(CMS)의 유지보수와 신규 기능 구현이다. 건수가 들어오면 그게 된다 안 된다를 판단해서 된다 싶으면 그걸 해내는 게 내 일이고, 건수를 만들어주는 건 주로 콘텐츠 담당자들 그리고 기획팀이다. 이분들은 일을 시키는 입장이니까 번번이 송구스러워들 하시지만 난 딱히 감정적인 건 없다. 되면 하는 거지.

그러던 차인데 오늘 기획팀에서 2명(원래는 1명이라고 했었다), 콘텐츠 쪽에서 2명이 점심을 먹을 터인데 합석하겠느냐는 말이 나왔고 나는 바짝 쫄았다. 이 3명(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4명)이서 신입사원인 날 놓고 둘러앉아 대체 뭣들 하시려는 건가? 알고 보니, 내게는 별 용건이 있지 않았고, 이들은 방금 전 다같이 “새로 오신 이사님”에게서 “브랜드 아이덴티티에 어긋나는” 운운 별 말도 안 되는 지적을 받고 온 탓에 그 화풀이를 하려고 매운 걸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

신입 개발자는 그저 벙어리 삼년 귀머거리 삼년이니 주억거리며 듣고만 있었지만 사실 속으로는 꽤 많은 말을 삼키고 있었다. 여기다가는 그 점심 나절 내내 눌러 놨던 한탄들을 좀 문서화해서 정리해 놓고 보관 처리를 하려고 한다.

뭐가 있어야 브랜드를 하지

살면서 만난 개념들 중 ‘브랜드’, ‘브랜딩’, ‘브랜드 아이덴티티’처럼 실체 없고 속빈것은 더 없었던 것 같다. (“공허”라는 개념이 이것보다 더 내용이 있을 지경이다.) 길게 말해 봐야 산업디자인 업계 전문가 여러분에게서 뭇매를 맞을 것이 뻔하므로 문자는 쓰지 않기로 하고 그냥 내 경험에 의한 직관적 조소만 하자면, 이 브랜딩이라는 거 뭐냐? 결국 애플 따라하기, 잡스 따라하기거든.

어떤 서비스 총체(brand)가 일관되고 매력적이고 두드러지는 캐릭터(identity)를 가지려면 뭘 해야 할까? 일단 그 서비스 자체가 일관되면서도 매력적인 동시에 두드러져야 할 것이고, 그러고 나서 그것의 실체를 밝혀내 캐릭터로 잡아 줘야 할 것이다. 말은 쉽고 멋지지만 현실은 당장 1단계에서부터가 어렵다. 대부분의 서비스는 들쭉날쭉하고 시원치 못하며 고만고만한 것이다.

안 그래도 떡볶이를 기다리며 다들 한 마디씩 성토한다. “난 솔직히 우리 회사 상품들의 아이덴티티가 대체 뭔지 모르겠어. 그냥 원래 있던 거지 무슨 브랜드고 아이덴티티야.” “그거 내가 지금 알아보고 있는 거잖아요.” “솔직히 자기도 모를걸?” 그러게 말이다. 없다시피한 내 인생 경험과 관찰을 가지고도 말할 수 있다. 이게 대한민국 대다수 “브랜드”들의 현실이다. 이걸 못 받아들이고 브랜딩 지랄을 하시는 분들은 대체 뭐가 문제일까?

브랜딩 그 지랄 아휴 쯧쯧

내가 “브랜딩 지랄”이라고 부르려는 것의 근본은 사실 명확하다. 현실, 그러니까 자기들의 서비스가 일관성, 매력, 차별성이 부족하다는 그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거기서 새로 출발하는 고통을 감내하기를 포기한 뒤, “그걸 한방에 해결할 존나게 미끈하고 쌔끈하고 화끈한 마술”을 어딘가에서 찾아와서 그걸로 자기 서비스를 뺑끼 발라 버리려는 태도, 그게 바로 브랜딩 지랄로 이어진다.

내 편견을 잠깐 늘어놓자면, 브랜딩 지랄러들은 자기의 디자인 철학을 지탱하는 (겨우) 두세 가지 레퍼런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며, 그 취향을 고집하고 연마하는 강박은 흡사 19세기 유럽 어딘가에서 방금 막 튀어나온 파시스트와도 같다. 여기서 그들이 비웃기는 지점이 나온다. 분명 브랜딩이란 ‘구린 상표’라는 철저한 현실을 만지는 작업일 터인데, 역설적이게도, 브랜드론에 천착할수록 현실은 외면된다. 현실은 시궁창인데 머릿속 브랜드는 잡스의 나라로 가고 있거든.

그래서 현실 세계 필부들의 눈에는, 이 브랜딩 파시스트들은, 갈수록 뜬구름 잡고 뭔 말 하는지 모르겠는 괴인들이 되어 간다. “그 이사님 서울대 출신이래요.” “근데 XX에서 일했대잖아. 거기서 뭐 했대?” “OOO라고 자기 대학 선배가 있는데 자기는 그 선배를 되게 싫어한대요. 근데 그 분 지금 카카오 디자인실 가 있거든. 그래서 자기는 막 XX의 OOO가 되겠다고.” “별 어휴, OOO를 누가 알아서.” “그니까. 사람들 솔직히 XX도 모르잖아.”

마우스 놓고 일로 와서 같이 생각 좀 해봅시다

나는 그래도 약간 이상론자인데, 앞서 말한 순서 ― 일단 상품 자체가 일관되고 매력 있고 독보적인지 확실히 한 다음 그걸 브랜딩하기 ― 는 무조건 작동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말하자면, 일단 서비스가 확실하면 브랜딩은 막말로 초딩이 딱 보고 “새우깡!” 한 마디 하더라도 해결된다는 생각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상품 자체의 정체성을 만드는 일 자체가 원체 어렵기 때문이다.

브랜딩하려는 콘텐츠 시리즈가 있는데 로고가 문제라고 해서, 단출하게 물어봤다. 그건 지금 어떤 느낌으로 하고 계세요? “브런치 같은 느낌이요.” 왜 하필 브런치? “아침식사만큼은 본격적이지 않고, 디저트만큼은 달콤하지 않은 거죠.” 그러면 혹시 아침식사도 아니고 디저트도 아닌 음식이 있나요? “음…” 그냥 그걸 로고로 쓰면 제일 설명이 쉬울걸요? “(잘 모르겠다는 투로) 그런가…”

그 콘텐츠 시리즈의 전용 웹사이트도 만들어야 하는데 그 디자인은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다길래 그건 아예 일장 연설을 했다. 디자인 하지 말아버리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웹사이트 디자인”이라는 건 때깔을 의미한다기보다 이를테면 제일 중요한 기사가 첫 화면에 제일 크게 나와야 한다 같은 UX를 의미하는 것일 수 있는데 그거 구현하는 데는 때깔이 중요치 않고 일단 그게 성공하면 사람들은 어쨌든 이용할 것이며 누가 됐든 언젠가 그 때깔이 목마르면 답답한 사람이 나서게 돼 있다고. 그니까 검은 배경에 흰 글씨 쳐 놓고 일단 시작을 하라고.

내가 이분들 데리고 농담 따먹은 것 같지? 절대로 아니다. 20대 시절 내내 실무진으로 살면서 누구도 고민하지 않는 배경음악, 색, 폰트, 삽입자료, 설명문, 태그, 공유URL 섬네일 따위를 고민하며 살아 온 게 있어서 기어코 몇 마디 토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대체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뭐 잘됐지 나나 누구나 뭘 그렇게 알겠나. 벙어리 삼년 귀머거리 삼년이 이제 막 벙어리 1년차인데 이렇게 말이 많아서 어쩌려는 건가 뭐 그런 생각만 더 든다.


PS. 밥 먹고 돌아오는 길에 유 퀴즈 온 더 블록 녹화를 나온 유재석, 조세호 등을 회사 앞에서 봤다. 별로 관심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들을 도로 표지판 알아보듯이 알아볼 수 있다는 그게 좀 신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