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사가 비판거리였다가 이런 화두에 부닥치니 몹시 당황했다고 합니다.

비판을 안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평생에 걸쳐 비판적이기만 했다

팀블로그를 하자는 말을 듣고 그걸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을 때 처음으로 했던 생각은, 놀랍게도, “나 인젠 뭐 그렇게 따질 게 없는데”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정말로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부터 비판적 사고라고들 하는 바로 그 짓을 해 왔거든.

어렸을 때 본 세상은 무슨 놈의 따질 게 그렇게 많은지 알 수가 없는 곳이었다. 심지어 글짓기 대회에 나가서 산문 쓰는 것 하나도 그냥 가만히 못 했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한 번은 치위생 건강에 관한 글짓기를 해야 했고 나는 “왜 한갓 동요마저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이를 닦’으라는 식의 잘못된 습관을 가르치는지 모르겠다” 운운하는 것을 기어코 적어서 냈었다. 그건 상을 못 탔었던 것 같다. (그럴 테지 팩트가 틀리거든.)

아무튼 배운 게 도둑질이라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중학생 때 만든 블로그명 “아무튼지간에”와 그때 확정한 필명 “엽토군”은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져 오며 크리티컬 씽킹과 비판적 글쓰기의 유구한 개인 전통으로 전해져 오고 있… 는 줄 알았다. 창립 멤버로서 트웬티스 타임라인이라는 매체에 몸담으며 무슨 이슈 무슨 트렌드로 무슨 글 쓰지 같은 걸 생각하고 있던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아니 그런데 이게 웬걸 요 며칠 전에 그 매체가 공중 분해됐다. 그러자 문득 그런 의구심이 구체적으로 들기 시작했다. 나… 이제 이거 안 하는 거 아니야?

그걸 안 할 수는 있을까

이상한 의문이니까 다시 적자면 이렇다. 그러니까, 이제 난 더 이상 비판적 사고며 비판적 글쓰기, 비판적인 통찰과 해석을 안 하게 되려는 것인가?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인가? 비판하지 않는 삶, 뭔가를 보거나 듣거나 겪더라도 비판적으로 대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건가? 나도 그렇게 되는 건가?

일단은 피로감이 원인이 되어 그런 걸 안 하게 되기는 했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면, “뭔가 말을 얹는” 것이 대단히 피곤해졌다. 말을 얹는단 말은 뭔가 약간 공연한 행동을 한다는 어감이 강한데, 딱 그런 느낌이다. 굳이 저걸 공공연히 비판한들 뭐가 되나? 정말 시시콜콜 논거를 하나 둘 셋 들어서 좋다 나쁘다 평을 하고 제목과 결론을 지어야만 하는가? 그짓은 트탐라 할 때 신물이 나도록 할 만큼 했는데.

시대 탓을 조금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예컨대 하루가 다르게 밑천이 바닥나 지각을 뚫고 맨틀까지 파고들어가는 한남들의 끝모를 빻음을 보고 있노라면 그저 질려버린다는 느낌인데, 이를테면 “와! 이것도 빻았고 저것도 빻았네! 깔 거 너무 많다! 빨리 집에 가서 까는 글 써야지!” 하는 생각은 전혀 안 나는 것이다. 근데 분명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식의 생각을 꽤 했었단 말이지. 깔 거리와 깔 줄거리가 명확할 때 그걸 깔 생각으로 신나하던 시기가 분명히 있었고 그게 지금은 아니다.

그리고 좀더 핵심적인 차원에서, 어쩌면 그간 나의 비판적 사고며 비판적 글쓰기란 그 자체였다기보다는, 나 자신의 사고력과 세계에 대한 문해력[literacy]을 자율 훈련하는 일환이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친다. 그리고 이젠 대충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으니까, 알아볼 수 있는 영역에 대해서는 굳이 한 번 더 탐구하기를 저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게으름이 아니면 뭐냐는 문제는 옆으로 치워놓자면 일단은 그런 측면이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 모든 사유들이 외부 요인에 불과하고 피동적이라는 점이 썩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특히 요 며칠간 생각하고 있는 주제는 이것이다. 비판을 안 하려고 마음먹으면 안 할 수 있을까?

못 할 줄 아는 경지

문득 어떤 서커스에서 유명한 구경거리였다는 한 노견(老犬)에 대해 생각한다. 그 개는 무슨 짓을 해도 재주를 전혀 부리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먹이를 주고 채찍질을 하고 어떻게 어르고 달래도 요지부동하는 그 재주란 그 어떤 개도 쉽사리 흉내내기 어려운 경지였던 것이다. 나는 왜 이런 진위 여부도 모르는 도시 전설을 생각할까? ‘못 할 줄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궁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마지못해 다니고 있는 회사, 뛰쳐나오다시피 떠나왔던 조직, 천하의 “빙썅”이었던 전 애인에 관해 생각해 본다고 치자. 대다수 사람들의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는 비판과 비난과 조롱이다. 이건 오히려 당연한 것이어서, 이걸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것이 더 이상하고 희한한 태도가 되어 있다. 하지만 다행인지 뭔지, 이런 경우엔 할 수 있는 비난을 굳이 하지 않는 것이 하나의 덕목 내지 대단함으로 여겨지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세상엔 지탄을 받아 마땅한 비판거리들이 넘쳐나고 이들에 대한 지적과 규탄을 무마할 이유 또한 하등 없다. 하지만 문자 그대로 만사에 모든 것이 그렇게 욕할 대상, ‘꺼리’, “레벨”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비판적 사고력의 마지막 단계에는, 무엇을 비판하거나 비판하지 않을지에 대한 비판 능력, 말하자면 비판적 사고 그 자체에 대한 자제력이 있는 것은 아닐까?

평생 만사를 비판하며 살던 꼬꼬마가 어느 날 갑자기 월급쟁이 생활을 시작하며 남들처럼 살기 시작하자, 어 이게 아닌가, 난 그간 뭘 한 거였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 셈이다.

심판하라… 심판받으려거든?!

뭔가 생각의 시작점이 없을 때 성경을 찾아보는 것이 내 요령이라면 요령이다. 그래서 조금 검색을 돌려 보았고 아니나 다를까 유명한 구절이 툭 떨어진다.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마7:1, 새번역

논리학에서 ‘대우’ 명제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이를테면 ‘A → B’라는 명제를 ‘not B → not A’로 바꿔 만드는 명제인데, 원래 명제와 대우 명제는 참거짓 여부가 기계적으로 같다는 특징을 띤다. 쉽게 말해, 같은 말을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 저 성경 말씀은 바꿔서 말하면…

너희가 남을 심판하여라, 너희가 심판을 받으려거든.

마7:1의 대우 명제, 새번역 기준

히-익 이게 무슨 불벼락 맞을 일이람! 팀블로그 따위나 하면서 내가 비판을 못 할 줄 아니 마니 한가로운 소리 하고 있을 때가 아닌 거 같다. 당장 어디 가서 비판 안 하는 법 가르쳐주는 학원 등록이라도 빨리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