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새나는 노래 – #01 1년 정거장


어떤 음악에는 어떤 추억이 깃들어 있다. 이를테면 그가 나에게 이별을 고하던 순간 카페에서 흘러나오던 김동률의 목소리, 변하지 않는 사랑을 다짐하며 불렀던 유재하의 노래 같은 것들. 그래서 어떤 음악은 듣는 순간 기억 저편에 묻어 두었던 어떤 시간이 너무나 또렷하게 생각나게 한다. 그때의 공간, 그때의 온도, 그때의 맛, 그때의 냄새까지. 그래. 어떤 음악에서는 가끔 냄새가 난다.


 

고등학교 1학년, 나는 은따였다

사실 왕따와 크게 구분 갈 것도 없다. 때린다던가 교과서를 숨기는 적극적이며 물리적인 따돌림은 없었지만, 나는 번번이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야 했고, 시답지 않은 이유로 비난의 눈초리를 받기에 십상이었다. 뭘 했길래 그렇게 되었느냐고? 글쎄. 여느 왕따가 그렇듯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어떨 때는 쎈 척을 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오, 세상에. 무얼 얻기 위해 쎈 척씩이나 했다는 건가. 나는 그저 딜레이가 많고, 경험이 적은 사람이었을 뿐이다. 사소한 일로 시비를 걸어오는 동급생들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잠시 멍하니 쳐다본 게 다였다. 그 이후 나는 ‘쎈 척을 하는 애’가 됐다. 가진 것 이상의 허세를 떨며 누군가를 깔아뭉갠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마치 그 아이들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어떨 때는 내 발음이 이유가 됐다. 힙합을 좋아했다. 따라 부르기도 했고, 가끔은 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Soul Company. P&Q나 키비, 에픽하이나 다이나믹 듀오 괕은. 그때 듣던 음악들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내 발음은 어딘가 각이 져 있었고, 톤의 변화가 적었다. 그 발음이 위의 이유와 맞물려 나는 그 1년 동안 힙합이나 좋아하며, 쎈 척을 하는 놈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때의 힙합은 철저한 비주류 장르였고, the Quiett의 <Back on the Beats Mixtape Vol. 1>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음반이었다.

 

나를 따에서 벗어나게 한 것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 문이과가 갈리며 나를 괴롭히던 이들과는 멀어졌지만, 나는 여전히 위축되어 있었고 남들 앞에 나서 무언가를 읽는 게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행여 이상하게 들릴까 봐, 내 발음이 틀린 것일까 봐. 항상 전전긍긍했다. 그러던 어느 날.

G-Dragon의 1집, [Heartbreaker]가 발매됐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앨범이었다. 그해 무려 128,755장이 판매되어 전체 음반판매량 1위를 차지했지만, 타이틀곡 Heartbreaker는 Flo Rida의 Right Round라는 곡의 플로우를 표절했다는, 지금 생각해보면 얼토당토않은 의혹1)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어떤 논란이 있건, 나는 그 앨범에 있는 곡들을 열심히 따라 불렀다. 타이틀곡인 Heartbreaker, 서브타이틀인 Breath, 묘한 멜로디가 인상적이었던 Butterfly와 1년 정거장까지. 부르고 부르고, 다시 불렀다. 빅뱅의 팬도 아니었던 내가 왜 그랬을까.

어쩌면 내 안에 남은 트라우마를 씻어내 버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남들 앞에서 위축되는 그 느낌이 싫어서,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그 억양을 지워버리고 싶어서. 톤의 높낮이 변화가 많고, 조금 더 당당해 보이는 그의 노래를 불렀다. 그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나는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발음과 억양으로 놀림 받지 않게 되었다.

 

내가 서 있는 1년 정거장 세상이 우릴

그런 의미에서 G-Dragon의 [Heartbreaker]는 내게 꽤 특별하고 소중한 음반이다. 아주 특별하지는 않을지라도 쉽게 잊히지는 않을 음반. 내가 가진 우울을 잠시나마 이겨낼 수 있게 했던 음악이니까. 그런데 왜 타이틀이나 후속곡도 아니고, rap이 아니라 sing이 곡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1년 정거장을 골랐느냐고? 여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1년 정거장’은 자신을 기다리는 팬들을 위해 부르는 G-Dragon의 팬 송이다. 이 곡의 가사에는 팬들을 향한 그의 절절한 마음이 녹아 있다. “널 일으켜주고 싶어 but 그럴 힘이 없어 이런 내 자신이 싫어 긴 기다림에 지쳐 비록 몸은 멀리 있더라도 맘은 변치 말자고. 이건 헤어짐이 아닌걸, 아주 잠깐의 휴식인걸.” 사랑하는 사람과 아주 오랜 기간 떨어져 있게 된 한 사람의 마음을 잘 그려낸 가사가 인상적이다.

추억 속에 묻어 두었던 이 노래의 가사를 다시 꺼내게 된 건, 어떤 연애 때문이었다. 그 연애는 서툴렀고, 급박했고, 낯설었고, 어려웠다. 사랑하는 사람과 아주 오랜 시간을 떨어져 있어야 했고, 나는 이를 잘 견디지 못했다. 보고 싶은데 볼 수 없고, 그 오랜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조차 안 가는 그런 느낌. 나는 그쯤 이 노래를 즐겨 들었다. 말할 수가 없어. 널 붙잡을 수가 없어. 참았던 눈물을 떨리던 입술을 보고도 모른 척해야 해.

내 신경은 오로지 그 연애에 쏠려 있었다. 매일 같이 그리워했고 매일 같이 울었다. 그런 날들의 한복판에서 어떤 친구를 만났다. 현명한 친구였고, 생각이 깊은 친구였다. 내가 많은 걸 털어놓지 않았지만 그는 내 말에 공감해주었다. 꽤 자주 만났고, 그 친구와 만난다는 것 자체가 안정감을 주었다.

 

최루액 냄새가 나는 노래

5월 1일. 노동절이었다. 집회에 갔다. 휴일이었고, 세월호가 침몰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은 시점이었다. 많은 이들이 노란 리본을 달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집회를 마치고 행진이 있었다. 안국역쯤 갔을까. 얼마 안 가 경찰버스가 시민들을 에워쌌다. 최루액이 뒤섞인 물대포가 시민들을 향해 발포되었다. 매캐한 냄새가 머리를 울렸다. 연신 기침과 재채기가 나왔다.

 

최루액은 시민들의 얼굴을 향해 분사되었다. ⓒ 프레시안 최형락

시간이 흘러 새벽에 가까워졌다. 그 집회에 그 친구 역시 나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잠깐 만날까. 그래. 어디야. 나는 맥도날드 앞. 그럼 거기서 보자. 여전히 경찰버스는 참가자들을 막고 있었고, 도로에는 최루액 냄새가 가득했다. 눈에 들어간 최루액을 씻어내고 츄러스를 하나씩 나누어 먹었다. 단 설탕 내음이 입을 매웠다. 다시 길거리에 나와 함께 음악을 들었다.

그 친구는 선우정아의 ‘비온다’를 들려주었다. 비 온다. 비 온다. 비 온다. 모두 입을 벌려. 왠지 최루액 쏟아지는 곳에서 들을 노래는 아닌 것 같다. 그치. 요새 자주 듣는 노래야. 뭔데. 지드래곤. 틀어봐. 내가 서 있는 1년 정거장. 세상이 우릴 질투했다고 생각해. 1년 정거장. 그곳에선 널 느낄 수 있어. 왜 듣는지 알겠다. 그치. 완전 소년 감성이네. 그런가. 그런 대화를 몇 번 주고받았다.

그대가 없는 텅 빈 정거장. 세상이 우릴 질투했다고 생각해. 몇 마디를 더 흥얼거렸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까끌한 설탕 냄새에 섞인 최루액의 냄새를 맡는다. 안타깝게도 썩 좋은 냄새는 아닌 셈이다.

 

 

1) 트랩이 유행하던 14-15년, 얼마나 식상한 플로우가 양산됐는지를 떠올려 보자. (그 랩들의) 오리지널리티가 부족하다고 비판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을 표절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