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는 대로 웃음 제공 대상을 선별하자

웃어주면 안 된다


지나가다 이런 기사를 봤고 전반적으로 크게 덧붙이거나 의심할 여지는 없어 보인다.

문제는 이들 연예인의 도박이 개인적인 일탈을 넘어 사회적 파급력이 큰 데도 대부분 너무나 쉽게 방송에 복귀한다는 점이다. 2017년 방송인 신정환이 7년 만에 복귀하면서 도박 사건에 연루됐던 연예인들이 모두 복귀했다. 양세형·붐·앤디·토니안·이수근·김용만·탁재훈 모두 1~3년의 자숙 기간을 거쳐 컴백했다. 더구나 이들은 복귀 이후 예능 프로그램에서 도박을 개그 소재로 활용하는 등 범죄 행위를 가볍게 여기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대중에게 도박은 큰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대목이다.

[토요워치] “물의 일으켜도 웃기면 장땡”..이 시대의 일그러진 스타들 ― 서울경제

내가 의문스러운 지점은 좀 다른 것이다. 연예인들과 연예계만 버릇을 고치면 되는 일인가? 대중들은 아주 피동적으로 인식이 심어지기만 하면 되는 대상인가? 그건 아닌 것 같다. 대중이 이 파국에 맞놓아야 할 대응 행동이 하나 있다. 안 웃어주는 것이다. 아주 적극적으로, 주체적으로, 의식적으로.

그들이 돌아오는 것은 누군가 웃어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소한 블로그까지 직접 찾아와 읽어볼 정도의 지성을 가진 분이라면 못 믿을 만한 전근대적 현실을 하나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한국 대중문화 소비자 대중의 적지 않은 상당수는, 예능인 또는 예능계의 역사적 맥락에 근거한 주관적 소비를 하지 못한다. 그들은 대신 말초적이고 파편적이며 탈역사적인 단발성 소비, 그리고 그에 수반되(어야 하)는 주관 배제적 소비 습관에 길들여져 있다.

말이 복잡한테 쉽게 말하자면 그냥 못생긴 누가 나와서 꽥 하면 자지러지게 웃고 잘생긴 누가 워우워 하면 까무러치게 감동하며 예쁜 누가 흑흑 하면 같이 흑흑 해준다는 소리다. 그게 성폭행범이었건 도박사범이었건 뽕쟁이였건 일베건 개빻은 한남이건 그 모두를 합친 무엇이었건 간에 말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웃음과 눈물과 감동의 현장”에서 잠시 정색하고 나와서 “이건 안 웃긴/재밌는/감동적인 건데 그 이유는 어떠어떠하고~” 하면 다들 무슨 반응을 보이는가? “웃기면/재밌으면/감동적이면 그만이지 뭘 그렇게 유난 떨고 진지를 빠느냐”가 아닌가? 과연 이건 무슨 행동일까?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과연 다 바보 천치인가? 아니다. 그들은 실상을 알고 있고, 이것은 매우 사회적으로 합리적인 행동이다. 그들은 요컨대, 한국 예능 산업의 관객으로서의 예절을 지키라고 다그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예능이라는 것의 소비 대중이 되려면 선택적 무지와 무관심이 필수적이다. 이 판에서 주어지는 콘텐츠가, 이 판의 내용 자체가 그때그때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신파와 포르노의 종합선물세트일 뿐이기 때문이다. 몸에 안 좋고 교양 안 쌓이는 거 누구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단짠’이, 그 얼굴에서 나는 빛이 너무 좋아서 그냥 먹고 있는 것뿐이다. 이걸 자꾸 깨우쳐 주면 곤란하다.

이 반동성은 한국 예능뿐 아니라 “아니메”에서도 유사하게 관찰되는 것인데, 이 시점에서 일본 밖의 아니메 팬덤이 ‘아니메는 절대 PC해지지 않는다’ 호언장담하고 있다는 사실은 시사적이다. 그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궁극적인 차원에서, 아니메라는 장르와 세계를 즐기는 소비 대중이 되려면 정치적 올바름은 논의 자체를 배제하는 것이 하나의 양식이라는 사실을.

“Anime Will NEVER be Politically Correct”

자, 이제 당신이 평범한 한남 예능인이라고 생각해 보자. 남자가 까짓거 같이 잔 여자 기념 영상 좀 찍어놓을 수도 있고 친구들끼리 농담하는데 “맞다 개보년” 같은 드립도 칠 수 있는 거지 뭐 그깟 걸 가지고 이렇게 뭇매를 놓는지 모르겠어서 일단은 군대로든 어디로든 짜져 있었다고 치자. 그런데 가만 보니 나보다 더 개짓을 한 놈도 무슨 도사님 앞에 가서 조금 머쓱해하고 조금 웃기고 조금 울어주었더니 다들 미친 듯이 ―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 동정표를 막 준다. 당신은 그대로 계속 자숙하고 싶겠는가? 아니면 도사님을 찾아가고 천축국 쫓아가는 무슨 웹방송에 출연하고 싶겠는가?

범죄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낮다든가 하는 것은 좀 소박한 분석이다. 대중은 범죄 이력을 포함한 그 어떤 사회적 역사적 주관적 정치적 영역도 기꺼이 이 업계에서 배제하고 갈 수 있도록 잘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물의를 일으킨” 그들은 그리도 쉽고 당연하게 “복귀”한다. 슬프게도 상황이 그렇다. 당신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래도 좋은 소식이 하나 있다면, 우리가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급적 안 웃어줘야 한다

그 일이라는 게 마침 대상이 연예인이니까 매우 쉽고 효과적인 요령이 되는데, 그게 뭐냐, 뭐 짐작하시다시피, 정색을 해주는 것이다. 웃지 않는 것이다. 웃어주지 않는 것이다. 반가워하지 않는 것, 그들의 의도대로 반응하지 않는 것,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냐는 식의 쏘아보는 눈빛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그들이 당신의 반응을 타낼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확인시키는 작업이다. 이것은 여러분의 자존감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다. 실제로도 그들은 당신에게 어떤 반응을 요구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굳은 표정을 통해 이렇게 따져도 무방한 것이다. “웃기냐? 니가 뭘 잘했다고 웃겨? 넌 저번에 니가 했던 일도 다 농담 같고 장난 같고 다 그러니? 넌 이게 지금 사람 웃길 상황 같아 보이냐고?”

뭐 어디 연예인뿐일까 싶다. 말 나온 김에 막 더 나가자면,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기회와 필요가 있을 때마다 더 많은 이들에게 웃음 공급을 중단하고, 웃어야 할 이유에 대한 채무 이행을 진지하게 요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단적으로 정치인들에 대해서 그렇다. 우연히 유명 정치인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대체로 우리가 지지하지 않는 이에 대해서도 자기도 모르게 숙이고 들어가면서 손을 먼저 받쳐 내밀어 악수를 받고 얼떨결에 맞장구 웃음을 지어 버린다. 이걸 하지 말아야 한다. 이유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이론의 여지 없이 선명하게 말이다.

김한울 투표참관인 박근혜 악수 거부
ⓒ 서울신문

생각해 보면 우리는 지금껏 어색하게 웃어줄 필요가 없는 자리에서 단지 우리 위치가 낮거나 불리하다는 이유만으로 어쩔 수 없이 “웃어넘겨야” 했던 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아니 애초에 “웃어넘기다”라는 동사가 별도로 존재하는 나라에 살아야 하다니 이게 무슨 기 막히고 코 막히는 일이냐 말이지? 그런 나라를 고쳐 버리자. 웃음 불매(不賣)를 해 버리는 것이다. 내 사회성과 유머 감각은 정상이지만 당신에게 팔아줄 웃음은 없다고.

사실 이게 막상 시작하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일단 사회 분위기(엠병…)라는 것이 있고, 그 다음으로는 ‘과연 누구부터가 웃어줘도 되는 대상인가’의 문제가 던져진다. 그런데 그 부분은 좀 애석하게도, 그러나 필연적으로, 거기서부터가 우리의 웃음 불매의 구체적인 노선이 결정되는 시점이다. 나는 어느 정도까지의 채식주의자가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처럼, 나는 어떤 인간에게까지 웃어줄 수 있을 것인가를 결정해 보면 좋을 것이다. 좀더 그렇게 주관적이고 통합적인 문화 소비와 사회 생활을 해 나가는 것은 좋은 생각이라고 나는 믿는다.

허울 없는 세상으로 업데이트될 때까지

“kibun”이라는 것부터 이런 아무 유명인에게나 예의상이라도 웃어주는 행태에 이르기까지, 어째 한국 사회는 이렇게 사회 구성과 관계 형성의 기저로서의 신뢰 형성 프로토콜을 이런 각종 비논리적 겉치레와 허울에 맡겨 놓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누군가를 믿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헛짓거리를 안 했고 그간 쌓은 객관적 지표가 좋아서여야 하지, 그가 “시원시원”하다든가 “서글서글”하다든가 “사람 좋아 보인다”든가 해서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회 신뢰 형성 매커니즘이 최소한의 근대성을 확보하려면 일단 웃지 말아야 할 때 처웃지 않는 것부터 좀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모욕적이기만 하고 전혀 안 웃긴데 단지 상급자가 말했다는 이유로 웃어야 하는 농담처럼 이 사회에서 당장 추방해야 하는 것은 없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각종 강력범죄로 처벌받고 돌아와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살려는 인간들에 대해서도 꼭 그렇고, 국회의장에 대해서도 대법원장에 대해서도 대통령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웃음을 주지 말자. 누구에게 웃음을 줄지, 주지 않을지 선택하자. 웃기 전에 생각하자. 그리고 웃지 않는다는 판단이 서면 알아보기 쉽게 얼굴에서 핏기를 지우자. 물어보자. 지금 뭐라고 한 거냐고. 다시 말해볼 수 있겠냐고. 지금 그게 무슨 뜻인지 생각하고 말한 거냐고. 그게 웃기냐고. 내가 왜 그걸 웃기다고 생각해야 하냐고. 이 상황이, 당신이 한 일이, 내가 그렇게 우스워 보이냐고. 물론 이게 말처럼 쉬운 얘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 각론으로서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