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는 건 부모만이 아니다.

새로운 손님은 언제나 환영이야, 아이만 빼고!


ⓒ 조선일보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0.98명에 그쳤다. 2017년 1.05에서 더 떨어진 것이다. 앞으로라고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20일 통계청이 발표한 ‘2018 혼인•이혼통계’에 따르면 18년 혼인 건수는 25만 7600건에 불과했다. 지난 72년(24만 4780건) 이후 46년 만의 최저치이다. 2012년 이후 이 혼인 건수는 계속해 감소하고 있다. 신생아의 98%가 법적 부부에게서 태어난다는 것을 돌이켜 보면, 앞으로 출산율이 계속해서 떨어질 것이라는 데 이견을 제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부는 저출산 정책을 계속해 내놓고 있지만, 근본적인 부분은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 지난해 교육부의 조사 결과, 초중고교생 1인당 월평균 29만 1000원이 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교육비만의 문제는 아니다.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이들은 정규직의 경우 43%, 비정규직의 경우 2%에 불과하고, 여성들의 경우 복직 시 경력단절이 우려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가장 큰 문제는 출산과 육아가 오직 ‘부모’의 문제로 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 블리자드

새로운 손님은 언제나 환영이야, 너만 빼고.

거리 어딜 가든 노키즈존이 넘친다. 카페에도, 식당에도, 심지어는 호텔과 리테일 매장에도. 정부에서 노키즈존에 대한 조사를 따로 하지 않기에 정확한 수치는 파악이 어렵지만, 매장 앞과 SNS에 ‘어린이를 받지 않는다’고 공지한 곳은 정말 쉽게 만날 수 있다. 아동의 존재는 그 자체로 인상일 찌푸릴 이유가 된다. 아이가 소란을 피우기 전에도 이미 머릿속 각인된 짜증이 밀려온다. 아이를 동반한 부모들은 ‘차별’을 느낄 수밖에 없다.

아동들이 혐오의 대상이 된 건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애가 좀 그럴 수도 있죠.” 아이를 동반한 ‘진상’이 그 이유로 꼽힌다. 경기연구원의 조사 결과(2016.2)에 따르면, 공공장소에서 소란스럽게 우는 아이들로 인해 불편을 겪었다는 응답이 93.1%에 달했다. 불편을 겪은 장소로는 식당과 카페가 72.2%로 압도적이었다.

ⓒ TBS

아이들은 시끄럽다. 뛰어다닌다. 큰 소리로 운다. 종종 이런 특성은 안전문제를 만들거나, 주변에 소음을 안겨준다. 이런 아이들과 격리되어 편안한 식사를, 담소를, 쇼핑을, 휴식을 즐기고 싶다. 이 당연스럽고 자연스러운 욕구는 모든 아동을 배제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아이가 피해를 주기에, 아이와 마주하고 싶지 않다. 결국 아동들이 향할 곳은 단 두 군데 뿐이었다. 집과 키즈 카페.

아이들은 어떻게 혐오의 대상이 되었나

어떤 이들은 부모가 아이를 통제하지 않은 결과라고 했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말을 못 뗀 아동에게 울음은 유일한 의사소통의 수단이다. 어떤 이들은 ‘몇몇의 이기적인 부모’ 때문이라고도 했다. 아이가 먹을 음식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고, 기저귀를 버리고 간다고. 하지만 모든 부모가 ‘이기적인 진상’일 것이라고 가정해 출입을 막는 것은 너무 게으른 처사다. (그렇다고 다른 ‘성인’들과 똑같은 음식을 먹을 수 있고, 기저귀가 필요 없는 연령의 아동이라고 출입이 허락되나? 아니다.)

ⓒ 직썰

오히려 우리는 부모가 아닌 진상들을 더 자주 만날 수 있다. 직원에게 욕설을 하고, 가게 전체가 떠나가라 시끄럽게 수다를 떨고, 계산을 한다면서 동전을 던지는 이들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 역시 미리 선별해내야 하지 않겠나. 만약 진상을 부리는 이들 중 남성의 비율이 더 높다고 남성의 출입을 금지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마 그 가게는 여론의 포화를 맞고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결국, 하나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아이와 부모가 만만했을 뿐이라는 것.

오히려 아이가 예의를 배우지 못하게 막는 쪽은 ‘노키즈존’이다. 가야 할 식당을 잃은 아이는 식당에서의 예의를 배울 기회도 박탈당한다. 가야 할 매장을 잃은 아이는 매장에서의 예의를 배울 기회도 박탈당한다. 아동이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영역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영역 안에 있을 때뿐이다. 사회적 경험은 사회적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아이는 부모만 키우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예의를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부모의 의무만이 아니다.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는 당신의 의무이기도 하다. 육아의 책임은 육아를 하지 않는 모든 시민도 함께 지는 것이다. 이 의무를 포기하겠다는 것은 공동체를 포기하겠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진정 이기적인 것은 불쾌함을 참지 못하고 시민으로서 져야 할 의무를 방기하는 것이다.

‘11세 작가’로 유명한 전이수 씨는 노키즈존에 대해 이렇게 썼다. “어른들이 조용히 있고 싶고, 아이들이 없어야 편안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난 생각한다. 어른들이 편히 있고 싶어하는 그 권리보다 아이들이 가게에 들어올 수 있는 권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그 어린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는 거니까. 어른들은 잊고 있나 보다. 어른들도 그 어린이였다는 사실을.”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지닌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국민이 아닐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