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편을 허용한 '미디어법' 10년에 즈음하여 드는 생각.

A법 시행 B년째에 들어서서


“원산지 표기”, 10

개발자 몇 명이 양재역 근처 어디에 모여 소고기를 먹는다길래 나갔다. 해도 떨어졌는데 왜 이렇게 후덥지근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약속 장소로 나간다. 예약을 해두어서인지, 얼마 기다리지 않아 불이 나오고 고기가 나왔다. 꽤 푸짐하다. 미리 약한 간에 재워 놓은 것인지, 센 불에 많이 익혔는데도 여전히 부드럽고 무엇보다 고소한 것이다. 와 여기 맛있는데요? 하고 나서 메뉴판을 보면, 메뉴판 옆에는 원산지 표기가 조그맣게 붙어 있다. 갈비살 미국산, 안창살 미국산, 등심 미국산.

그 순간 뜻밖에도 선명히 눈앞에 스쳐 지나간다. 이보다도 덥고 치열했던, 2008년 광화문 ‘명박산성’ 앞에서의 기억이.

KBS "지난해 쇠고기 원산지 표시 위반 26% 급증" 보도 일부
ⓒ KBS

지금이야 당연하다는 듯이 어느 식당에 가도 명시돼 있는 ‘원산지 표기판’이지만 불과 10년쯤 전만 하더라도 이런 것은 있지도 않았다. 이건 지난하고 격렬한 사회 갈등을 거친 끝에 2009년부터 이명박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 재개하기로 결정하면서 도입된, 대책 아닌 대책으로서의 시행령의 결과였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다들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그걸 써서 붙이고 그걸 확인했었다. 대부분의 식당은 엉성하게 “국산, 국산, 국산”으로 쭉 나열된 식재료 목록을 한구석에 붙여두고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는 이 원산지 표기판마저 논란의 대상이었다. ‘이거라도 해 놓으면 최소한 미국산을 안 먹고 싶은 사람은 피할 수 있지 않겠느냐’와 ‘눈 가리고 아웅이지, 이런 것이 실질적인 검역 주권과 광우병 위험 물질로부터의 온전한 자유를 약속해 줄 리가 없다’가 팽팽하게 맞서다가 결국 다들 지쳐 나가떨어지는 동작으로 이 ‘합의’를 보았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그게 미국산 쇠고기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그런 게 있었지’ 한 다음, 가성비를 극찬하며 한 접시를 더 주문하고 있었다.

“미디어법”, 10

소고기가 맛있는데 술이 빠질 수 없어 맥주를 시키고 음주가 가능한 사람들끼리 주거니 받거니 하며 한창 각자의 개발자 인생을 성토하는 중이었다. 별로 할 얘기가 없던 어떤 이는 아까부터 시선이 저 안쪽 TV에 박혀 있다. 뭐 그렇게 중요한 내용이길래 여기까지 와서 눈을 못 떼고 있나? 싶어 그 내용을 흘깃 봤다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자극적인 “막장” 소송 사례 얘기가 3류 재연 드라마로 나오는 중이다.

상단에는 그 방송의 이름과 방송사 로고가 붙어 있다. 실제상황 기막힌 이야기, ○BN.

미디어 관련법 모두 국회 통과 YTN
ⓒ YTN

M●N을 포함한 몇몇 TV 방송사들은 원래 그 존재의 성립 자체가 불투명했던, 혹은 불가했던 곳들이다. 신문사가 설립하려는 방송사였기 때문이다. 언론사의 “종합편성채널” 겸영이란 아주 좋게 (혹은 혹자가 옹호했던 대로) 말하자면 경력과 노하우를 갖춘 전문 사기업이 방송이라는 시장의 “다양성”을 가져다주는 일이었고, 아주 나쁘게 (혹은 좀더 역사적 진실에 가깝게) 말하자면 지난 몇 년 간 일련의 사건과 변화의 연장선상에 뻔하게 위치하는 바 그야말로 “언론 장악 시도”였다.

지금 아무렇지도 않게 돌려쓰고 있는 “동물 국회”, “형광등 100개의 아우라” 등의 관용구는 바로 이 시절에 나왔다. 당시 야당은 그야말로 몸을 던져 “언론 장악”을 저지했으나 역부족이었고, 보란 듯이 개국한 그 방송사들은 그토록 벼르던 보수 진영의 관점과 논리를 실컷 펼쳤다. 그리고 그 길로 한철 장사가 파했다. 뉴스는 할 줄 알았어도 예능과 교양은 할 줄 몰랐던 그들은 ‘종합 편성’을 채우기 급급한 ‘케이블 채널’들이 되어 버렸다. 어디는 24시간 내내 “속보”를 보내는 방식을 택했고, 어디는 아예 오락방송이 되기로 했고 등등. 그리고 사람들은 이제 선택적으로 혀를 끌끌 차고 삿대질을 하며 그 방송들을 가끔 본다.

“광역버스 입석 금지”, 5

이 모임은 1차를 진작에 파하고 아쉬운 마음 달래러 2차로 이동했다가 ‘스몰비어’ 호프집에서 끝날 줄을 모르고 이어져 버렸다. 처음에는 “집에 갈 지하철 끊길 때가 됐는데 어떡하지” 하던 것이, 나중에는 오만 잡담이 너무 재미있는 나머지 “에라 모르겠다 그냥 빨간 버스 막차 타지” 하는 호쾌한 포기로 이어지고 만다. 2차를 끝까지 달리고 버스 정류장으로 간다. 이미 사람들이 빨간 버스 노선 표지판 뒤로 줄줄이 서서 같은 차를 기다린다. 머잖아 버스가 온다.

버스 앞유리에는 “빈자리 35″라고 뜬 전광판이 번쩍이고, 나는 여기서마저 덮쳐오는 세월호 참사의 크기를 생각한다.

오마이뉴스 "이제 광역버스도 빈자리 알고 타세요" 보도 일부
ⓒ 오마이뉴스 김민규

2014년 4월 16일 이후 대한민국은 그 어떤 교통 수단도 진정한 의미에서 안전하지 못했다. 너도 나도 대책 마련과 재발 방지가 시급하다는 것쯤은 합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그 실천 방법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국토교통부는 정말 뜻밖의 영역을 계도하기로 결정했다. 저 빨간 버스에도 매일 사람들이 과적되고 있지 않나! 입석 만원으로 운행하다가 고속도로에서 다 죽으면 또 뭐라고 하겠지! 싶었는지, 광역버스 입석 금지를 훈령으로 내린 것이었다.

그때부터 빨간 버스의 ‘빈자리’ 유무 및 그 개수는 그렇게나 중요한 정보이자 지표가 되었다. 취지는 알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현실을 모르는 것 아니냐는 성토가 이어져, 한 달만에 이 조치는 ‘반발에 없던 일로’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도입된 광역버스 빈자리 표시기는 지금도 일부 차량에 흉터처럼 남아 있다. 아니, 흉터라고 하지 말고 흔적 기관이라고 하자. 2010년대의 한국이 그 참담한 수몰 사건에 앓고 다치며, 숱한 부조리와 부당함에 맞서며 성장하다가 남긴, 그런 의미에서의 흔적 기관 같은 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제도화된다는 것, 그리고 받아들인다는 것

막차라서 자리에 못 앉을 리 없었다. 자리에 앉았다. 버스에 타면 내릴 때까지 잠을 잘 계획이었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원래 술 마시면 잠이 잘 안 오는 타입이라는 걸 꼭 이 타이밍에야 기억해낸다. 다만, 오늘따라 유난히 섬찟하게 깨어나는 정신이 꼭 그 술버릇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생각이 꼬리를 문다. 우리는 그냥 다 받아들인 것일까? 사회의 만사란 결국 다 이렇게 무덤덤해지고 유야무야되고 원래 그랬던 일인 양 되어가는 것일까?

무언가 애매하고 엉성한 것을 그대로 다 쓰거나 다 버릴 수 없어서, 적당선[度]을 만들어 마름질[制]해 대충 돌려쓸 수 있도록 하는 규약을 제도(制度)라고 한다. 그리고 제도는 그냥 규칙의 집합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서, 필요하면 고치거나 폐기하거나 새로 정하면 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우리는 미국산 쇠고기라는 애매한 것, 언론사의 방송사 겸영이라는 엉성한 발상, 참사 방지 대책이라는 화급한 일을 해야 했다. 그래서 그것들을 제도화하고 법제화했다. 정말 그걸로 끝이었을까?

어떤 제도는 참여자 민중에 의해 적극적으로 승인되는가 하면 어떤 제도는 끝까지 저항을 받는지도 모른다. 여전히 우리는 “미국산”이라는 쇠고기와 “TV▽선” 뉴스에 반사적으로 가벼운 진저리를 친다. 그건 우리가 정말로 그것들 때문에 몸과 삶에 피해를 입어서인가? 그렇다기보다는, 피해야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건데, 그걸 이렇게 어쭙잖은 제도로 대처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어쭙잖은 제도의 어쭙잖음 그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이를 궁극적으로 환멸케 한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4월 18일 CIKorea 정모 봉구비어

악(惡)이 아닌 이상에야 뭔가를 영원히 미워하고 배격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결국 우리는 세상의 대응하기 곤란한 모든 것들을 법제화하고 제도화하며 마름질하고 사포질해 적당히 취급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중 어떤 것들이 그 최초의 마름질로부터 깜짝 놀랄 정도로 멀리까지 온 지금, 문득 불안하게 궁금하다. 언제쯤이면 우리는 그것들을 정말로 수용하고, 납득하고, 이제는 최선을 찾았다고 확신하며 안돈할 수 있을까. 거기까지 우리는 우리의 법규, 제도, 시행령, 관습과 문화를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내릴 곳이 가까워 왔다. 나머지 생각은 그 버스에서였는지 그 식당에서였는지 하여간 잃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