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이동권 시위를 비난하는 ‘철도 덕후’ 이준석에게

덕질 전에 사람 먼저


자신이 ‘철덕’임을 공공연하게 밝히는 유명인은 그가 처음이었다. 언론 인터뷰에서 사실을 밝힌 것도 모자라, 철도는 물론 버스나 대중교통을 대상으로 찍은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꾸준히 올리며 철덕이라는 사실을 대놓고 티 낸다.

그는 현실 정치에서 철도를 활용해 ‘덕업일치’하는 모습도 종종 보였다. 여러 번 출마했던 공직선거에서 내세웠던 공약 중에는 수도권 전철 4호선과 7호선 급행화도 있었다. 닳고 닳은 정치인들이 늘상 내뱉는 공약이기는 하지만, 그는 자신이 철도 동호인임을 호소하면서 구체적인 계획과 수치를 제시해 흔해 빠진 공약을 제법 진정성 있게 설파했다.

국민의힘 당 대표가 되고 나서 가장 먼저 보인 모습은 지하철과 서울시 공영 자전거 따릉이를 타고 출근하는 모습이었다. 젊은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굳히면서 친근감을 주는 보여주기 목적이 전혀 없다고 하지는 못하겠지만, 다른 정치인과 달리 자연스러웠고, 처음 봤을 때는 제법 신선해 보였다.

2018년 서울 노원 병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 출마했을 때 만든 선거 책자. 상계동과 철덕후를 연결 고리로 본인 성장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자료 출처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정보도서관)

나 또한 철덕이라면 철덕이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어릴 적 일 중 하나는 친척과 함께 종로선(수도권 전철 1호선 중 지하 구간)을 타고 기뻐하는 장면이다. 인간 성장 과정에서 여섯 살 이전 기억은 다 잊어버린다는데, 이 경험이 기억날 정도면 그때 내겐 지하철 타는 게 여간 기쁘고 좋았나 보다.

내가 어렸을 때 즐겨했던 일 중 하나는 지도 보기였다. 그때 나는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는데, 우리 집에는 차가 없었다. 그래서 지도에 그어진 도로를 따라 그으며 차 타고 움직이는 상상을 했다. 지도를 자주 보면서 세상이 넓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지리와 관련된 모든 것들에 흥미가 생겼다. 초등학교 때는 전국에 있는 모든 기초자치단체 단위 행정구역과 고속도로를 외우다시피 했고, 고등학교 때는 세계지리 과목을 배우지도 않았는데도 전국지리올림피아드에 나갈 정도였다.

어렸을 때는 막연하게 탈 거리로서 철도를 좋아했다면, 철도를 많이 접하게 된 것은 어른이 되고 나서다. 대학을 다닐 때 자취 대신 천안에서 통학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전철을 마음대로 타볼 수 있어서였다.(한 학기가 막 지났을 무렵에는 후회를 많이 했고, 결국 아저씨가 되어 복학한 뒤에는 무궁화호를 주로 탔다) 전국 철도노선을 다 타보자는 생각에 내일로를 두 번 했고, 그 여행에서 얻은 추억과 풍경을 잊을 수 없다.

이렇게 쓰고 보니 참으로 철도에 열성적인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나는 덕이 많이 모자라다. 전동열차 겉모습을 보고 동글이/뱀눈이라는 별명 정도만 떠올리는 정도에, 수포자이자 문과 쳐돌이이기 때문에 전문 기술이나 공학적인 건 당연히 전혀 모른다. 그저 아쉬울 따름.


그래도 철도, 그리고 대중교통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지는 잘 안다. 도시에 많은 인구가 모여 사는 현대 사회에서 철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대중교통이 없다면 자가용이 없는 사람은 장거리 이동은 물론 옆 마을 가는 것조차 포기해야 하고, 시내 도로는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꽉꽉 막혀 있을 것이다.

여러 대중교통 수단 중에서 철도는 대중교통 그 자체가 될 수밖에 없다. 애초에 대량 수송을 목적으로 설계되고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정해진 궤도를 중앙 관제와 신호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안전성과 정시성에서 어떤 교통수단보다 우월하다. 많은 사람을 안전하고 빠르게 싣고 나를 수 있는 대중교통 수단은 철도밖에 없다.

자가용이라는 것이 등장하면서 한때 철도는 구시대의 유물처럼 보이기도 했고, 경부고속도로 건설 이후 30년 동안은 대도시를 잇는 간선 철도망이 하나도 건설되지 않았을 정도로 철도 건설에 소홀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자가용이 몰고 온 어마어마한 도시 내 교통 체증을 참지 못한 대도시들은 그런 시절에도 지하철을 파댔고, KTX 맛 좀 본 지방 사람들은 자기 집 앞에 KTX가 서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게다가 철도는 기후 위기에 맞설 대응책으로 꼽히며 선진국들은 지상 교통망 중심 수단을 도로에서 철도로 바꾸려고 한다.

그래서 한반도에 처음으로 철도라는 것이 깔린 지가 120년이 지났고, 수도권 전철은 2년 뒤면 개통된 지 반백 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국가는 삽질을 마다치 않는다. 철도를 새로 짓고 유지하는 데 2022년에 8조 6,000여억 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어 보지만 이렇게 해도 제때 건설되는 철도 노선은 손에 꼽거니와, 철도망은 여전히 성긴 그물처럼 빈약하다.

자가용으로 200명을 싣고 나르려면 참 많은 땅을 필요로 한다. ‘당신이 교통 체증에 갇힌 것이 아니라 당신이 교통 체증이다.(You are not stuck in traffic. You are traffic)’라는 문구가 이 사진과 함께 따라다니는 이유다.

사람들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동하라고 철도를 막대한 돈 들여 만들어놨는데, 장애인들은 그걸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다. 국가가 예산을 투입하는 철도가 장애인들에게 그림의 떡이 되었다? 이건 분명히 문제다.

평범한 사람들은 지하철을 타다가 죽는 걸 상상할 수 없지만, 장애인들에게는 엄연한 현실이다. 1999년 혜화역. 2001년 오이도역, 2002년 발산역, 2006년 신연수역, 2008년 화서역, 2017년 신길역에서 휠체어 장애인이 리프트를 타다가 사망했다.

혜화역, 오이도역 참사를 계기로 전국장애인차별철페연대가 결성되었고, 지하철과 버스, 도로 등 곳곳에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이어나갔다. 그런 노력 덕분에 교통약자 이동권이 공론화되어 2005년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교통약자법)이 제정되었다. 역사 내 승강기, 저상 버스 등 교통 약자에 대한 편의 시설이 생겨났고, 장애인 뿐만 아니라 노인, 어린이, 임산부도 혜택을 보게 되었다. 누구 말마따라 상황이 나아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속도가 너무 더디다.

휠체어 장애인이 스스로 출구에서 승강장까지 승강기 등을 이용해 한 번에 이동할 수 있게 하는 ‘1역사 1동선’. 서울시는 2022년까지 모든 역에 갖추겠다고 2015년에 약속했지만, 며칠 전에 2025년까지 100%를 이루겠다고 또다시 약속했다. 차량과 승강장 사이 간격이 넓어 휠체어 바퀴가 종종 빠지는 때도 있다. 국토교통 도시철도건설규칙에는 차량과 승강장 연단 간격이 10㎝가 넘는 곳에 안전 발판 등을 설치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나, 이 규정이 정해진 2004년 이전에 지어진 지하철역에서는 이걸 지켜야 할 의무가 없다. 아직도 151개 역 3,607곳 승강장은 여전히 간격이 10㎝ 이상 벌어져 있다.

1호선 서울역 한 승강장 입구. 연단 간격이 넓지만 고무발판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사진 및 설명 출처 = 경향신문, 사진을 클릭하면 해당 기사로 이동합니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시위에 냉담한 시민이 생각보다 많다. 마음으로는 이해가 안 되니, 머리로 이해를 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가 제 살길을 찾아야 하는 시대에 출근 시간이 늦어지는 것만큼 힘들고 지치는 일은 없을 테니까.

평범한 사람들이 그러는 건 그럴 수도 있다고 넘어가지만, 철도를 좋아한다면서 이번 시위를 욕하는 사람은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은 이번 시위를 ‘불법’ 시위, 운행 방해라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온라인에서는 시위자를 향해 욕을 하고, 어떤 ‘행게이’들은 전장연이 혜화역에 붙인 ‘불법’ 선전물을 뗀 것을 인증하기도 했다.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철도가 누군가에게는 불편을 넘어 목숨을 걸고 타야 한다는 뭔가 단단히 잘못된 현실은 안중에 없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 철도동호인 중에는 자신을 철덕이라고 자처한 그도 있었다. 잡음 같은 말 중에서 내 기억에 가장 남는 건 ‘비문명적’이라는 단어다. 그는 시위 앞에 저 단어를 붙여 수식함으로써 시위가 불손하다는 낙인을 찍으려고 한 모양인데, 나는 철도를 포함한 지금의 교통 환경이 더욱더 비문명적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골라 싣는 대중교통? 이게 말이야 방구야?

더욱이 그는 시위가 본격적으로 논란이 되기 전에 전장연과 만나 장애인 이동권 향상을 약속하기도 했다. 대선에서 이겨 기획재정부를 혼내주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그렇게 말한 그는 여당 대표되기 며칠 전이자 시위가 이어지는 지금도 소셜미디어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향한 비난을 멈추지 않는다. 자기가 한 말을 행동으로 옮기기는커녕 말로 사람을 공격하고 있다.

덕분에 겨울에 시작했던 시위는 여름까지 이어질 판이고, 그가 좋아한다던 철도는 논란 한복판에서 정쟁과 차별 정치의 수단 따위로 내려앉았으며, 몇몇 철도 커뮤니티에서 장애인 차별성 발언은 멈출 줄 모른다.

지난해 8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왼쪽부터) 변재원 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국장, 박경석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이사장, 권달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와 면담을 한 뒤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관심을 약속한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전장연/설명 출처 = 한겨레, 사진을 클릭하면 해당 기사로 이동합니다.)

당신이 진짜 철덕이라면 누군가의 불편함은 외면하고 인정사정없이 정시성 하나만 보고 굴러가기만 하는 철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편리하게 탈 수 있는 철도를 좋아했으면 좋겠다. 당신은 일개 소시민 철덕이 아니라 시민 모두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정치인, 그것도 여당 대표라는 어마어마한 권력을 곧 쥘 사람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래야 한다.

모두가 편리하고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국가와 도시 재정을 들여 만든 철도가 누군가에게는 불편을 넘어 목숨을 걸고 타야한다면, 이건 목적의 의미를 잃은 것이다. 스스로가 철도에 진정으로 관심이 있는 정치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쉽고 안전하게 이용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행동으로 빠르게 옮기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당신은 이동권 문제를 해결하라는 요구는 듣지 않은 채 요구하는 사람을 공격하고 있다. 시위자에게 시민들의 평온한 삶을 망치는 죄인으로 누명 씌우고, 그들이 20년 넘게 장애인 이동권 보장 투쟁을 벌였다는 진실을 감추며, 차별과 혐오의 단어를 퍼붓는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가르려 하고, 대중교통을 차별 정치의 도구로 악용했다. 철도 좋아한다는 사람이 철도를 망치고 있다.

그런 당신에게 철덕이자 시민으로서 나는 유대감을 느낄 수 없다. 그저 분노, 참담함, 무기력함만을 느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