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바꾸자, 선거제! ⑤] 비례대표제를 더욱 민주적으로 바꿀 수 있는 몇 가지 선택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좀 더 나은 비례대표제


100개의 비례대표제에는 100개의 방법이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비례대표제라는 큰 줄기 아래에는 그 나라가 추구하는 가치나 환경을 잘 반영할 수 있게 하는 다양한 잔가지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각 국가의 비례대표제를 설명할 때는 비례대표제 앞에 여러 단어가 주렁주렁 매달려 사람들을 헷갈리게 한다.

여기서는 독자들이 헷갈릴 수 있는 용어들을 정리하는 동시에 비례대표제가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하는 선택지 몇 가지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후보자 당선 순위를 어떻게 정할지, 비례대표 선거구를 전국으로 할지 지역으로 할지 등 세세한 것들을 바꾸는 것만으로 비례대표는 물론 한국 정치의 모습은 많이 달라질 수 있다.

내 손으로 직접 뽑는 비례대표

만약 투표용지에 비례대표 후보가 있고, 그에게 직접 표를 준다면 어떨까? 우리는 상상에서 그치지만, 그것을 현실로 이룬 곳이 있다. 유권자가 비례대표 정당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비례대표 후보도 선택할 수 있는 방식을 ‘개방 명부형’ 비례대표제라고 부르는데, 네덜란드, 스웨덴에서 하고 있다.

유권자는 정당에만 투표하고, 후보들은 정당이 정한 순위에 따라 당선되는 ‘폐쇄 명부형’ 비례대표제인데, 우리나라 특유의 상황과 맞물려 유권자들이 비례대표를 신뢰하지 않는 주요 요인이 된다. 유권자들은 정당을 불신하고, 정당 지도부는 공천 과정을 불투명하고 비민주적으로 한 적이 많았다. 만약 유권자에게 후보 선택권을 준다면 비례대표제 신뢰성은 높아질 수도 있다.

국가에 따라서는 후보 당선을 전적으로 개인 득표수에 따라 결정하는 완전 개방 명부제를 시행하는데, 그것이 무조건 정답은 아니다. 투표용지가 지나치게 길어지는 문제, 후보가 많다 보니 모든 후보를 유권자가 파악할 수 없다는 한계, 후보 투표가 허용되었을 때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후보들이 표를 많이 받을 것이기에 다양한 계층의 원내 진입을 돕는다는 비례대표제 취지를 훼손한다는 비판 등이 있다. 그래서인지 완전 개방 명부제를 도입한 국가는 몇몇에 지나지 않는듯하다.

혹은 완전 개방 명부제와 폐쇄 명부제 그 중간 어디쯤을 적당히 절충할 수도 있다. 정당이 비례대표 순위를 결정하되 몇 % 이상의 득표한 후보는 순번과 상관없이 당선하는 방식, 반대로 개인 투표를 허용하되 일정 순번까지는 개인 득표와 상관없이 당선시키는 방식, 또는 지지하는 후보가 없는 유권자가 정당에만 표를 줄 수 있게 하는 방식도 있을 것이다.

개방 명부제 도입이 정 어렵다면 후보 공천 과정에서 일반 국민 참여를 의무화할 수도 있다. 확실한 건 비례대표를 공천할 때는 정당 지도부 내리꽂기식에서 벗어나 유권자나 하다못해 일반 당원의 참여를 끌어내야 한다는 점이다.

네덜란드 하원 의원 선거 투표용지. 네덜란드 하원 선거는 완전 개방 명부제 비례대표에 선거구가 전국 단 하나다. 선거에 참여하는 정당도 많고, 후보도 많아서 이를 다 싣다보니 투표용지 규격이 전지(A0)일 정도로 무척 크고 길다.

석패율제 해, 말아?

석패율제는 지역감정에 의한 투표 행태와 영남당/호남당 현상을 완화할 선거제도로 꼽히고 있다. 일본 중의원에서 처음 도입된 이 제도는 지역구 낙선자를 구제해주는 제도로만 알려져 있는데, 실제 적용은 조금 복잡하다.

우리나라는 한 순번에 후보 한 명을 공천하는 데 비해, 몇몇 일본 정당은 특정 순번에 지역구 출마자 여러 명을 채운다. 그 후보들 가운데 지역구에서 당선된 사람은 지역구 의원이 되면서 비례대표 후보에서 빠지고, 낙선한 사람들만 지역구에서 아깝게 떨어진 비율, 즉 석패율을 구한다. 이 석패율이 가장 높은 순서대로 당선되는 것이 석패율제다.

석패율 = (낙선한 비례대표 후보의 지역구 득표율)/(그 지역구에서 1위로 당선된 후보의 득표율)*100

이 제도 도입으로 가장 혜택을 보는 사람들은 영남 지역에 출마하는 민주당/진보정당 지역구 후보나 호남 지역에 출마하는 보수 정당 후보. 여기에 정당에서 꼭 필요한 사람을 전국에서 선거 활동을 시킬 수 있다는 선거 전략상 이점도 있다.

하지만 이점은 단점이 되기도 하는 양날의 칼과 같다. 원로 정치인 보호로 악용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지역 주민들로부터 신임을 잃어 낙선된 사람이 석패율제로 부활하는 사례가 종종 있어서, 좀비 선거제도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유명 정치인들이 비례 의석을 차지하면 원내 진입을 노렸던 정치 신인과 소수자들이 낙선할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지역구와 비례대표 후보의 이중 등록을 허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의견도 있다. 독일, 뉴질랜드에서는 후보가 지역구와 비례대표에 동시에 출마하는 것이 가능하다. 단, 일본과 달리 중복으로 출마하는 후보는 한 순번에 하나씩 차례로 의석을 배정받고, 석패율 계산을 따로 하지 않는 게 차이점이다.

전국과 권역 사이

현재 한국 비례대표의 한계 중 하나가 지역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비례대표 선거구가 전국 단 하나고, 전국 득표율을 기준으로 의석이 배분되기 때문이다. 비례대표를 여전히 전국구로 부르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이유다.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국가에서는 비례대표를 권역별로 나눠 선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100명이 넘어가는 사람들을 단 하나의 선거구에서 선출하기에는 유권자들이 모든 후보를 알 수도 없고, 지역 주민들과 소통도 어렵다. 그래서 광역자치단체마다 하나씩 아니면 광역자치단체 몇 곳을 하나의 선거구로 묶은 뒤 인구 비례에 맞춰 선거구별로 의석을 배분한다.

권역별 비례대표제는 비례성 강화와 더불어 지역주의 완화라는 취지로 선거제 개혁안으로 항상 거론되었다. 연동형 비례제와 맞물려 도입되면 비례성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 영호남에서 양당이 각 지역을 독식하는 현상이 많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지역구 선거에서 많은 피해를 보는 몇몇 진보정당에서는 아예 100% 권역별 비례대표제로 전환하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권역별 비례제 도입이 지지부진했던 이유는 의석수 부족 때문이었다. 현행 47석으로 권역에 의석을 배분하면 지방에는 각 권역에 5명 안팎으로 배정이 되는데, 이렇게 되면 의석 대부분은 양당이 독식하게 돼 소수 정당 원내 진출은 더욱 어려워진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2015년에 국회에 제출한 권역별 비례대표제 적용 예시. 총 의석 300석을 유지하되, 지역구와 비례대표 비율을 2:1로 하고, 비례대표는 선거구를 6개 권역으로 나눠 배분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 안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권역 이름 옆에 의석은 권역별 총 의석을 뜻함.)

다른 것보다도 사람 좀 늘리자

지금까지 언급한 선택지들은 우리 실정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문제지만, 너무 적은 의석수는 선택이 아닌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의석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이 다양한 옵션들을 선택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 비례대표 의석은 전체 의석 300석 중 약 15.7%에 해당하는 47석에 불과하다. 민주화 이후 처음 선거할 때만 해도 비례대표 비중은 1/4이었다. 하지만 농어촌 대표성을 이유로 지역구 의석수를 늘리는 과정에서 총의석수는 그대로 두고 비례대표 의석을 줄여 버렸고,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상황 때문에 비례대표제는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다. 머릿수 자체가 적기 때문에 정치 신인이나 소수자, 전문가들이 원내에 진입할 수 있게 한다는 취지를 못 살리고 있거니와 지역구 의원이 의회 내에서 압도적 다수이기 때문에 지역구 중심으로 의정이 돌아가는 현상(쪽지 예산이나 지역구 챙기기 같은 것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비례대표가 되더라도 문제가 생긴다. 비례대표는 최대한 신인에게 공천하기 때문에 비례대표 의원이 재선하려면 지역구 출마가 필수고, 비례대표에게도 지역구 관리가 요구된다. 비례대표는 전문성 있는 인력을 국회에 진출시킨다는 목적도 있는데, 비례대표로 있을 수 있는 최대 4년은 전문성을 발휘하기에 짧을뿐더러, 기껏 전문성을 발휘하라고 비례대표에 앉혔더니 그 의원은 지역구나 관리해야 되는 실정이다.

비례대표의 낮은 비율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동시에 뽑는 나라 중에서 현저하게 적은 비율이다. 지역구와 비례대표 선거를 병행하는 국가에서는 비례대표 의석이 총 의석의 1/3, 다르게 말하면 지역구 의석의 1/2 이상을 비례대표에 할당하고 있다. 학자들도 이 정도는 되어야 비례대표가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병행하는 국가들의 의석 현황. OECD 국가(이탈리아, 리투아니아, 헝가리, 멕시코, 일본, 독일, 뉴질랜드)와 동아시아 국가(몽골, 대만)을 조사 대상으로 삼았다. 대체로 비례 의석이 차지하는 비율이 30%을 넘으며, 독일과 뉴질랜드는 비례 의석을 정당 득표와 일치하는 과정에서 추가 의석이 발생해 실제 비례 의석과 비례 의석 비율은 더욱 높아진다. 이에 반해 한국은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비율이 현저하게 낮다.

비례대표를 그만큼 확보하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지역구 의석 줄이기. 현 정원을 유지하면서 저 기준에 따라 비례대표 의석 비율을 늘리려면 지역구가 53곳 사라져야 한다. 이럴 때 지역구 의원들은 크게 반발할 것인데, 이건 단순히 밥그릇 지키기로만 매도되어서는 안 된다.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농어촌 지역구가 대거 사라질 것이고, 지역 주민들이 크게 반발할 것이다. 지역구당 면적과 인구가 늘어나면서 지역 대표성은 떨어질 것이다.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괴는 꼴이다.

그러면 남은 건 이 방법뿐이다. 국회의원 한 사람에게 집중된 권한을 분산하면서 국회 전체의 힘은 강력해지고, 의회 내 다양성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음 번에 자세히 알아볼 이 방법은 바로… 의원수를 늘리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