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코 웬 애니메이터 출신 감독이 나서서 영화로 굿을 해야 할 정도였다는 것은.

<스즈메의 문단속>: 그 제의가 실은 불가능한 것일 때


0.
<스즈메의 문단속>은 좋은 영화였다. 이 글은 그 다음에 관한 이야기다.

1.
한국에서 <스즈메의 문단속>이 흥행가도를 달리는 광경은 좀 멋적다.
영화의 전반부는 웬 미성년 여자가, 혼자서, 별다른 계획도 신변 보호 수단도 교통 통신 비용 지불 수단도 없이 며칠간 아주 급하게, 여러 사람의 우연한 호의를 받아 가며, 서일본의 각종 폐허를 돌아다니는 다크 투어리즘 로드무비를 찍는다. 실은 여기까지만도 이미 성립 불가능한 서사인데, 심지어 그 여정을 인솔하는 것은 낯설고 미스테리하며 “잘생긴” 성년 독신 남자이기까지 하다.
물론 여자가 주인공인 로드 무비야 얼마든지 환영이다. 여기서는 기어코 성인 남성이 미성년 여자를 계몽하고 인도(해야 )한다는 촌스러움이 매우 유감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넘어가자.

2.
아무튼, 이토록 불가능한 영화가, 어째선지 한국 시장에서 모객에 성공하고, 심지어 너무나도 크게 성공하여, ‘역대 일본 영화 박스오피스 1위’를 거머쥐고 있다. 왜 이게 의아하게 느껴질까. 이게 단지, 관객의 절대 다수가 독신 여성인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 밀려났다는 그런 맥락 때문일까. (설마 단지 n주차 관람 특전 때문에 혹은 신카이의 인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니지 않을까?)

3.
그런데 사실 불가능하기로기는 <스즈메의 문단속>의 후반부도 불가능한 장면이다.
이동진도 그렇게 평했고 나도 진작 동의한 바 이 영화의 후반부는 일종의 ‘씻김굿’을 수행한다. 논란의 여지가 지나치게 차단된 완전한 가상의/환상의 세계에서, 그 스펙터클의 피제공자가 반드시 겪어야 하는 영적 체험과 카타르시스를 위한 충격적인 시청각적 경험이 펼쳐진다. 이 영화는 다분히 무속적인 경험이고, 바로 그 점 덕분에 불필요한 입씨름을 회피하며 제 평점을 깎아먹지 않으며 기꺼이 관람되고 있다. 그 서사가 불가능한데도 말이다.
아니지, 그 서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4.
줄거리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애초에 이 영화의 모든 사건, 모든 설정이 불가능하다. 등장인물들, 그들의 행동, 선택, 여정 등등에서 현실에서도 성립하는, 현실에 대강 조응하는 요소는 썩 드물다. 따지고 보면 ‘미미즈’의 존재가 가장 현실에 가깝다. 고대로부터 늘 있어 왔으며 아무 때나 내키는 대로 땅에 충격과 재앙을 가져오는 재앙신. 그건 역설적으로, ‘지진’이라는 재앙을 무속적으로 이해하는 가장 현실적인 접근이 될 수 있다. 나머지는 사실 영화의 선언과 제시를 제하고 액면만 뜯어 다시 읽어 보면 썩 이상하다.
고등학생인 스즈메가 삶에 미련이 없을 수는 있을지언정 “죽는 건 무섭지 않”은 지경까지일 리는 만무하다. 그 ‘스낵바’가 정말 전체이용가에 내보내도 좋은 접객 행위만 일어나는 곳일 가능성은 극히 낮다. 세발 의자 하나를 들고 웬 폐허로 달려나가는 동년배 여자애를 (숙박업소인) 자기 집에 데려와 하룻밤 숙박시켜 주고 옷을 입혀 내보내는 동년배 여자애가, 일본에 흔히 있을 거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소타는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남자지만, 소타의 친구 세리자와도 만만찮은 유니콘남이다. 웬 남자 대학생이 자기 오픈카에 미성년 여자와 미망인 여자를 태우고 도쿄에서 후쿠시마 근방 어딘가까지 드라이브를 달리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내겐 말하는 고양이나 사람이 의자에 씌이는 설정 따위보다도 이 부분이 더 말이 안 된다.

5.
아마 신카이도 그 위화감을 느꼈던지, 드라이브 씬 내내 그는 “현실에서 실제로 유행했던” 노래들을 깐다. “영화가 현실과 관계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나. 그렇지 아무래도 능청을 떨며 어물쩍 넘겨야 했겠지. 현실을 이 이상 반영하면 그때부터 이 모험 자체가, 이 모든 제례가 통째로 무너지고 말기 때문이다. 그 정도까지 망가지지는 않은, 그래도 아직은 살 만한 세상을 상정해야만 이 모험은 성립한다. 소타를 데리고 다니는 스즈메를 데리고 다니는 신카이가 모험하는 부분은 그런 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모험 자체에 대해서는 좀 있다 다시 다루기로 하고 그 모험에 동원되는 요소들에 다시 초점을 두자면, 흘러간 실제 옛날 노래들만이 이 영화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건 아니다. 실은 영화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요소가 그 기능을 수행한다. 현실을 무던히도 참조하면서도, 결국은 가상의 타임라인을 구성하는, 그래서 영화가 수행해야 할 제의를 성립시키는.

6.
이 영화는 그 전체가 특정한 현실을 지시하고 참조시킴으로써 어떤 효과를 얻으려는 시도의 결과다. 실제 푸티지만 안 넣었다 뿐이지, 편집된 요점, 각색된 서사, 현실과 현실을 해소하는 장소의 의식적 이격 등등이 전부 그 작업을 수행할 목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무속으로 성립한다. 샤머니즘이란 저세상만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이세상만을 말하는 것도 아닌, 이승과 저승을 연결 통합해 경험시키는 작업인데, 실은 <스즈메의 문단속>이 바로 그러하다. 이승에서 실제 벌어졌던 재난을, 스크린상이라는 저세상에서 강렬하게 경험시켜, 그 픽션이 지시하는 이승에서의 그 재난을 반 강제로 ‘소환’하고, 그 관객은 영화가 내리는 어떤 메시지에 ‘감복’한 채 그 자리를 떠나간다.
그렇게 <스즈메의 문단속>은 현실이 울적한 사람들을 위한 제례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현실을 직접 제시하지 못하는 일본 미디어에 과제를 안긴다. 일본에서 그리고 지금의 한국에서 이 영화가 (사실은 전부 통째로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데도) 이토록 흥행하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7.
나는 <스즈메의 문단속>에 별 유감이 없다. 이 영화가 하나의 거대한 진혼굿이라는 면에도 불만이 없다. 내가 불만족스러운 것은, 기어코 웬 애니메이터 출신 감독이 나서서 영화로 굿을 해야 할 정도로, 그간 그 재난들에 아무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고 아무런 회고도 복기도 대면도 수행되지 않은 상황 그 자체다.

8.
이 영화 역시 일본 미디어의 역사적 관습을 다 벗지는 못한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그간 천재 혹은 인재인 무엇을 취급했던 일본 미디어의 시도 중 그 억양이 가장 직설적인 혹 과감한 것이었을지는 모르겠으되, 그 내용과 어휘는 여전히 지극히 일본적으로 탈사회적이며 19세기적이다. 재앙은 우연한 변덕이며, 인간이 세운 구조가 필연적으로 일으키는 1차/2차 피해 따윈 없고, 진짜로 나쁜 인간이란 없으며, 실제로 문제에 접근해 위기를 피하고 “세계를 지키는” 것은 관의 ‘나와바리’ 밖에서 사명감과 내부 전승으로만 움직이는 은밀한 민간 조직이다. 심지어 실제 전투를 수행하는 것은 어린 남녀로만 구성된 자살 특공대다. 정말 어디서 많이 본 세계관 아닌가? 오직 이 관점으로만 점수를 매기면, <스즈메의 문단속>의 평가는 간단히 곤두박질친다.

9.
하지만 영화는 그 비난을 모면할 단 한 번의 회피 카드를 요긴하게 잘 쓰고 턴을 마친다. 그 변명이 뭐냐면, 이게 제의(祭儀)라는 것이다.
신카이가 스즈메를 앞세워서, 소타와 ‘미미즈 신화’를 앞세워서 하려는 것은, 그들의 모험을 시청할 일본인들이, 그들이 버려 놓은 세계를, 잊고 싶었던 동북부를, 실은 한 번도 직면된 적 없었던 생존자들의 절망과 고통과 불편을 직면하고 어떤 식으로든 그것과 ‘화해'(더 들어맞는 표현이 있을지 모르겠다)할 수 있도록, 그들을 대리할, 그들이 이입할 대상을 스크린에 띄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감정 이입의 대상의 얼굴은 친절하고 평범하며 익숙할 필요가 있다. 구태여 주인공이 스테레오타입과 싸울 필요가 없고, 보호자 역할로 잘생긴 성인 남성 외의 누군가를 상정할 필요가 없으며, 나중에 “전우애”(ㅋㅋㅋ)로 포장할 필요가 있을지언정 모두가 익숙하게 기대하는 그 둘 사이의 오묘한 케미스트리를 굳이 표백 제거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래도 채울 수 있는 곳은 채우자는 생각에서였을까? 태연하게 살아가는 독신 여성들이 끝까지 독신으로 남는다든가 하는 서브플롯들이 남아있는 것은.)

10.
그리고 이제 이 제의는 두 번 다시 불가능한 것이 됐다. 뭘 내놓든 ‘이보다 더 히트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이 이상 현실을 ‘프록싱’해서도 곤란할 것이기 때문이다. 동일본 대지진을, 후쿠시마를 진혼할 목적이라면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판을 깔아 이 정도의 작두를 타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게 <스즈메의 문단속>이었다. 그리고 이 굿판은 지속은커녕 반복도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이제 <스즈메의 문단속> 이후는 그 계시된 현실을 정말로 직시해야 한다. 그 제례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사건들을 보여주면서까지 어떤 현실을 목이 쉬도록 가리키고, 그 현실과 화해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내렸다. 그렇다면 이제는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어나야 하는 사건들이 일어나야 한다.
요컨대 이제 현실에서 문단속을 할 차례다. 영화에서의 문단속은 불가능한 판타지 모험의 일련이었지만, 현실의 문단속은 그래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스즈메의 문단속>의 그 대단한 흥행에 대해서는… 다들 대체 뭘 보고 나온 거냐는 반문밖에 할 게 없고 만다.

11.
묻고 싶다. 지진의 재앙신에는 이름이 있는데, 왜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수를 가리키는 재앙신엔 이름이 없는가? 그 저수조는 문단속하지 않는가? 다른 문은 더 닫을 것이 없는가? 그걸 닫는 책임도 웬 민간 비영리 무속 단체에 일임해두면 되는 건가? 지진에 대해서는 정부가 예측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고, 지진이나 미미즈나 전문가가 필요한 영역이라면, 왜 미미즈는 연구와 예측과 피해 최소화 정책에서 예외인가? 애초에, 왜 그 폐허들을 내버려두고 그저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때 되면 닫고 돌아서기만을 거듭하는가? 사람들의 아쉬움과 원념이 어딘가에 고이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청소하고 관리해 주고 사람들을 새로 넣어 주기만 하면, 이론상, 그 문들이 다시 열릴 일도 애초에 없지 않은가? <스즈메의 문단속>이야 영화니까 그렇다 치지만, 현실에서마저 그때그때 닥치고서야 발로 뛰어서 “문”을 찾아 어디서 마법처럼 튀어나오는 “열쇠”를 잡고 꽂아 돌려 잠그며 주문만 욀 생각일까? 아뢰옵기도 황공한 히미즈 신이시여, 머나먼 선조의 고향 땅이여, 오랫동안 이어받았으나 우리가 망가뜨린 원자로와 민간 자본의 난개발 지역구를, 감히 머리 조아려 삼가 돌려 드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