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이름을 붙여 보고 자신에게 가장 아름다운 꽃이 되어볼 것.

내가 나에게 이름을 붙여주었을 때


2019년도 개명신청자라는 이름으로 떠도는 이미지. 신뢰도는 보장할 수 없다.

학대다. 폭력이다. 부모라는 사람이 ‘자식’에게 한평생 불릴 이름으로 이런 것들을 지어준다는 사실이 말이다. 석석중이나, 김혈휘, 김목석, 온화해 같은 이름은 그러려니 하겠다. 그러나 ‘방구년’이나 ‘최고자’, ‘최왈왈’, ‘박아조’, ‘조까라’ 같은 이름을 아이에게 붙여준다는 건 그 자체로 폭력이다. 모욕으로 붙여진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에게는 이름을 불리는 행위 자체가 모욕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름은 무척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다. 만화 <비밀> 속 조연 은단오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바꾸고 싶다. 선천적인 심장병으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삶을 살며, 하는 일이라곤 오직 주인공을 이어주는 역할 뿐인 설정은 지겹고도 답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름도 없던 단역 같은 반 13번에게 ‘하루’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난 후에, 그의 삶이 점점 바뀌기 시작한다.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

이름은 곧 역할이다. 이름은 곧 삶이 되기도 한다. 붙여진 이름에 따라서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철학관에서나 들을 법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러니까, 보다 더 철학적인 이야기이다. 알튀세르는 ‘호명(interpellation)’이라는 개념을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호명하는 순간, 그 개인은 비로소 ‘주체’로 완성된다. 가족, 학교, 교회, 언론 등이 개인을 주체로 호명하는 순간, 다시 말해 개인 스스로 ‘주체’가 되었다고 여기는 순간 개인은 이데올로기에 완전히 복종하게 된다는 것.

알튀세르가 이야기하는 구조주의에서, 개인은 언제나 이데올로기에 의해 호명되며, 끌려다니는 존재일 뿐이었다. 스스로가 ‘주체적’이라 착각하면서 말이다. 사실 이름 붙여지는 모든 순간이 그럴지 모른다. 직책, 직위, 직급 같은 걸 벗어도 그렇다. 우리가 쓰는 이름 역시 사실 부모, 혹은 작명소에서 붙인 이름일 테니까. 그러니 우리, 오늘은 스스로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건 어떨까.

김춘수 시인의 시를 떠올린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가 비단 타인에게만 꽃이 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스스로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스스로에게 가장 아름다운 꽃이 되어볼 것.

시나

중학교 2학년, 캐나다에 갔을 때였다. 본명을 다들 부르기 어려워하길래 마음에 드는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아무리 골몰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고, 매일 마시던 시나몬 돌체 프라푸치노에서 이름을 따와 시나라고 붙였다. 다들 부르기 편해했던 것 같다. 받침도 없고, 무엇보다 예쁜 이름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이 이름은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본명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집과의 사이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도 계속 쓰는 이름이다보니 친구들은 종종 내 본명이 뭔지 몰라 당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계좌이체를 해야 할 때라든가. 이제는 ‘그냥 내 이름’이 된 이름이다. 찾아보니 그때 마셨던 메뉴는 단종된 모양이다.

시윤

“A 학생? 출석했나요?” “(일동) 네!”

여기서 밝힐 수는 없지만 내 이름은 무척 흔한 편이다. 성도 흔한데, 이름도 흔하니까 정말 ‘흔해 빠진’ 이름이 되어버렸다. 동명이인을 너무 많이 봤다. 중고등학교에 다녔을 때는 그래도 괜찮았다. 한 학교에 같은 이름을 쓰는 아이가 몇 있기는 했지만 같은 반이 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이름을 바꾸고 싶단 생각이 있기는 했어도, 이처럼 확고한 마음은 아니었다. 문제는 대학교에 간 이후였다. 80명이 넘는 학생들이 수업을 듣는 대형강의. 내 이름이 무려 일곱 번이나 불렸다. 사람이 적은 강의에서도 꼭 두 번은 내 이름이 불렸다. 내 이름이지만 내 이름이 아닌 느낌이랄까. 이 이름을 택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쓰는 사람을 본 적 없는 독특하고 세련된 이름, 나만의 것인 특별한 이름, 시윤 말이다.

새벽

동틀 무렵 하늘은 이렇다.

처음에는 그저 게임 ID였다. 게임 내의 인간관계를 정리할 일이 한 번 있어 바꿔 사용한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름처럼 쓰고 있다. 굳이 왜 새벽이었냐고? 음, 불면증이 심한 편이다. 유독 찬 바람에 불어오는 새벽에는 자주 깨게 된다. 잠에 잘 들지 못하는 건 분명 힘든 일이지만 이상하게 그 새벽의 시간이 싫지 않았다. 새벽이 품고 있는 묘한 분위기가 좋았다. 그 신선한 공기가 좋았고, 동틀 무렵의 하늘이 좋았고, 새벽에만 느낄 수 있는 잔잔함이 좋아 새벽이라는 이름을 고르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게임 속 닉네임이었지만 이제는 본명보다 더 많이 불리고, 본명만큼이나 익숙한 이름이 되었다.

빛찬

8년 전, 청소년 인권 운동을 시작하게 됐을 때 고른 이름이었다. 본명이 노출되었을 때 부담스러운 상황이 펼쳐지기도 하고, 운동을 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과는 달리, 각자가 마음에 드는 각자의 이름을 골라 쓰고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만화 캐릭터 이름을 쓰는 동료도 있었고, 살던 동네 이름을 쓰는 동료도 있었다. 나는 이름에 들어가는 한자(燦)에서 골라왔다. 빛날 찬에서 ‘날’을 뺀 셈. 조금 어둡고 소극적인 성격과 달리 환하고 밝은 인상을 주는 그 이름이 나는 좋았다. 운동과 거리가 멀어지며 더는 사용하지 않게 된 이름이지만, 여전히 날 ‘빛찬’이라고 불러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날 기억해주는 한, 나는 그 이름으로 불릴 것이며, 동시에 나는 스무 살 무렵의 내가 가졌던 태도와 열심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