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노동자라는 정체성 vs 대리 게이머라는 오욕
2020 총선을 앞두고 정의당은 비례대표 후보를 발표한다. 비례대표 1번, 류호정. 그가 당선권인 1번에 선출되자 여러 말이 오고 갔다. 그중 가장 큰 이슈는 ‘LOL 대리게임 논란’이었다. 그는 지난 2014년 5월, 남자친구를 비롯한 지인들에게 자신의 게임 계정을 공유했으며 이를 통해 더 높은 등급으로 승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논란이 되어 당시 재학 중이던 학교 게임 동아리 회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많은 이들이 폭발했다. 더불어민주당 황희두 공천관리위원은 “상상을 초월하는 문제”라며 “대리 시험에 걸린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래통합당 이동섭 국회의원은 “류 후보가 게임 업계에서 일했고, 그들의 권익에 앞서겠다는 사람”이라며 “이를 ‘조심성 없이 일어난 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견해를 드러냈다. 혹자는 ‘대리시험을 통해 명문대에 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어 억측과 추측이 잇따랐다. 그가 게임 회사에 입사한 것이 높은 게임 등급 덕택이었으며, 그가 진행했던 게임 방송에서 역시 이를 통해 경제적인 이득을 봤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게임 랭크는 입사 시에 기재한 적도 없었고, 그는 게임 방송을 통해 수익을 얻지도 않았다. ‘대리 게이밍’을 통해 어떤 스펙도 쌓지 않았다. 그가 얻은 게 있다면 높은 등급이라는 멋쩍은 만족감이었다. 그러니 모든 문제는 오로지 ‘게임 내부의 공정성을 헤쳤다’는 데에서 찾아야 했다. 물론 ‘게임 내부의 공정성을 해친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게임 내부에서만 문제가 되어야 한다. 그는 이미 ‘게임동아리 회장직을 박탈’당했다. 누군가 그의 계정을 신고했다면 계정 정지 등의 처분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비판을 받을 수 있는 행위지만, 그가 대리를 통해 등급을 올린 것과 IT 업계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싸울 자격이 박탈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축구 경기장에서 파울을 범했다고 해서 그가 축구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게 아닌 것처럼. 그는 “6년 전의 일이지만, 몇 번이고 사과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런 논란을 예상하고 있었다며, “사소한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고 얘기했다. 예상대로 논란은 그의 뒤를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것이다. 이것은 그가 감당해야 할 족쇄이리라.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미성숙했던 과거의 실수가 류호정의 ‘제목’일 수 없습니다. 저의 제목은 ‘젊은 노동, 진보정치 업데이트’입니다.”
공정성이라는 상호모순
우리는 이 사안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어쩌면 ‘별것 아닐 수도 있는 문제’에 대해 어떤 이들은 왜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가 하고 말이다. 이들에게 ‘공정’은 지상과제다. 공정은 곧 ‘경쟁에서 내가 불이익을 받지 않는 것’이다. 똑같은 트랙 위에서 모두가 자신이 이윤을 얻을 방법을 생각한다. 내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덜 노력한 누군가가 이득을 취하거나, 내가 노력한 것에 비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면 그건 ‘판 자체가 공정하지 못했던 것’이 된다.
<공정하지 않다>의 저자 박원익은 ‘신동아’ 3월호에 이렇게 썼다. “한 학생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학기 중에도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알바에 쫓기면서도 열심히 공부했지만 성적이 기대만큼 높게 나오지 않았다. 해당 학생은 성적에 관한 승강이를 벌인 끝에 선배(교수)에게 ‘알바를 하지 않아도 되는 다른 학생들과 자신은 출발선이 다르다.’며 항변했다.”
저자에 따르면 요즘 학생들인 20대들은 “공정하지 않은 ‘출발선’이나 자기 노력에 보상받지 못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입학, 취업 과정에서 점수로 연결되는 모든 것에 예민하다.”고 한다. 만약 그 학생이 출발점이 다른 것을 인정받아 더 좋은 점수를 받았다면, 즉시 그 교수는 ‘공정하지 않은 점수’를 주었다며 논란에 휩싸이게 됐을 것이다. 공정성이란 그런 것이다.
네게 공정한 것이 내게는 공정하지 않다. 내게 공정한 것은 네게 공정하지 않다. 공정은 상호모순적이면서, 동시에 민주주의의 가치에 어울리지도 않는다. 공정성이라는 이름 아래 어떤 사람들은 총여학생회를 없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저지했다. 개인이 자기 책임 아래 투자하고 결과를 감수하는 ‘비트코인’은 공정하며, 여기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불공정하다고 이야기했다. 공정은 지금에 와서는 차라리 자본주의의 논리에 어울리는 수사가 되었다.
기업을 먹여살린 소비자들에게 딱 1억만 돌려주세요
2020 총선을 앞두고 새롭게 탄생한 여성의당은 홍보 포스터를 발표한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부진 사장님! 신라호텔 애플망빙을 더 사 먹을 수 있도록 딱 1억만 돌려주세요.” “이미경 부회장님! 다음은 여성감독 차례입니다. 딱 1억만 받겠습니다.” “정용진 부회장님! 전국 이마트 단골들에게 딱 1억만 돌려주세요.” “정태영 부회장님! 슈퍼콘서트보다 힙한 슈퍼 기부, 딱 1억만 받겠습니다.” “정유경 사장님! 전국 신세계 단골들에게 딱 1억만 돌려주세요.”
비난이 쏟아졌다. 누군가는 이를 구걸이라고 비판했다. 재벌 역시 페미니즘의 시야에서 비판받아 마땅한 대상인데, 이들에게 돈을 받아 정치를 하겠다는 여성의당에게 쓴소리를 보태는 이들도 있었다. 레토릭도 문제였다. ‘애플망빙을 더 사 먹을 수 있도록’ 1억을 달라는 말은 1억을 받아 애플망고빙수를 사먹겠다는 이야기처럼 보였다. ‘다음은 여성감독 차례’라는 말은, 흡사 1억을 받아 여성 영화를 제작하겠단 말처럼 보인다.
언론에서도, 댓글 창에서도 이들을 향한 비꼼이 이어졌다. 이들은 해당 게시물을 삭제하고, ‘사과’를 했다. “여성의당 트위터 계정에 게재된 ‘희비 바이럴’ 관련해 많은 의견을 받았습니다. 먼저 주의 환기를 위한 자극적인 광고 표현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킨 점, 고개 숙여 사과 드립니다. 향후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여성의당은 해당 광고에 대한 논란을 자극적인 표현으로 인한 오해가 부른 해프닝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같은 사과문에서 여성의당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임금 성별 격차에도 불구하고 전체 소비의 85%를 차지하는 여성은 식음료 및 외식업계, 공연계, 출판계, 호텔 등의 주 고객입니다. 이렇게 여성으로부터 수혜와 수익을 얻고 있는 여러 기업의 오너들에게 여성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여성의당에 투자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습니다.” 임금성별격차가 있는 것은 맞다. 식음료 및 외식업계, 공연계, 출판계, 호텔 등의 주 고객인 것 역시 맞다. (전체 소비의 85%를 여성이 차지한다는 것은 틀렸다.) 여성이 CJ, 현대, 신라 호텔, 현대카드에게 큰 수익을 가져다준다는 이유로 1억이라는 돈을 요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정치라기보다는 소비자주의에 더 가까워 보인다.
정치를 삽니다 표를 팝니다
소비자주의자들은 “돈을 썼기 때문에, 내 돈을 받은 이들은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기업에 자신의 ‘소비자로서의’ 영향력을 과시하려 한다. 여성의당의 입장은 현재 도처에 깔린 정치적 소비자주의와도 일맥상통한다. 정치 소비자들은 ‘표’ 혹은 ‘정치적 지지’ 또는 세금을 통해 정당 혹은 정부, 나아가서는 국가에 무언가를 요구할 권리를 얻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들은 투표를 빌미로 대상의 정치적 입장, 혹은 행정적 처리를 자신의 뜻대로 처리할 것을 요구한다. 생각해보자. 투표는 정치적 행위이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지방자치단체장으로부터 무언가를 구매한 것이 아니란 이야기다. 소비자와 정치인은 다르다. 정치적 행위에는 반드시 책임이 뒤따른다. 정치적 의사 표시를 했다면, 그에 따른 결과 역시 투표자도 덜할지언정 책임을 져야 한다. 유권자와 소비자의 차이는 여기서 발생한다. 소비에 따른 불이익은 보호 받아 마땅하지만, 정치적 선택에 따른 책임은 개인 역시 통감해야 한다.
문제는 이런 정치적 소비주의가 국회나 청와대 바깥에 있는 이들만의 생각은 아니라는 것이다. 윤관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소비자의 날에 열린 당 원내대책위원회-상임위 간사단 연석회의에서 국민을 ‘정치 소비자’로 칭하며 “국회가 국민을 위해 할 수 있는 권리의식 신장과 국민의 소비자 보호 인식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괴감이 든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 역시 지난 13년 정치소비자협동조합의 출범을 앞두고 이들이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는 데 힘을 행사하는 조직이 될 것”이라 기대를 밝혔다.
투표 때마다 이 정치 소비자들은 다양한 상품들 사이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고르지만, 이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지는 않는 객체에 머물 뿐이다. “정치 소비자론의 또 한 가지 문제는 유권자를 철저히 정치과정의 객체로 고정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달리 표현하면 정치 소비자론은 ‘정치상품’을 개발하고 생산하는 쪽은 따로 있고, 유권자는 ‘스마트한 소비자’면 족하다는 태도다.” 사회비평가 박권일이 뉴스민에 기고한 칼럼에서 한 말이다. 그리고 이 고객들은 자신의 선택이 손해가 될 때만 표를 가지고 객체로서의 영향력을 드러내고, 그 목소리가 반영된 결과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또 다른 고객인 양 짐짓 항의할 뿐이다.
공정성과 정치 소비자라는 키워드
최근 대세로 자리 잡은 ‘공정성’과 ‘정치 소비자’라는 두 가지 키워드는, 현재 정치를 대하는 여론의 흐름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공정성.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와 결과를 보장하라’는 주장. 정치적 소비자. ‘모든 사람은 정치의 소비자이며, 자신이 원하는 상품을 선택할 권리를 가진다’는 주장. 마치 무척 민주적인 듯 보이는 두 양상은 오히려 오히려 한국 사회에 커다란 역행을 가져오고 있다.
세계적 게임이론 연구자인 최정규 경북대 교수는 시사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공정이란 게 좋은 말이기는 한데, 맥락에 따라 묘하게 현상 유지를 선호하고 개혁에 반대하는 논리가 된다.” 그렇다. 성소수자 차별, 경제적 차별, 장애인 차별, 여성 차별, 지역적 격차 등을 해소하기 위해 내놓은 정책이나 사회적 운동은 ‘공정성’을 이유로 격파된다. 최초의 트랜스젠더 군인인 변희수 하사의 ‘여군 복무’를 저지한 가장 큰 논리 중 하나는 다른 여성 군인들과 비교했을 때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하물며 ‘정치 소비자’는 어떤가. 어떤 소비자들은 끊임없이 ‘클레임’을 제기하며 자신이 낸 ‘푯값’을 할 것을 주문한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온갖 정치적 수단을 동원해 갑질할 준비를 마친다. 이는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모든 대상에게도 적용된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 진보적인 포지션을 취하고 있던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시사인, JTBC 등의 언론사들은 일제히 지탄과 불매, 또는 절독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우리 편 ‘조중동’이 되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받아야 했던 비난은 과도했다.
민주적 가치가 만드는 어떤 비민주성
이 얼핏 민주적 것처럼 보이는 가치들로 인해 파면당한 민주적인 의사 결정 과정과 그 결과를 보라. 우리는 이 현상이 보여주는 것이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시그널은 아닌지 의심의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다. 약자를 위한 정책을 펼치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민주주의는 그 누구라도 정치적 의견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어야 하고, 그런 기반을 만드는 것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몫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대두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보수화된 자본의 논리다. 손해보지 않겠다는, 이윤을 놓칠 수 없다는 약자를 향한 ‘공정한 배제’는 결국 모두가 손해를 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도 모른다. 소비자의 이름으로 원하는 것을 쟁취하겠다는 이 정치적 소비주의는 결국 보수적인 결정만 내리게 할 것이다. 표 값을 하기 위해서는 결국 ‘나에게 표를 준 사람’의 이윤만을 생각해야 하므로, 그 이윤의 평균값은 결국 ‘약자를 위해 세금을 쓰지 않고, 가장 중립적으로 가장 안전하게 행동하는 일’이 될 것이므로.
비정규직 문제는, 성소수자의 문제는, 여성의 문제는, 장애인과 빈곤인의 문제는 결국 이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바로미터’다. 우리 모두가 어떤 부분에서도 약자가 아니라면 좋겠지만, 결국 우리는 약자(아동)로 태어나 약자(노인)로 죽게 된다. 사람들은 최대한의 이윤을 얻기 위해 공정성과 정치적 소비자라는 키워드에 집착하지만 그럴수록 결국에는 어떤 이득도 보지 못하게 된다.
모두에게 공정한 법칙 따위 없다. 개인의 이윤을 재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그 이윤을 통해 사회가 부조리에 빠진다면 결국 어떤 이득도 얻을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할 수 있을 때, 정치 소비자들은 소비자를 뛰어넘어 민주주의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제야 비록 ‘공정성’이라는 이름이 제 가치를 찾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