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갈릴리에 ‘가버나움(Capernaum)’이라는 도시가 있었다. 성서에 의하면 예수는 이곳에서 가난하거나 약한 사람을 위해 수많은 기적을 베풀었다고 한다. 병을 고치거나 죽은 사람을 살렸으며, 교훈을 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지역 사람들은 예수가 기적을 행했음에도 자신의 잘잘못을 회개하지 않았다. 예수는 가버나움이 몰락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예언이 적중했는지 아니면 예수가 다른 기적을 행했는지는 몰라도 그 도시는 6세기 전후로 몰락하게 돼 오늘날에는 누군가 살았던 흔적만 남게 되었다.
성서 속 도시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영화 ‘가버나움’은 예수가 그곳 대신 이 사람들에게 저주를 내린 게 싶은가 아닐 정도로 고통 속에 살고 있다. 이야기는 레바논 빈민가에서 살고 있는 한 아이, 자인 알 하지가 법정에 서며 시작한다. 자인(자인 알 하지)이 법정에 서게 된 건 자인이 엄마와 아빠를 고소했기 때문이다.
자인은 아빠(셀림 알 하지)와 엄마(수아드 알 하지) 그리고 10명 가까이 되는 형제들과 같이 살고 있었다. 아빠는 전형적인 가부장이다. 특정한 직업 없이 집 안에서 줄담배만 태우면서 아이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돈을 벌게 하고, 기분 나쁠 때마다 애들을 욕하거나 때린다. 엄마는 그나마 집안일을 도맡거나 돈을 벌어오지만, 아빠보다 정도가 심하지 않을 뿐 애들에게 무관심한 건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자인은 소년가장으로서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있다. 자인이 약국에서 가짜 처방전을 통해 진통제를 얻어 오면 아빠를 제외한 전 가족이 모여 약을 빻아 주스로 만들고 엄마는 이를 교도소 재소자에게 내다 판다. 또 형제들을 이끌어 길거리에서 주스나 간단한 먹거리를 파는가 하면, 집주인의 아들인 아사드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을 도와 돈을 번다.
자인은 형제 중에서 유독 사하르를 아낀다. 문제는 그 여동생은 아사드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는 것. 사하르 나이는 11살로 추정되어진다. 나이를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부모가 모든 자식들이 언제 태어났는지 관심이 없을뿐더러 행정기관에 출생신고조차 안 했기 때문이다. 자인은 12살로 추정되어진다. 자인은 조혼을 막기 위해 사하르와 가출을 시도하지만, 결국 사하르는 엄마와 아빠에 의해 아사드에게 팔린다. 이것이 자인이 부모를 고소한 이유다. 영화는 재판정과 자인이 살아온 이야기를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한편 분노한 자인은 가출한다. 자인은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스파이더맨의 사촌(?) 바퀴벌레맨(하루트)을 따라 놀이공원에 들어가는데, 그곳에서 일자리를 구하다 라힐을 만나게 된다. 라힐은 원래 합법적으로 부유한 집의 가정부로 일했으나 그 집 경비원과 눈이 맞아 아이(요나스)를 낳게 되어 집을 도망쳐 나왔다. 때문에 비합법 체류자가 된 라힐은 놀이공원 화장실 한 구석에서 아이를 돌보고, 먹다 버린 음식물을 몰래 챙길 정도로 형편이 넉넉지 않다. 그럼에도 라힐은 자인과 같이 살게 된다. 자인은 라힐과 요나스와 함께 살면서 태어나면서 마음껏 누리지 못한 행복을 누린다.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라힐은 만료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위조 체류증을 새로 갱신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당국에 체포당한다. 몇 평 남짓한 판잣집에 남은 건 자인과 요나스 뿐. 자인은 자힐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만, 자힐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루하루 사는 게 고난이지만, 자인은 생판 남남인 요나스를 혹독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든 지킨다. 자인은 요나스를 끝까지 지킬 수 있을까?
이렇게 글만 보면 영화 내내 이야기나 분위기가 비극적이고 슬픈 것처럼 보인다. 나는 영화에 너무 깊이 빠져든 나머지 잠깐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영화가 마냥 슬프지만은 않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나한테 되묻겠지만 영화를 보면 내 말에 공감할 것이다. 이 영화는 인물들을 그저 관객들에게 억지 신파를 강요하는 도구로만 쓰지 않는다. 영화가 관습과 차별이라는 불합리한 사회 현실 속에서 인물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몇몇 인물이 현실에 맞서 어떻게든 버티려는 모습을 따스한 시선으로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짧은 두 시간을 영화관에서 보내고 나면 싸구려 연민과 나는 저들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다는 이기적 자기 위안보다는 이름 모를 사람들이 이름 모를 빈민가를 해매고 있을 거라는 생각과 우리가 저들을 위해 뭘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가버나움을 초록 네모 창에 검색했을 때 깜짝 놀랐다. 이 영화에 나오는 배우 대부분은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연기를 했는데, 영화 속 배우들의 연기는 정말 자연스러뤘다. 왜 이들의 연기는 자연스러웠을까? 그 이유는 영화 속 인물들이 현실에서 그런 삶을 살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자인 알 라피아(자인)는 시리아 난민 출신으로 시장에서 배달 일을 했고, 하이타 아이잠(사하르)는 베이루트 거리에서 껌을 팔고 있었다. 보루와티프 트레저 반콜(요나스)는 케냐와 나이지리아에서 온 난민이 결혼해 낳은 아기였다. 자힐로 분한 요르다노스 시프로우는 실제 레바논 당국에 체포되었다가 영화 제작진에 의해 간신히 풀려났고, 교도소에서 연기하는 중에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극중 자인의 변호사로 등장하는 영화감독 나딘 라바키는 배우 대부분이 연기를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서 정해진 대사를 외우게 하기 보다는 장면 상황에 맞는 대사가 무엇일지를 배우 스스로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연기하도록 요구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들을 알고 나니 이 영화는 그냥 만든 게 아니라 마치 자신들이 살아있음을 알리려고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이 영화를 보러 갔던 나는 마치 산속을 거닐다 산삼을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보통 영화관에서 본 영화 대부분은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에만 몰입할 뿐 그 뒤로는 잊어버리게 된지만, 가버나움은 내가 여태껏 본 영화 중에서 가장 많이 여운이 남는 영화다. 영화 그 자체나 영화가 만들어진 상황을 자꾸 되새김 하게 된다. 나는 이 글을 읽는 여러분께 감히 이 영화를 보는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