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여성 비정규직 아나운서라서?

아무도 그 여자가 자리 비운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SBS 뉴스 ○○○입니다. / 빠바밤빠바빠밤~

저녁 8시 25분, 전파를 쏘아 올리는 곳이 서울에서 지역으로 넘어왔음을 알리는 요란한 트럼펫 소리가 어김없이 울렸다. 분위기를 심각하게 만드는 배경음악과 함께 오늘 뉴스를 읽어주는 소리가 TV에 흘러나오고, 시보가 울리고, 앵커가 나와 인사하고… 어? 그 앵커 어디 갔지?

약 1년 전이었다. 시보가 끝나자 이 뉴스만 10년 가까이 본 내게 어색한 그림이 펼쳐졌다. 태어나면서부터 앵커였을 것 같은 남자 앵커 옆에 처음 보는 여자가 앉아있었다. 누가 보면 아빠와 딸인 줄 알겠지만, 그 여자의 정체는 신입 아나운서였다. 새로 온 앵커는 소감을 간단히 밝힌 뒤 뉴스를 진행했다. 첫 방송만 해도 목소리 톤이나 말투, 발음 등이 아나운서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으나 1년이 넘어가는 지금은 다행히(?) 그때보다 진행이 매끄러워졌다.

그 앵커 대신 원래 앵커보다 연차 높은 여자 아나운서가 앉아서 진행을 하고 있었다. 대체 아나운서는 사고 없이 뉴스를 잘 진행했지만, 뭔가가 빠진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중년 앵커가 비운 자리를 채운 대타 앵커는 꼬박꼬박 그 사람이 부재하게 된 이유를 알려줬다. 하지만 여자 앵커가 자리를 왜 비웠는지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의문이 가시지 않았지만, 지역 뉴스는 내 물음에 답을 해주지 않은 채 서울에서 내뿜는 우렁찬 트럼펫 소리에 놀라 달아나버렸다.

시계가 돌고 돌아 또다시 저녁 8시 25분이 되었다. 여느 때처럼 인트로-헤드라인-시보가 끝나고 앵커가 인사했다. 그 앵커가 돌아왔다. 두 앵커는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 뉴스를 술술 진행했다. 그렇게 뉴스가 진행되다 약간 덜컹거린 뒤 뉴스가 다시 중앙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여자 앵커가 부재한 이유는 어디에도 들을 수 없었다.


뉴스 앵커는 아무렇지 않은 일을 전달하고 이야기하고자 존재한다. 이에 따르면 남자 앵커의 부재는 아무런 일이 아니었고, 여자 앵커의 부재는 아무런 일이었다는 소리다. 그래서 남자 앵커의 부재는 소식이 되었고, 여자 앵커의 부재는 소식이 되지 못했다. 왜?

하나 집히는 게 있다. 남자 앵커는 정규직 기자인 반면, 여자 앵커는 계약직 아나운서다. 앵커 끼리는 지위가 동등해 보이지만, 단 석 자만 나오는 앵커 소개 자막이 그들의 신분을 감춘 것뿐이다.

사람들은 정규직 아나운서를 많이 봐왔지만, 실은 방송가에서 정규직보다 비정규직 아나운서가 훨씬 더 많다. 지역 방송사에서 일하는 아나운서 대부분은 프리랜서나 (무기)계약직 등의 비정규직 형태로 채용된다. 이 방송사는 아나운서 5명 중 1명만이 정규직 신분이고, 공영방송을 자처하는 옆 동네 방송사조차 정규직 아나운서보다 비정규직 아나운서가 많고, 여성 아나운서는 모두 비정규직이다. 최근에 등장한 종합편성채널이나 보도전문채널도 비정규직 아나운서를 많이 채용했다.

지난해와 올해 열린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는 공교롭게도 내가 사는 지역의 방송사 두 곳에서 각각 근무한 아나운서들이 번갈아 나왔다. 그곳에서 늘 누군가에게 따져 묻기만 했던 방송사는 따져 물어야할 대상이 되었다.

참고인 자격으로 발언대에 선 아나운서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비정규직 아나운서라는 이유로 회사에서 많은 차별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프리랜서 노동자는 상사에게 구체적인 업무지시를 안 받는 게 당연하지만, 그들은 상사로부터 구체적으로 업무 지시를 받았다. 당직 ‧ 대체 노동 ‧ 신입 직원 연수 교육 참여 등 정규직과 다름없이 노동도 했다. 하지만 일에 대한 보상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자의로든 타의로든 조용한 나날을 보냈건만, 노동 환경과 처우는 나아지지 않았다. 한 아나운서는 방송계를 떠나 법학전문대학원에 진학했다.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지만 정작 언론 스스로는 노동 형태로 사람을 차별하는 등 떳떳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또다른 아나운서는 최근 정규직 채용에서 오래 일한 자신이 아닌 다른 남성 아나운서가 채용되자 회사에 항의했고, 회사는 아나운서에게 프로그램 하차 통보와 민사소송으로 답했다.


전직 아나운서는 다른 지역 방송사에서 PD로 일하다가, 아나운서라는 꿈을 포기하지 못해 끝내 이 방송사 아나운서로 6년 간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신입 아나운서의 모든 속사정을 내가 알 수는 없지만, 그도 그 아나운서 못지않은 꿈을 품고 방송사 문을 두드렸을 것이다.

꿈을 위해 쏟아 부은 노력과 열정, 땀방울을 담기에 비정규직 아나운서라는 자리는 한없이 불안정하지만, 그런 자리조차 몇 없는지라 위태로움을 감수하겠다는 사람이 많다. 회사를 나가야만 했던 그 사람의 빈자리는 수많은 사람을 제치고 오늘날 메인 뉴스 여자 앵커가 된 그 사람이 채웠다. 카메라는 아무 것도 나아지지 않은 노동 환경을 비추지 않은 채 아나운서를 화려하게 비추고, 신입 아나운서는 진지한 분위기로 다른 사람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고발하고, 경쟁에서 떨어진 사람들은 신입 아나운서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을 것이다. 방송사는 뉴스가 아닌 대국민 사기극을 내보내고 있었다.

지금도 그 아나운서는 그 시간만 되면 밝고 평온한 표정으로 뉴스를 진행한다. 그 평온한 표정을 지켜보는 나는 되레 뭔가가 뒤틀리는 느낌이다. 나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여자 앵커에게 묻는다. “당신은 왜 자리를 비웠나요?”

10월 1일 문화방송 본사 앞에서 시민단체들이 지역 문화방송에서 행하는 아나운서 성차별 채용 실태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출처 = 서울여성노동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