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끊임없이 ‘사람답게 살 자격’을 증명해야 하는가?

시험이 뭐길래


누군가는 이런 결과가 나오기를 바라며 가슴을 졸였겠지만, 나는 당연한 결과라 별 감흥이 없다. 2012 수능에서 나는 사회탐구 세 과목 중에 국사를 봤다.(Latte is horse, Hanguksa? nope! Guksa!) 그때 국사는 사회탐구 영역 선택 과목 중 하나였다. 서울대는 국사를 보는 학생에 한해 입학생을 받았고, 서울대 갈 애들만 국사를 봐서 자연스레 난이도는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학생은 국사를 외면하던 시기, 나는 기어코 국사를 선택할만큼 한국사에 자신 있었다. 그때 공부하던 가닥 어디 안 가서인지 이 시험을 보기 위한 준비라고는 기출문제들 몇 번 풀어보는 게 전부였고, 그럼에도 이 성적을 받았다. 인강? 그거 먹는 건가요? 후훗…

한국사를 얼마나 잘 아는지 측정하기 위해서라면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은 굳이 볼 필요가 없지만, 공기업에 입사 지원서를 넣으려면 이 시험을 안 볼 수 없다. 공공기관 채용 공고문에서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이라는 단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서류 전형에서 우대 가산점 주는 곳이 대부분이고, 어떤 데는 아예 한능검이 원서 접수 자격 요건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공공기관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한국사 자격증은 기본적으로 하나씩 갖고 있고, 이 자격증이 없는 사람은 남들은 다 받는 점수를 못 받고 시작하는 셈이 된다. 나를 포함한 응시생 대부분은 공공기관 취업 목적으로 이 시험을 준비하고 1등급을 따내는 데 관심 있을 뿐, 한국사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함이라는 취지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요즘은 인국공이라는 줄임말이 더 익숙하게 다가오는 인천국제공항공사도 마찬가지다. 인천공항은 서류전형에서 한국사능력검정시험 2급 이상 소지자에게 만점의 3%를 보태준다. 나는 이제 한능검 1급 소지자로서 서류전형에서 3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여기에 지원할 생각은 없다. 토익이 900점대 중반이 되어야 서류전형 통과 안정권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는 800점대 초반도 간신히 얻었다.

기나긴 전형 절차 또한 내가 원서를 넣을 엄두를 못 내게 한다. 올해 상반기 공채 사무직에서는 지원자 중 600명만이 서류 전형을 통과할 수 있다. 서류전형 통과자에게는 응시자의 6%만이 다음 단계로 넘어 갈 수 있는 필기 전형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해서 걸러진 사람들은 면접을 총 세 번 본다. 컴퓨터로 한 번, 직무역량면접으로 한 번, 논술시험을 곁들인 경영진과 심층면접 한 번. 이를 다 통과하고, 내 몸과 신상에 문제없음을 확인해서야 비로소 목에 인천공항 사원증을 걸 수 있는 12명 중 한 명이 된다.

인천국제공항공사가 홈페이지를 통해 소개하는 신입사원 채용 절차.

이렇게 들어가기 위한 과정이 길고 험난한데도 공채 공고가 뜰 때마다 경쟁률은 100:1을 우습게 넘긴다. 지원자들은 괘념치 않는다. 사원증을 따내면 연 4,500만원 넘는 초봉과 1인당 평균 1억 원에 육박하는 연봉, 근무지는 오로지 수도권, 정년 보장, 칼퇴근을 누릴 자격도 생기기 때문에. 저 자리가 절박한 사람은 경쟁에서 떨어졌음에도 또다시 다음 공채가 올라올 때까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취업 준비에서 손을 떼지 못할 테다.

그런 사람에게 ‘인천공항 보안요원 직고용 문제’는 끝내고 싶은 기나긴 수행의 의미를 흔드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왜 저들은 아무런 시험도 안 보고 정규직이 돼지? 저러다 내 자리 뺏기는 거 아냐? 의심과 분노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결국 그 청원에는 청와대가 수긍할만한 답변을 반드시 내놔야 할 만큼 두려움과 화가 켜켜이 쌓이고 말았다.

7월 16일 오후 5시 기준, 35만 명 가까이가 청원에 동의했다.

“비정규직을 아무런 시험 절차 없이 정규직으로 직접 채용하는 것은 ‘불공정’하다.”라고 청원은 주장하지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들이 정규직이 되는 것이 공정 사회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보안요원이 수행하는 업무는 아무런 지식이나 자격 없이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전문교육 208시간을 받은 뒤 국토교통부에서 발급한 보안검색인가증을 받아야만 할 수 있고, 가만 서서 빈둥대는 게 아니라 이직률이 25%에 달하는 고된 노동이다. 그들은 단순한 알바생이 아니라 국가중요시설 ‘가’급을 책임지는 요원들이었다.

더욱이 3년 전에 입사한 사람들은 ‘공개 경쟁 채용’으로 또다시 입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래도 채용 과정이 불공정한가? 오히려 인천공항이 문을 연 이래로 이 사람들이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고강도 노동에 박봉에 해고 위험까지 시달려야 했던 게 불공정 아닌가?


하지만 서명인이 왜 20만 명을 넘겼는지는 이해를 한다. 우리 집은 온가족이 수험생이다. 지난달에는 동생이 행정직 9급 지방공무원 시험을 봤다. 아버지는 ‘사’자가 들어가는 자격증 시험을 준비 중이었으나 그만 원서를 접수하지 못해 시험조차 보지 못하셨다. 요즘 시험 공고는 대부분 인터넷을 통해 볼 수 있지만, 아버지는 컴퓨터 자체를 다루지 못한다. 컴퓨터 잘하는 내가 원서 접수를 챙겨야했지만, 나는 새해 첫 달부터 각종 자격증과 어학 시험에 여러 군데에 취업 원서 넣고 면접 보느라 정신이 없어서 원서 접수 일을 살피지 못했다.

길은 다르지만, 시험을 보는 목적은 비슷하다. 나와 동생은 일하더라도 기왕이면 안정적이고 좋은 곳에서 일하고 싶고, 아버지는 노후 대비 수단으로 자격증을 따려고 한다. 그렇다. 먹고 살길을 찾으려고 시험에 매달리게 된 것이다.

우리 집만 유별난 게 아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공공기관 취업이나 공무원 시험을 한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했을 것이며, 실제로 그 길을 가는 사람이 당신이거나 당신 곁에 한 명이라도 있을 것이다. 그나마 사람답게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청년들은 공무원 시험이나 공공기관 입사에 몰리고 있다. 그럼으로써 어떤 대형 공기업 정기 공채 경쟁률이 100:1을 넘는다는 소식에 우리는 크게 놀라지 않게 되었다.

정말로 불공정한 사실은 따로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대기업/공공기관 정규직 노동자가 되어야만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이라는 차이가 대한민국에서는 사람답게 살고 못 살고를 가르는 자격 기준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혹은 아무리 내가 하는 일이 고돼도 내가 정규직 노동자거나 대기업 소속 직원이 아니라면 (혹은 둘 다 아니라면) 내가 일한 만큼 보상을 받지 못한다. 이를 알기에 대한 청년들은 중소기업에 자리가 남아돌아도 중소기업을 가지 않고, 공공기관이 요구하는 각종 시험에 매달리며 사람답게 살 자격을 얻고자 노력한다.

비정규직이 내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고 오해를 한 순간, 몇몇 취업 준비생은 인천공항 정규직이라는 신성하고 누구나 탐낼 자리에 앉을 기회를 잃지 않기 위해, 악당이 되어버렸지만 실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내 일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꿈꿨을 뿐인 평범한 사람을 적으로 두고, 전쟁도 마다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은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불평등 문제를 불공정 문제로 눈속임하며 의미 없는 싸움을 부추긴, 노동자 머리 위에 있는 높으신 분들일 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격차는 한국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잘 보여준다. 2010년부터 비정규직 임금은 정규직 노동자 임금의 50%을 넘긴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자료 출처 : 통계청, 2019 한국의 사회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