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다가가기 어려운 여성 운동의 언어

페미니즘이 뭣이여?


‘암글’에서 ‘한글’로

세종대왕이 온 백성에게 훈민정음 창제를 널리 알린 날인 오늘만큼 내게 뜻깊은 국경일이나 공휴일은 없다. (내 생일보다도 더 기쁜 날^^…은 좀 너무 나갔나….)

오늘날 한국인들은 한국 상징물로 한글을 주저 없이 꼽을 테지만, 정작 훈민정음을 만들어냈던 조선 시대에 한글은 멸시를 받았다. 한반도에는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기 몇천 년 전에 만들어진 한자가 깊숙이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중국은 세상의 온갖 지식과 문물이 쏟아지는 공간이었고, 중화사상이 깊게 베인 성리학으로 무장한 지식인들은 조선을 세웠다. 신진 사대부들은 한자를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썼다.

신분이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했던 세상이었던 만큼, 글자도 자연스레 높고 낮음을 따져야 했다. 양반들에게 한문은 성현의 지혜를 익힐 수 있는 진정한 글자였고, 한문은 ‘진문(眞文)’, ‘진서(眞書)’라는 별명을 얻었다. 반면 훈민정음은 ‘언문(諺文)’, ‘언서(諺書)’, ‘반절(半切)’, ‘아햇글’ 등이라 불렀다. 훈민정음이 온전한 글자가 아니라는 생각, 낮은 사람이나 쓰는 글자라는 생각이 훈민정음을 깎아내리는 별명을 만들어냈다.

‘암클’또한 훈민정음에 붙었던 수많은 멸칭이었고, 어쩌면 훈민정음을 가장 노골적으로 비하한다. 저 말에는 ‘여자들이나 쓰는 천한 글’이라는 뜻이 담겨있고, 여성들을 남성에 비교해 떨어지는 존재로 봤던 시대상도 엿보인다.

많은 멸칭은 세종 의도대로 훈민정음이 민중들에게 널리 퍼졌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도 한다. 훈민정음은 신분이나 성별을 가리지 않았다. 조선 백성이라면 누구나 쉽게 배우고, 즐겨 썼다. 그들은 훈민정음을 활용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소통하고, 훈민정음으로 쓰인 소설과 판소리를 읽고 들었으며, 훈민정음으로 그들만의 지식을 전승하기도 했다. 조선 조정은 백성들에게 중요한 소식을 알리거나, 교육 자료 출판에 훈민정음을 활발하게 활용했다.

민중은 읽고 쓰기 쉬운 글자를 얻었고, 그 글자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양반들의 괄시 속에도, 일제의 탄압 속에도 살아남아,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도 한국어 언중 곁에 있다.

영어말투성이 여성주의의 말글

경사스러운 날에 편히 쉬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지만, 나는 지금 아쉬운 소리를 하려고 컴퓨터를 켰다. 여성운동에 적잖이 섭섭하기 때문이다.

‘너 일베/야갤러/꼰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잠깐! 나는 여성주의를 싫어하지 않는다. 나는 소수자와 약자라는 단어가 없을 정도로, 사람 모두가 차별받지 않고 동등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적 차별 구조에서 억눌린 여성들이 자신들의 인권과 권익을 스스로 찾는 운동을 싫어할 리가 없다. 오히려 환영한다. 오해가 풀렸는가?

하필이면 한글날에 맞춰서 주절대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아래 단어들을 보시고, 마저 내 이야기를 들어주시라.

‘가스라이팅’, ‘백래시’, ‘펜스 룰’, ‘맨스플레인’, ‘터프’, ‘코로셋’, ‘미러링’, ‘맨박스’, ‘젠더’, ‘섹슈얼리티’, ‘핑크택스’, ‘리밴지 포로노’, ‘미투’ ‘페미니즘’… 헉헉…

이 단어들은 여성주의 운동이 활발해진 요즘 널리 쓰이고 있다는 점과 영어에서 유래한 말을 번역 없이 그대로 가져다 쓴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저 단어를 한글로 쓰긴 했지만, 한국어가 아니다. 나는 그 점에서 불편함을 느꼈다.

여성운동에 관심이 깊거나 직접 몸으로 부딪치는 사람들은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어느 학문이든 운동이든 현대 사회에서 미국이나 유럽에서 영향을 받지 않은 분야는 없다. 여성학 연구나 여성 운동 또한 미국과 유럽에서 많이 발달해 있어서, 그런 것을 받아들이면서 연구하거나 운동하는 사람들이 저런 용어를 읽고 그대로 쓰는 것은 자연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나같이 여성주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저 단어를 봤을 때 너무나 낯설다. 백래시가 ‘사회 변화 등에 대한 대중의 반발’을 이른다는 걸 영어사전에 검색해봐야 알 수 있었고,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극단적 여성주의자를 일컫는 ‘터프(TERF)’는 ‘터프가이(tough guy)’를 줄여 쓴 줄 알았다. 펜스 룰(Pence Rule)을 처음 들었을 때, 펜스가 울타리(fence)에서 유래된 말로 착각했다. 애초에 저 멀리에 있는 나라에서 부통령하는 마이크 펜스(Mike Pence)의 일화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차별의 언어, 포용의 언어

다행히도 오해는 기사와 인터넷 검색으로 풀렸고, 어떤 분은 그렇게 용어를 찾아보는 행동이 여성주의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이런 과정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늘어놨던 것과는 다른 단어들을 보시라.

‘여자가 알아서 뭐 해!’, ‘여자는 시집이나 잘 가면 그만이야!’, ‘도련님/아가씨/서방님’, ‘바깥사람/안사람’, ‘친할아버지/외할머니’, ‘그/그녀’…

내가 제시한 낱말들은 한결같이 여성을 낮추거나 차별하거나 예외적인 존재로 여기는 관념이 베여있다. 가부장제라는 딱딱한 용어나 학술적 지식을 몰라도, 평범한 한국인은 저 말을 쉽게 쓰고, 의미를 이해한다.

우리는 왜 이 말을 쉽게 쓰고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까? 한국이 여성 차별적 사회라서? 맞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지금 여성 운동의 언어가 영어투성이인 것에 비하면, 저 단어들은 초등학교만 나와도(혹은 나오지 않아도) 쓸 수 있을 만큼 한국어 화자에게 친숙하고 입과 눈에 익은 단어들이다. 이렇게 두 단어를 놓고 보면 여성 차별적 언어는 우리 일상에 가깝지만, 여성 운동의 언어는 우리 일상과는 거리가 무척 멀어 보인다.

지금 여성 운동 용어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영어는, 세계인과 소통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지라도, 한국 사람과 원할히 소통하는 데에는 어려운 언어다. 한국에서 영어는 토박이말이 아니라 물 건너 온 말이고, 사람의 높고 낮음을 가르는 말이며, 이 구별에서 대개 여성은 열등한 사람으로 취급당한다. 여성주의가 그들을 품으려면 사람을 뭉치게 하는 쉬운 언어가 필요하다.

2019년 여성가족부는 국립국어원과 함께 ‘가족 호칭 개정안’을 만들었다. 부인의 가족을 예전보다 높여 부르는 방향으로 호칭을 바꾸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여성 운동에는 한글 정신이 필요하다

글자가 없었다면, 인류는 오늘도 돌을 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글자가 발명되면서, 인간은 지식과 기술을 후손에게 전승할 수 있었고, 후손은 선대에 물려 준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문명이 크게 발전하는데,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에 글자가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 한자라는 두꺼운 장벽은 여성에게 배움을 허락하지 않았던 시대상과 맞물려 여성을 온전한 사람이 되지 못하게 막았다. 한글이 생기고 나서야 여성들은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배움을 얻고, 그들의 목소리를 후손에게 전하게 되었다. 세종이 의도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한글은 여성 해방의 도구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에 여성 해방을 꿈꾸는 모든 이들이 한글 정신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간편하고 배우기 쉬운 한글이 말글과 지식을 독점했던 양반들만을 위한 세상을 깨뜨렸던 것처럼, 여성 운동도 남의 말이 아닌 우리 귀와 눈에 친숙한 말로 말글을 가다듬어야 한다.

그리고 그 가다듬은 말로 여성이 왜 억압된 존재인지, 무엇이 그들을 억압하는지, 억압해서 해방되려면 대중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널리 알려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당신과 내가 꿈꾸는 여성 해방은 좀 더 빨리 찾아올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영어에서 유래한 여성 운동 용어 몇 가지를 한국어로 가다듬었다. 글쓴이가 직접 머리를 짜내서 만든 것도 있고, 몇몇 매체에서 제안한 대체어를 인용한 것도 있다. 여기에서 제안한 말이 적절하든 아니든 여성 운동에 관심 있는 누구나, 용어를 어떻게 써야 대중들이 부르고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