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생을 살고 있는데, 그들은 아직 거기에 있다.

유성기업 노조의 여덟 번째 겨울


내 수능이 막 끝났던 그때도

2011년 12월, 나는 수능 끝난 고3이었다. 교실은 자유인이 되었다는 설렘으로 들떠 있었고, 학교는 그런 아이들을 감당할 수 없어 점심시간이 되면 학생들을 내보냈다. 어느 날, 나는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로 걷고 있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와 터미널 사이에 있었던 법원과 검찰청에 사람이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 난 건가? 터미널로 향하던 발걸음을 법원 쪽으로 옮겼다.

법원으로 가는 길목에는 유성기업 경영진의 처벌과 공정한 수사를 원한다는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정문에는 사람들이 현수막과 같은 내용의 피켓을 들고 있었다.

유성기업은 자동차 엔진에 들어가는 부품을 생산하는 기업인데, 심야 근무가 많고 노동 환경이 열악해 노동자들의 불만이 많았다. 참다 못한 유성기업 노동조합(민주노총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은 2011년 5월 18일 심야 노동 철폐와 주간 2교대제 실시를 외치며 파업을 시작했다. 이에 유성기업은 직장 폐쇄와 용역을 동원한 폭력 진압으로 대응했다. 파업을 강제로 끝낸 뒤에는 노조원을 상대로 징계와 소송을 남발했으며, 노조 파괴로 악명 높은 노무법인 창조컨설팅에 자문을 받아 사측에 우호적인 새 노조를 만들어 기존 노조를 차별 대우했다. 유성기업 노조는 유성기업의 이런 행태에 대해 시위를 했던 것이었다.

나는 유성기업 노조가 겪은 부당 대우가 참 안타까웠지만, 그 당시 나는 대학 진학에 신경 쓰느라 유성기업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그 일을 잊어버렸다.


내 군복무가 끝나가던 그때도

2014년 2월 10일, 나는 현역 입대를 대신해 법원 사회복무요원으로 소집되었다. 법원 앞에서는 검찰의 형사 처분이나 법원의 재판 결과에 항의하기 위해 시위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중에서도 돋보였던 건 다름 아닌 유성기업 노조였다. 점심시간쯤 되면 정문 앞에서 피켓을 들곤 하던 몇몇 노조원들은, 점심시간이 끝나면 아주 자연스럽게 법원 담벼락에 피켓을 내려두고 사라졌다. 피켓에는 몇 년 전 봤던 내용이 그대로 있었다. 비가 오면 비옷을 입으면서, 날이 더우면 땀을 흘리며, 날이 추우면 벌벌 떨면서. 나도 휴가가 있거나 하면 법원에 출근하지 않을 때가 있었는데, 그들은 꾸준히 법원 앞을 지켰다. 때때로 법원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호소문을 나눠주기도 했고, 사건이 심각한 방향으로 흘러갈 때면 천막 농성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판사들은 그걸 모르는지 재판은 하염없이 길어지고 있었고, 재판 결과들은 대부분 노조에 상처만 안겨주었다. (다행스럽게도 2심과 3심에서는 유성기업 노조에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내렸다.)

한 달에 한 번, 근로기준법 위반 재판이 열릴 때면 법원은 비상이었다. 그날만 되면 백여 명 넘는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재판을 보러 왔기 때문이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의경 두세 중대가 법원 앞을 지키고 있었고, 경비 공무원과 공익이 속한 법원 경비관리대는 재판 중 무슨 일이 일어날까 예의주시했다. 법원에서는 가장 큰 재판정을 배정하는데도 재판정은 방청객들로 꽉 찼다. 재판이 끝나면 재판정 바깥에서 담배를 피우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재판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다.

나는 노조원들과 직접 얽힌 일은 없었다. 내 일은 주로 잡다한 서류를 만지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정문을 지키는 유성기업 노조원을 볼 때마다 아쉬웠다. 그들에게 음료수라도 하나 사줘야 하나 싶을 때도 있었지만, 신분이 신분인지라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대신 관련 재판에 몇 번씩 방청하러 가서 마음속으로 그들을 응원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내 법원 근무는 2016년 2월에 드디어 소집해제를 하면서 끝나게 되었지만, 내가 법원을 정문을 나서는 그날에도 그들은 법원 정문을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이번 겨울에 들어서서도

2018년 12월 30일, 연말연시라는 심란한 시기에 나는 토익을 보고 나왔다. 시험장에서 나와 점심 먹으러 식당가로 가고 있었다. 길을 좀 걷자, 내가 소집해제를 한 이후 새로 터를 잡은 법원과 검찰청이 보였다. 새로 지은 건물 아니랄까봐 멋있으면서 웅장했다. 그런데 그 검찰청 청사 앞에 허름한 천막이 하나 있었다.

천막에는 ‘유시영 불법 배임 횡령 구속수사하라!’라는 글귀가 있었고, 검찰청 근처 거리에는 그런 현수막이 십여 개 달려 있었다. 유성기업 노조원들이 검찰청 앞에서 텐트를 치고 농성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그들을 조금이나마 위로라도 하고 싶었다. 나는 밥을 간단히 먹은 뒤 텐트 앞에서 한 노조원에게 말을 걸었다.

“저, 안녕하세요.”
“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저… 추우실까 봐 따뜻한 커피 드리려고 왔어요.”
“아. 들어오시죠.”

텐트 안에는 세 사람이 농성장을 지키고 있었다. 한기를 막기 위한 전기장판과 석유난로 그리고 잡동사니 몇 개만 놓여 있는 텐트는 유난히 휑해 보였다. 그들과 몇 마디를 나눴다.

“요즘 사측하고 충돌한 사건 때문에 더더욱 힘드시겠어요.”
“저희도 그 사건에 대해서는 잘못했다고 생각해요. 반성하고요. 하지만 그동안 있었던 일이 묻히는 것 같아서 참 안타깝네요.”
“그러게요. 사람들이 유성기업 사태에 대해 관심이 덜 한 것 같아요.”
“저희도 답답해요. 이렇게 법원 앞에서 천막 농성 하는 것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인데 자꾸 폭력 사태만 알려져서… 결국 국민의 의식이 문제인 것 같아요.”
“제가 카페에서 만든 커피 같은 걸 사 드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죄송스럽네요.
“아닙니다. 저희는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잘 먹어요. 오히려 이렇게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죠.”

십여 분 간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천막을 빠져나왔다. 낮이라서 그런지 햇볕이 제법 따스하게 내리쬐었다. 하지만 무슨 조화인지 햇빛은 법원 쪽에만 비출 뿐이었고, 검찰청 쪽은 어두웠다. 왠지 그들의 처지를 나타내는 듯했다.


지금도 아무런 기약이 없는 채로

7년이라는 시간은 짧지 않다. 내 고민거리는 ‘어느 대학을 갈까’에서 ‘어느 직장에 갈까’로 바뀌었고, 법원은 좁아터진 청사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청사로 옮기고, “촛불 정권”을 자임하는 문재인 정부는 이명박근혜 정권이 남긴 흔적을 느리게나마 하나둘씩 지워 나가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기나긴 시간에도 유성기업 사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아니 오히려 더 심각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약 두 달 전, 유성기업 노조원이 유성기업 경영진을 폭행하는 사건이 있었다. 나는 이번 폭력 사태 자체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 ‘자력구제 금지의 원칙’이라는 건 학교에서나 법원에서 충실히 배웠다. 문제는 이 폭력 사건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다. 조중동은 공권력이 훼손당했느니, 노조가 또다시 불법을 저질렀느니 호들갑을 떨었다. 정부는 그동안 있었던 유성기업 사측이 일으킨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없이, 이 건에만 한하여 노조에 대해 철저히 수사하겠다고 밝혔다.

ⓒ 중앙일보

법과 원칙. 말 자체는 참 좋은 말이다. 하지만 ‘조중동’과 현 정부가 같은 말을 써서 유성기업 노동자에게 같은 대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과연 무엇을 시사하는가. 애초에 유성기업 문제에 침묵하지 않고 “법과 원칙”대로 처리했다면 이런 폭력 사태가 일어났을까?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노동자는 각종 소송과 차별 대우와 감시 등을 통해 많은 고통을 겪었고, 약 한 달 전에는 유성기업의 압박 때문에 한 노동자가 자살했는데, 어째서 법과 원칙은 경영진에게는 한없이 자비롭고, 노조원에게는 한없이 엄격한 것일까.

그들을 옆에서 지켜보기만 한 나와 여러분은 매년 다음 여름, 다음 겨울을 살아가고 있고 또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2011년 이래로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정부와 사법체계의 외면 그리고 가진 자들의 냉소 어린 탄압 아래 한 번의 겨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올해면 햇수로 8년째인데, 그들은 도대체 무슨 반역을 도모했길래 이렇게까지 길고 모진 겨울로 추방을 당한 것일까. 봄은 올까. 알 길이 없다.

2019년 1월 6일, 유성기업이 “산재 소송을 취하하고 미타결 임금을 지급”하는 한편 유성기업 노조는 파업을 철회함으로써 노사갈등이 타협점을 찾았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처음 그 뉴스를 봤을 때는 이 글이 의미가 없어져 버린 줄 알았다. 하지만 며칠 뒤 유성기업 노조는 노조와 사측 간 합의는 일절 없었다고 밝혔다. 사측이 언론 플레이를 한 것이다. 그러면 이 글이 나간 지금 나는 기껏 수고스럽게 쓴 이 글이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난” 것을 기뻐해야 하는 걸까? 감이 잘 안 잡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