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신어(newspeak)를 만들어 쓰기 시작한 우리에게 한자 교육 운운이 무슨 소용인가?

심심한 사과는 필요없구요, 그래서 고등어 2개 얼마냐고요?


다들 (어떻게 이렇게) 사태 파악이 안 되나?

돌아가는 꼴이 가당찮아서 기어코 자판을 잡자니 막상 너무 오랜만인지라 손가락이 다 저려 온다. “심심한 사과 논란” 이야기다.

필요한 만큼만 간추려서 보자. 그러니까, 서울 어디에 씹덕후들 상대로 장사를 하는 모펀인가 하는 업체가 있어서, 그 업체에서 무슨 판촉 행사인가를 개최를 했는데, 그 과정에서 뭔가 석연찮은/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 사과를 해야 할 일이 되었고, 그래서 사과문을 올리면서, 거기에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라고 적었더니, 사과를 받는 입장인 (아마도 씹덕후들일) 자들이 더한층 진심으로 역정 내어 꾸짖기를 “지금 사과문을 쓰면서 심심하다는 거냐” 했다 이거 아닌가? 여기까지가 그놈의 ‘사태’인데, 사실 나는 이 사태 자체는 그냥 그만한 정도로만 가당찮다고 느낀다. 다만, 오히려, 이 사태를 두고 갑론을박 벌어진 “논란”이 일껏 못마땅할 따름이다.

그건, 사태는 하나인데 이를 둘러싸고 저마다 세워놓고 때리는 허수아비가 천차 만별이라서 그렇다. 혹자는 이 나라의 “실질문맹률” 통계를 들고 와서 즐거운 개탄을 늘어놓는다. 다른 혹자는 오죽 국어 교육을 홀대했으면 이리 되었겠느냐고 조소한다. 다른 이들은 ‘한자 교육’, ‘한자 병기’를 꺼내들고 와서 그 허수아비에 붙여놓고는 이게 옳으니, 그르니, 적정선이 어디니, 결국 언중의 선택이 진리 아니겠느냐니 오만 흰소리를 한다. 그 와중에 “한문”과 “한자”를 헷갈려하는 어린 호사가들은 차라리 여흥이라 하겠다. 진심인가? 한겨레신문 창간으로 기어이 진압된 줄 알았던, 그토록 켜켜이 케케묵은 한자 병기 찬반 토론을, 2022년 이 마당에 와서까지 해야 된다고?

이렇게 논의가 가리산지리산인 이유는 하나다. 사태가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사태란 무엇인가? 기어코 우리가 ‘신어’를 편찬하기 시작했다는 정황이다. 더도 덜도 없다.


“신어는 [디스토피아]고, [디스토피아]가 곧 신어일세”

신어(newspeak, 나라면 新言이라고 번역했겠지만)란 무엇인가? 조지 오웰의 1948년 역작 <1984>를 읽은 누구의 머릿속에든지 신어는 인상적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건 그만큼 어떤 사회 체제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디스토피아적일 때 언어가 어떻게 오염, 교란, 설계, 조작되는지를 <1984>가 남다르게 철저히 들여다보고 내다보았기 때문일 테다. 여기쯤에서 ‘이게 심심한 사과 논란과 무슨 상관이지?’ 하고 관두려는 분들이 있을 거 같은데, 그러지 마시고, 이미 알고 계신 내용일는지도 모르지만, 여기서는 조금만 복기를 하고 가고자 한다. 맹세컨대 그럴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자, 그럼 쬐끔만 살펴보자. 자본주의의 고향 영국에서 공산주의, 파시즘, 제국주의가 떨쳐일어난 아마겟돈을 다 지켜봤던 오웰은, 궁극의 디스토피아 체제에서 어떤 언어가 꽃피리라고 예상했을 것 같은가?

‘탁월한’이니 ‘훌륭한’ 같은 모호하면서 쓸모도 없는 말들이 수두룩하게 있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더좋은’이라는 말이면 충분하고, 이걸 더욱 강조하고 싶으면 ‘더욱더좋은’이라고 하면 될 것이네. 가장 쓸모없는 낱말은 동사와 형용사에 많지만, (…) 동의어뿐만 아니라 반의어도 없애야 하지.

조지 오웰, <1984> (2003년 민음사 정회성 역본)

조지 오웰은 발견했고 또한 예견했다.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어떤 말들은 그야말로 군말 취급을 받으며, 따라서 대체되거나 말살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특히 저마다 다르게 바라볼(“형용사”) 수 있고 다르게 할(“동사”) 수 있는 무언가에 관한 말이 그렇다는 것을. 그러므로 그 경향은, 특히 모두가 모든 것을 같게 보고 같게 대할수록 좋은 세계, 그만큼 획일적이고 맹목적이며 뻔하고 따분하고 빈 세계일수록 더 그러하리라는 것을.

전 세계적으로 매년 어휘 수가 줄어드는 언어는 신어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나? 우리는 매일 수십, 수백 개의 낱말을 없애고 있지. 말하자면 우리는 말을 뼈만 남도록 잘라 내고 있는 셈일세. 제11판에는 2050년 이전에 쓸모가 없게 될 낱말들은 단 한 개도 수록되지 않았다네.

위의 책

재미있지 않은가? <1984>는 기껏해야 20세기말에 쓰여진 소설 주제에 감히 2050년을 내다보며 이르기를, 그때쯤이면 앞서 살펴본 바 ‘군말 지우기’ 작업은 진작 끝나 있을 것이라고 (매우 일관되게) 장담하고 있다. 피골이 상접한 언어라는 심상을 우리 앞에 내밀면서까지 이토록 호언하는 데는 분명 자신 있는 근거가 있었을 게다. 아닌 게 아니라 2050년이 30년쯤 남은 오늘에 와서는 과연 지구촌 어디를 막론하고 고유 어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게 웬일일까?

자네는 신어를 만든 목적이 사고의 폭을 좁히는 데 있다는 걸 모르나? 결국 우리는 사상죄를 범하는 것도 철저히 불가능하게 만들 걸세. (…) 하지만 결국 그렇게 하는 것조차 필요 없게 될 걸세. 언어가 완성될 때 혁명도 완수될 것이네. 신어는 ‘영사’고, ‘영사’는 신어일세. 어때, 멋지지 않나, 윈스턴? 물론 이건 원래 B.B.[빅브라더]의 아이디어였다네.

위의 책

그게 웬일이냐 하면, 오웰이 노파심에 부록까지 달아 가면서 해설한 바, 그건 “영사”가 존립하는 한 필연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영사’를 아주 크게 확대 해석해서,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신어’ 개념을 통해 <1984>가 주장하는 바를 종합해 보자면 이렇게 된다. 평범하고 맹목적인 다수 대중을 획일적으로 통제하(려)는 이념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다양한 관점이 쓸모 없으므로, 그 관점을 야기하고 지탱하는 언어는 필연적으로 쓸모없어진다. 실은 그 역도 성립한다. 다양한 존재와 진술이 쓸모 없어서 거기에 필요한 언어가 쓸모없어지는 사회가 되면 될수록, 다수 대중이 획일적으로 맹목적 통제에 순응할 가망이 더 커진다.

이제 우리는 드디어 “고등어 2개” 얘기로 넘어갈 수 있다. 앞의 소결론은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사태의 거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영사’가 아니라 ‘미자’, 미국식 정치-경제 신자유주의라는 점이 다를 뿐.


“[체제]는 궁극적으로 목구멍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말에서 어휘가 모지라지고 있다는 데 동의하기 어려우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분들을 위해 간단한 사례 하나만 대 드리겠다. 한국어의 경우 최근 몇십 년간 ‘단위성 의존 명사’가 급격히 빈곤해져 가고 있다. 요컨대 갈수록 모든 걸 ‘개’로만 세는 세상이 돼가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신발 한 ‘켤레’ 대신 신발 1개를 사며, 콘택트렌즈 ‘네 알’을 파는 대신 콘택트렌즈 4개를 팔고, 기타 ‘한 대’가 아닌 기타 1개를 중고 거래한다. 문외한인 내 눈에도 이 정도로 눈에 띄니 과연 심각한 일이다. 동전 한 닢, 한약 두 첩, 웹사이트 세 군데 같은 표현은 차라리 “그때 그 시절 정감 넘치는 추억의 옛말”이 되어 가는 지경이다. 엄마한테 물어보니, 요즘은 홈쇼핑에서 고등어 한 손을 팔고 있을 때조차도 ‘고등어 2마리’라고 써놓는다지. 이런 식이면, 조지 오웰이 아닌 나조차도 능히 장담할 수 있는 바, 2050년쯤이 되면 마침내 우리는, 한 손은 고사하고, 고등어 2마리가 아닌 ‘고등어 2개’를 주문하게 될 것이다.

이건 왜 그러할까? 여기서부터가 좀 무리수가 있는 나만의 주장인데, 자본주의가 자유주의적으로 번성하면 할수록 이는 필연적인 일이다. 자본의 관심사는 고등어의 가격과 고등어의 거래량이지, 결코 “그걸 왜 하필 간고등어라 부르는지”, “어쩌다가 큰 고등어 뱃속에 작은 고등어를 대신 채우기 시작했는지”, “그렇게 합쳐진 두 마리의 고등어를 왜 한 손 두 손 세는지”가 아니다. 오히려 자본은 이를 적극적으로 모르려고 한다. 그걸 알아 버리면, 그래서 ‘손’ 단위를 쓰게 되면, 시장은, 고등어를 한 손씩 살 때마다, 크기를 구분하고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소금에 절이던 누군가의 노동을, 그 부산물의 실질을 연상해야 한다. 그건 고등어의 생산, 유통, 소비를 결코 촉진하지 않을 것인 바, 되려 적극적으로 개찬하고 몰각해야 할 현실이 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는 반드시 빨리 발음될 수 있으면서 화자의 뇌리에 다른 연상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분명한 의미를 지닌 짧은 약어들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 <신어의 원리> (2003년 민음사 정회성 역본)

오웰은 계속해서 ‘각종 명칭의 의도적 축약’을 대표적인 실례로 앞세워서, 획일적인 디스토피아 세계가 일반적으로 떠받들게 되는 언어 문화의 요체를 강론한다. 그건 한마디로 “오리말(duckspeak)”이다. 좋은 언어 생활은 단조로운, 다른 해석이 유효할 수 없는, “당”의 “이념적 필요성에 부응”하는 말 위주의, 거침없다 못해 뇌를 거치긴 하는지조차 알 수 없으리만치 자동적으로 나오는 말과 글로 이루어져 있다. 결국에는 마치 “기관총에서 총알이 튀어나오듯” 하는, 혹은, 오리처럼 꽥꽥거릴 뿐인.

이런 낱말들을 사용하면 (…) 조잘거리듯 말을 빨리 할 수 있게 된다. 신어의 목적은 바로 이것이다. (…) 일상생활에서는 말하기 전에 생각하는 것이 반드시 혹은 이따금씩 필요하겠지만, (…) 당은 궁극적으로 뇌신경을 전혀 쓰지 않고 목구멍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 ‘duckspeak(오리말)’이라는 신어에 여실히 나타나 있다. (…) 만약 꽥꽥거리며 말하는 의견이 정통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칭찬을 의미한다.

위의 책

여기까지 온 현대 한국의 지성 있는 독자라면 몇 가지가 연상되어 견디기 힘들 것이다. “뇌로 말하지 않고 목구멍으로 말하는” 자들은 이미 최근 들어 더 자주 더 많이 목격되는 바다. 공휴일마다 광화문에 집결해 누가 써다준 망령된 소문들을 목놓아 복창하다 흩어지는 숱한 늙은 남자들, 디시니 펨코니 익뮤니 하는 데서 갖은 혐오를 글공부해와서는 생각 없이 현실과 온라인에서 복창하는 남자들, ‘카더라’와 ‘뇌피셜’과 ‘논란정리’에 불과한 것을 무슨 중차대사인 양 제 이름 석 자도 안 걸고 쏘아대는 “렉카” 남자들, 어째서 오늘이라고 안 쓰고 금일이라고 써서 내 과제 계획을 망쳐놨냐고 악을 쓰던 남자 대학생들 같은 거 말이지. 그리고 이제 그 사례에 ‘모펀 씹덕후들’이 추가된 것뿐이다.

감히 추리하는 바, 그들 역시 사실은 적극적으로 모르려고 한다. 그들에게는 배우면 곤란해지는 것들, 그래서 부정하고 망각하고 수정해야 할 현실이 있다. ‘금일’이 ‘오늘’이라는 걸 배우고 인정해 버리면, 나만 마감일을 금요일로 오해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건 자기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모펀 씹덕후들 역시 마찬가지다. 모펀 책임자가 ‘깊고 진지한’ 사과를 하고 있다는 걸 받아들여 버리면, 그들은 더 이상 그토록 별렀던 씹덕후 행사의 불상사에 대해 그렇게까지 화낼 수가 없다. 대신 다른 남자들처럼 수치를 감추려고 역정을 내겠지. 지금 내가 그걸 모른 게 중요한 거 같냐고. 사이버렉카가 그렇고 “태극기부대” 역시 그렇다. 모든 ‘오리말’은 대체로 같은 원리, <신어의 원리>를 따를 따름이다.

이쯤에서 하나만 한꺼번에 논파하고 이 대목은 매듭짓고자 한다. 한자 병기, 국어 교육, 실질 문맹률 따위 논의는 완전히 헛다리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다른 그 어떤 이유보다도, 이들은 적극적으로 모르려고 하기 때문이다: 알아봐야 쓸모가 없거든. 한자를 옆에 써 주고, 동음이의어마다 어원이 뭔지 다 알려주고, “책책책 책을 또 읽읍시다” 같은 거라도 해서 문해율 올려놓는 것만으로 “오리말”이 줄어들 거 같은가? 무한 경쟁 완전 시장을 부르짖는 신자유 자본의 영향력에 따라 경제가 완전 편제되어 있고, 정치가 자본의 지시에 따라 우파 포퓰리즘과 중도 자유주의 사이를 적당히 조타하는 요식 행위일 뿐인, 이렇게까지 단 하나의 이념이 만사를 속속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한자 교육 조금 해 주면 사람들이 갑자기 고등어 한 손을 찾고 심심한 사과를 수락할 거라고?

그럼 어떡하면 되느냐고? 어려운 얘기지만, 이를테면 심심한 사과를 주고받는, 그런 게 있는, 그런 게 있어야 하는 세상으로 가야 된다. 그것말고는 답이 없다.


그 말을 모른다고 욕할 바엔, 그 말이 필요없어진 세계를 욕하라

내가 멜버른에 워킹홀리데이로 가서 첫 한 달 동안 언어적으로 가장 놀랐던 두 가지가 뭔지 아는가? 하나는, 마음만 먹으면 “really?”와 “ok” 두 마디만으로도 살 수 있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supermarket’, ‘train station’ 같은 (초딩 때 배운) 일반 장소 명사가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둘 다 시사하는 현실이 얼추 비슷하다. 그곳은 모든 장소에 브랜드가 붙어 있었고 다 누군가의 사유지였다. 사람들은 슈퍼마켓이 아닌 ‘울워스’에 갔으며, 전철이 아닌 ‘메트로’를 탔다. (심지어 축구장 이름도 “에티하드” 스타디움이었다.) 그렇게 획일적인 세계에서 돈 쓰는 사람으로만 살자면, 그때는 “영어회화”조차 필요없어진다. 나는 이미 내 코앞에 들이닥친 각종 화려한 선전과 ‘딜’을 보고, “정말이냐” 확인한 다음, “좋다” 수락하기만 하면 되었다.

반대로 말하면 그 범주 바깥으로는 조금만 비껴나가도 위태로워 보였다. 동유럽 문화권에는 ‘유로지브이’라는 생활 양식이 있다고 한다. 기행을 일삼으며 종종 노숙을 하고 자기만의 가치관을 세계에 갈파하며 유리 전전하는 이들을 부르는 말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세상에 이런일이”,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프로에서 소비되고, 호주 같은 자못 심각한 영미권 자유민주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그저 ‘홈리스’로 범주화될 뿐이다. 그들이 그저 햇빛 쬐고 공기 마시며 살기만 하겠다는 것을 그들은 기어코 참지 못한다. 왜 그렇겠는가? 그 사회가 ‘주거’라는 영역에 있어서만큼은 더없이 획일적으로 강압적인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에서 노숙자 혐오를 해소하자는 건, “심심한 사과”의 한자 풀이를 달아서 그들의 문해력을 높여주자는 따위와 같은 농담이다.

점점 더 많은 말이 필요없어지고 있다면, 그건 점점 더 많은 개념, 경험, 실천, 지향이 없어지고 있다는 뜻에 다름아니다. 고등어를 손질해서 손으로 쥐는 걸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고등어 한 손이란 너무너무 이상한 말일 뿐이고, 그렇다면 수산물 가공 시장이 날로 “선진화”될수록 고등어 한 손을 찾을 일은 없어질 것이다. 그렇게 해서 더 많은 말을 잃고 나면, 그때는 그만큼 더 많은 존재, 인식, 행동, 이상을 잃어버리는 악순환으로 빠질 것이다. 심심한 사과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제 누가 깊고 진지한 사과를 하겠는가? “보상”으로 “사료”나 던져주며 “흑우들”을 욕하기 바쁘겠지. 그렇게 다 사라지고 깎이고 쓸려나간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뭐긴 뭐야 렌즈도 기타도 생선도 다 ‘개’ 단위로 골라서 “really? ok” 두 마디로 셈을 치르고 그저 소비에 골몰할 뿐인 디스토피아지.

그동안 명예, 정의, 도덕, 국제주의, 민주주의, 과학, 종교 같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낱말들이 없어졌다. (…) 혁명 이전의 문학은 오직 이념적 번역으로만 존속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독립선언문 중의 유명한 구절을 예로 들어 보자.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로부터 남에게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으며, (…)” 이 글이 지닌 본래의 의미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신어로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위의 책

<1984>가 예측한 신어의 향방과 실제 발생하고 있는 것과의 차이는, 내가 보기에는, 전자가 누군가의 기획이라면 후자는 모두가 자본주의 체제에 가담하거나 포섭되거나 하면서 다같이 편찬해나가는 중이라는 점이다. 그 부분은 자못 비관적이면서도 동시에 희망적이다. 우리가 명예를, 정의를, 도덕을, 우리 조상들이 간고등어를 세 왔던 의존성 단위 명사를, 과학과 종교를, 진지한 사과를 하는 법을 알고 배우고 활용하고 전수하는 한, 그 단어들은 삭제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확실히 별로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돈 주고 사고 싶은 (혹은 살 수 있는) 상품도 아니라서, 그저 상거래에 불과한 무언가로 나날이 전락해 가는 오늘의 삶과 점점 관계가 없어져 간다. 그때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그리고 그게 증명해 줄 우리의 신세에 대해서는, 조지 오웰이 스포일러를 다 해놓은 상태다. 이제 어쩔 것인가?

일단은, 한자를 모르네 교육이 땅에 떨어졌네 운운 얕은 개탄을 늘어놓는 하바리 짓은 하지 말자. 개탄할 거라면, 우리말이 얼마나 신어에 가까워졌는지를 개탄하자. 그건 곧 우리 사회가 얼마나 오웰적 사회가 되었는지에 대한 개탄이고, 그건 차라리 이 세계에서 우리가 보호해야 할 멸종 위기의 영역을 둘러보는 일이라도 된다. 심심(深甚)이 무슨 뜻인지 모르냐고 혀를 차지 말고, 어찌 이 나라 백성들은 아무도 심심한 사과를 주고받지 않느냐고 자문하자. 원 이렇게 써놓고 보자니까 정말 우리는 참 강호의 도의가 댓글창에 떨어진 최첨단의 홍진세계를 살고 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