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22일
그날도 국회하면 으레 떠오르는 모습이 본회의장에서 연출되고 있었다. 우뚝 솟은 의장석에 이윤성 국회부의장이 앉아있었고, 한나라당 의원과 국회 직원들이 의장석을 인간띠로 둘러막았다. 야당 의원들은 그 인간띠를 어떻게든 뚫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이 공성전은 어떻게든 민주당이 지는 싸움이었다.
당시 과반당이던 한나라당은 169석인데 반해 그 다음 정당인 민주당은 한나라당 절반도 안 되는 84석. 이건 다 무효라는 외침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본회의 개의 선언한지 1시간도 안 돼서 그 날 상정되었던 안건이 모두 가결처리 되었다. 의장석에는 부의장이 의사봉을 3/4박자로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아래에서는 패잔병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 날 상정된 안건은 모두 네 건. ‘신문 등의 자유와 기능 보장에 관한 법률(신문법)’ 전부 개정 법률안과 ‘방송법’ 일부 개정 법률안, ‘인터넷 멀티미디어 방송사업법(인터넷방송/IPTV법)’ 일부 개정 법률안, 금융지주회사법 일부 개정 법률안 등 총 네 건이었다. 이 중 금융지주회사법을 제외한 나머지 세 법은 듣기만 해도 하품 쏟아질 정도로 지루하고 긴 이름을 줄여 미디어법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명박 정권은 자신들을 집권시켜줬고, 앞으로도 집권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조선 ‧ 중앙 ‧ 동아일보에 보상을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미디어법이 통과됨으로써 신문사가 방송사를 대주주로서 소유하고 경영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지상파 방송도 아닌 주제에 보도까지 할 수 있는 종합편성채널을 얻게 되었다.
물론 그때가 지금보다야 상황이 낫지만 당시에도 신문 산업은 위기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권력과 부를 유지할 수 있는 미디어법은 보수 신문사에 아주 적절한 보상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지 1년 반 지나갈 때쯤 정권과 한나라당은 직권상정과 날치기라는 강수에 일사부재의 원칙 위반이라는 무리수까지 두면서 미디어법 통과를 힘으로 몰아붙였다.
직권상정은 국회의장이 상황이 ‘시급’하다고 판단되는 법률안을 상임위원회와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바로 본회의로 올려 보내는 제도다. 긴급한 상황에서 쓰라고 만든 제도였지만, 항상 다수당은 이를 소수당의 반대를 물리치는 최종 무기로 종종 써왔다. 의장은 재임 기간 무소속이지만 자신을 의장으로 만들어준 다수당의 압박에 못 이겨 고심 끝에 직권상정을 했다. 반대당이 직권상정에 당한 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통과된 법안을 날치기라고 깎아내리고, 사과를 요구하는 것 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노무현 탄핵안, 미디어법 등이 통과되었다. 미디어법 소관 상임위원회에서는 여당 의원이 위원장이었기 순조롭게(?) 통과되었으나 그 다음 절차인 법제사법위원회에서는 위원장이 야당이었기 때문에 법안 처리가 가로막혔고, 결국 의장이 직권으로 상정해버린 것이다.
일사부재의는 한 번 부결된 안건은 같은 회기에 다시 제출할 수 없다는 원칙이다. 이는 전 세계 의회가 보편적으로 채택하는 원칙이고, 우리나라 ‘국회법’ 제92조에도 이 원칙이 새겨져 있다. 소수파가 의사 진행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만든 원칙이건만, 정작 한나라당은 다수당이었음에도 아무도 건들지 않던 이 무기를 맨 처음으로 쓰고 말았다. 세 법 중 방송법 개정안은 국회의원 절반 이상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결되었지만, 이윤성 국회 부의장은 이를 다시 투표에 부쳐 통과시켰다.
이때 본회의는 제283회 국회 제2차 본회의(7월 임시 국회)였다. 두 달 뒤에 열리는 정기회에서 처리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뭐에 쫓기듯 급히 처리했다. 민주당은 미디어법이 일사부재의 원칙을 어겨서 통과되었다는 이유로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청구했지만, 헌재는 ‘절차가 문제긴 한데 그건 우리가 신경 쓸 건 아니고 니들 알아서 하셈.’이라는 취지로 미디어법이 합헌이라 결정했다.
2019년 4월 29일
회의실 안팎이 소란스러웠다. 밖에서는 자유한국당 의원과 보좌관들이 좌파독재저지와 헌법수호라는 말을 앵무새 마냥 외쳐댔다. 안에서는 위원회에 소속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려 애를 썼다. 법안 문제점부터 지금 표결 절차가 무효라는 말에 위원장한테 그렇게 정치하지 말라는 소리까지. 국회의사당에서 아무말 대잔치가 열린 듯 했다.
하지만 위원장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표결을 진행했고,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4당 소속 위원들은 투표했다. 결과는 각각 12:8과 11:7. 자정을 넘겨서야 정치개혁특위의 선거제 개혁법안과 사법개혁특위의 공직자비리수사처/검찰 권한 축소 법안이 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되었다. 자유한국당이 국회 농성을 벌인지 1주일 만이었다.
패스트트랙. 신속처리안건이라는 용어보다 더 잘 알려진 이 제도는 직권상정 요건을 강화하는 대신 도입되었다. 상임위원회에서 특정 안건을 처리하려고 하는데 소수당이 방해하거나 안건이 시급하다고 여길 경우 위원회 재적 의원의 3/5이상이 찬성하면 일정 기간이 지난 뒤 안건이 자동 상정된다.
말이야 빠르게 한다는 뜻이지만, 이걸 지정하기까지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국회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었고,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4당(더불어민주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은 비례대표 의석 확대와 전체 의석수가 정당이 받은 실제 득표율에 절반 정도 비례하도록 하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에 합의했다.
독일과 같이 득표율과 의석수를 완전히 비례하도록 하는 데까지는 개혁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만 해도 어딘가 싶었다. 하지만 자유한국당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회의원 정원 10% 축소와 전면 소선거구제 도입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방안을 선거제도 개혁안이라 제시하면서 선거제도 개혁에 훼방을 놨다. 공수처 도입과 검찰 권한 축소라는 사법 개혁 법안도 마찬가지로 훼방을 놨다.
참다 참다 못한 여야 4당이 이 두 법안을 패스트트랙으로 지정해서 통과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자유한국당은 좌파 독재가 실현된다는 분명 우리말인데도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이유로 패스트트랙 지정을 방해한다. 의원들이 위원회 회의실 앞을 점거하는 건 양반이었다.
법안을 제출하는 의안과에 쳐들어가 법안을 제출하지 못하도록 막고, 한 의원이 위원회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의원을 의원실 안에 감금시켰다. 4당이 회의실이나 의안과에 진입하려고 할 때는 폭력을 동원해 진입을 막았다. 국회선진화법(국회법 개정안)은 설자리를 잃었다.
국회선진화법이 무엇인가? 우리 자유 대한민국의 위대한 영도자 박근혜 각하께서 대통령되기 전에 민주당과 대국적으로 손잡고 만든 법 아닌가? 직권상정 요건 강화, 패스트트랙/필리버스터 제도 신설, 국회에서 몸싸움 시 처벌 등 국회가 몸싸움과 머릿수 밀어붙이기보다는 말과 타협으로 돌아가도록 기대하게했던 그 법안.
직권상정이 사실상 무력화돼 국회 내에서 몸싸움은 사라졌고, 민주당과 국민의당, 정의당은 2016년 테러방지법 본회의 직권상정 때 국회선진화법 내에 있는 필리버스터를 십분 활용해 국회가 말로써 싸우는 모습을 보여줘 국민들에게 칭찬받기도 했다. 하지만 자유한국당은 국회를 다시 몸싸움 국회로 돌려놨다. 법적으로 보장된 절차를 위법이라 우기고, 국회를 사각 링으로 만들었다.
10년이 지나면 강산도 변한다
상투적이지만 하루 빨리 바뀌는 세상을 이렇게 정확하게 표현하는 문장도 없다. 2009년 당시와 지금을 비교했을 때 바뀐 점을 꼽자면 이 페이지를 가득 채워도 끝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국회는 그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여전히 야생세계마냥 몸으로 싸우고 있다.
끊임없이 국민들이 질타하고 국회선진화법이라는 훌륭한 제도를 만들었음에도 그들은 힘으로 상대 의견을 찍어 누르려 한다. 우리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싸움보다는 국민을 위한 정치를 바랄 뿐이다. 10년이 지나면 알 법도 한데 그들만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