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취하지않는남자들 #쟁취하는여성들 #관성의세계 #합당한이상을향한세계 #승리숭배 #니케로부터의자유

올림픽에 관한 세 가지 잡감들


#쟁취하지않는남자들 #쟁취하는여성들

나는 기본적으로 “Tokyo 2020″에 관심이 없고, 내 동생은 그걸 거의 다 챙겨보고 있다. 그래서 이번 하계올림픽 관련해서는 웬만하면 내 동생의 분석과 의견을 100% 수용하고 있는데, 한번은 심심해서 동생과 같이 TV 앞에 앉아 (후술하겠지만, TV 앞에 둘러앉는다는 그것도 참 오늘 내일 하고 있는 바 ‘유지시킬지 말지 결정해야 하는 현재’가 아닌가 싶다) 이 채널 저 채널 돌려보며 이런저런 경기들을 둘러보다가 내가 슬며시 던졌다.

“이번 올림픽은 여자 경기 중계 되게 많이 한다.”

나로서는 그냥 인터넷 여론이 온통 여자 경기 얘기로 들떠 있으므로 그에 대한 분석을 듣고 싶었던 것인데, 뜻밖에도 TV를 계속 응시하며 동생이 굉장히 구체적인 답을 한다.

이번 올림픽이 실제로 여자 경기가 많은 편이래. 요즘 시대가 시대다 보니까 여자 경기도 균형을 좀 맞춘 거라고 하더라고. 그리고 실제로 여자 경기가 재밌기도 하고.”

“재밌다고?”

“어. 내가 아까 유도 경기 보는데, 남자 경기는 심판이 계속 ‘좀 붙어서 (경기)해라’ 하는데, 여자 경기는 심판이 계속 좀 떨어지라고, 그만 붙으라고 막 가르고 있어. 하도 계속 서로 달려드니까.”

그 해설을 듣고 나서 경기를 보니 과연 그러하다. 유도는 여전히 중계 중이었는데, 남자 유도는 무슨 ‘옷깃 잡기’, ‘1점 딴 다음 버티기’ 같은 경기로 변질돼 있어 아무런 재미도 감동도 느낄 수가 없었던 반면, 여자 유도는 최후의 1초까지도 상대방을 어떻게든 한 번이라도 더 업어쳐 보려고 달려드는 좀더 올림픽다운 경기였다. (그냥 전체적으로 모든 종목이 과연 다 그러했다. 심지어 ‘배드민턴’ 같은, 남녀 차이가 별로 없는 종목에서마저.) 남자들의 경기를 보며 느끼는 ‘올림픽 경기라는 게 이렇게 박진감이 부족했던가?’ 하는 의구심은, 여자 선수들의 경기에서 좀 다른 방식으로 풀리고 있었다.

이 상황이 뭔가를 시사하는 것 같긴 한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 그러니까 대충 2~3일쯤 뒤에 ― “분노 한남 자들”이 여자 양궁 국가대표 선수를 페미니스트로 ‘낙인’찍어 중상 모략하려는 시도가 온라인에서 발생했다. 요약하자면 “안산이라는 선수 숏컷인데 페미 맞죠? 세월호 추모 뱃지 달고 출전한 거 보니 페미네요. 페미는 정신병임. 양궁협회랑 올림픽위원회랑 외신에 신고해야됨”의 전개인데, 일단 말이 말 같지가 않거니와 “금메달 3관왕 대 그를 깎아내리려는 이름 없는 남자 네티즌들”이라는 구도는 그야말로 당랑 앞에 거철이어서, 외신은 이를 해외 토픽으로 내보냈거니와 심지어 KBS도 짐짓 비판하는 보도를 낸 마당이다.

이쯤에서 상황이 파악된다. 경쟁으로 한판을 따낼 필요가 없이 그저 기싸움만 하면 되는 남성들, 그리고 몇 번이고 업어치기를 하고 있는 여성들.

올림픽은 고대 아테네에서의 제 1회때로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정치 투쟁의 장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2021년쯤에 왔으면 이젠 더 이상 공공연한 비밀조차 아닌 역사적 사실이다. 다만 그 양상 내지 쟁점이 회차마다 시대마다 조금씩 달라졌을 따름인데, 그 중 2차 대전 종료 이후부터의 올림픽 경기에서 꾸준히 벌어지고 있는 정치 투쟁이 하나 있다면 바로 ‘소수자의 존재 인정 투쟁’일 것이다. 한때는 식민지였던 독립국이 치루었고, 그 다음에는 유색인종들이 치루었던 그 투쟁을, 지금은 여성들이 치르고 있는 셈이다.

최근 200여 년간의 이 투쟁에서 패턴은 알기 쉽게 반복됐다. 독립국들(여기에는 당연히 손기정과 황영조의 대한민국도 포함된다)이 금메달을 거머쥐고 주최국을 할 때쯤 그들의 한은 풀렸고 자연히 그 국가들의 외교적 지위는 확보됐다. ‘북미 백인 남성’들의 더러운 플레이와 카르텔에 아랑곳 않고 싸운 제2, 3세계와 유색인종(여기에는 오노와 김동성과 “뻐킹USA”의 대한민국도 의외로 포함된다) 역시 거기서 이긴 다음에는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권익을 인정받게 된다. 그리고 지금 주변을 휘 둘러보았을 때 아직(까지도) 존재와 지위와 권익이 인정되지 못한 집단이 있는가를 살펴보면 여성들이 바로 그러하다. 지금 열리는 올림픽에서 여성들이 가장 눈에 불을 켜고 이기려고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이제 와서야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그렇게 존재 인정 투쟁에서 패배하고 순위를 강등당한 이들이 얼마나 치졸하고 비열하게 그 투쟁의 형식과 실질을 폄훼함으로써 패배에 불복하려 드는가 하는 점이다. 이미 그들은 충분히 많이 승리했고, 배제적 특권의 단상에 올라 자기들의 노래를 전세계로 송출해 본 경험이 너무나 충분한 탓에, 뭔가를 더 쟁취할 이유가 없다. “선진국”이 “선진국”에 맞서 싸워 반드시 이겨야 할 이유가 없고, 남자가 남자와 겨루어서 꼭 이겨야 할 이유가 별로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웬 여자들이 난투(?)를 벌이며 세간의 관심을 빼앗아(?) 자기들을 따돌린다. 이걸 뭐 어떻게 하겠는가? 은메달리스트건 금메달리스트건 덮어놓고 ‘두 아이의 엄마’니, “숏컷 논란”이니 운운하며 깎아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건 실질적으로는 ‘기싸움’에 불과하다. 더 이상 투쟁을 통해 존재를 인정받을 필요(“더 가까이 붙어서 제대로 싸우라”)가 없는 체제의 기득권층은, 기싸움으로 시간만 벌어도 충분하다고 하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용의가 있다. 어차피 능력이 비슷비슷해서 아무나 1점을 먼저 딴 다음 버티기만 하면 되는 남자 유도 100kg 동메달전이나, 백주 대낮에 공공 장소에서마저도 맨 정신으로 “숏컷이면 페미”, “페미는 정신병” 같은 정신 나간 소리를 지껄이고 그걸 ‘논란’으로 퍼날라 맞장구를 쳐주는 그 성별들의 갖은 무력화 시도나 모두, 행동 동기와 경제적 효용 면에서 완전히 동질한 행위이다. ‘이단적 능력주의’를 따를 뿐인 것이다.

이준석이 한 나라의 당대표에까지 오른 시점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되며 항상 목청 높여 주지시켜야 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면, ‘능력주의’란 공정지상주의 이상의 비열한 함의를 갖는 가부장적인 엘리트주의 이념이며, 특히 오늘날의 능력주의는 ‘이미 능력을 한 번 인정받은 자는 더 이상 방어전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이단설에 가까운 수정주의를 주장한다는 점이다. 이는 특히 (그들을 가지려고 그들 앞에 임신됐던 여아를 낙태시킨 다음 그들을 너무나 오냐오냐 해준 아비를 둔 덕에) 자기들의 능력을 폄훼받아본 적 없는 그 성별들에게서 특히 더욱 지지받고 있는 요설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주요 공격 전략이 폄훼라는 사실은 이 대목에서 시사적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더욱더 강력하게 요구해야 한다. 정말 능력주의를 빌미로 차별을 하고 싶으면, 당신들이야말로 항상 능력을 입증해서 쟁취를 하라고.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한 번이라도 이에 실패하면 능력이 없는 자가 당해도 싼 차등 대우를 받겠다는 당신들이 세운 규칙에 서명을 하라고. 싫으면, 그 허울뿐인 능력주의를 포기하고 투항해 와도 좋다고 말이다. 마침맞게 여성들의 반박 불가한 ‘텐텐텐’과 쟁취 승리의 낭보가 터지고 있는 바로 이 올림픽 시즌에야말로 그들에게 이 사회계약을 들이대야 한다. 각자 링에 올라와서 제대로 붙어 싸워서 평생 방어전을 하라는 요구를, 사실은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싸워야 할 명분도 없고 심지어 능력마저 없고 단지 수적 역사적 우세함의 관성과 기득권만 갖고 있어서 옷깃 잡기만 시도하고 있는 그 성별들에게 말이다.

충분히 무섭게만 들이댄다면, 그들도 이런 사회 계약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걸 깨우칠 터이다. 그때까지 여성들의 설움 받친 ‘약진’과 쟁취는 끝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올림픽 경기장 안팎에서 보이는 다른 이들의 크고 작은 용기 있는 행동과 승리의 순간들을 볼 때, 가망이 아주 없지만은 않은 것 같다.


#관성의세계 #합당한이상을향한세계

동생과 계속해서 TV 중계로 경기를 보고 있는데, 화면 속 그 어떤 요소도 지금이 2021년임을 지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경기장을 꾸민 장식들부터 사소한 순위 표시 그래픽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그래도 어떤 소도구 하나쯤은 “Tokyo 2021″을 실수로라도 새긴 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번이야말로 동생이 그냥 ‘그러게…’ 정도로 별 대꾸 없이 지나가겠지, 하고 한 마디 슬쩍 흘렸다.

“다 2020이라고 해놨네.”

그런데 여기에마저도 돌아오는 답이 있어서 깜짝 놀랐다.

아, 저게 그냥 2020으로 부르기로 정한 거라 하더라고. 다음 경기가 베이징에서 2022년으로 정해져 있어서, 그거 맞춰서 그냥 2020으로 해야 된다더라고.”

와, 심지어 그럴 이유가 있다는 거구나, 이 올림픽은 기어코 2020년의 올림픽이려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속으로 할 때쯤 나도 모르게 최근에 본 한 장면을 떠올린다. 무관중으로 개막식이 진행되는 경기장 바깥에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 올림픽을 중단하라는 시위대가 웅성웅성 모여 있던 장면이다. 꽤나 아이러니한데 정확히 내가 어디서 이걸 봤을까 하고 유튜브를 찾아보다가, 명백히 일본인의 댓글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몇 개 읽었다. “저들은 소수에요, 일본은 올림픽을 원해요”, “그렇게 무책임하게 올림픽을 중단시키면, 몇 년을 피땀 흘린 세계 각국의 운동 선수들은 뭐가 되나요?”

사실 나는 개막식 중계를 보지 않았고, 거실에서 동생이 TV로 보고 있는 것을 복도 너머 소리로 듣기만 했다. 그러면서 SNS 실시간 동향을 살핀 정도인데, 그럼에도 너무나 잘 알겠더라. 일본은 2020년 혹은 2021년을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 일본을 일본으로 만드는 것들 ― 닌자와 마리오를 거쳐 “하츠네 미쿠”에 이르는 다분히 하위문화적이고 상업적이기만 한 스테레오타입들 ― 에 순순히 협조함으로써 세계의 손님들과 시청자들을 만족시켜주지 않았고, 그 대신 일본인 자신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가장 일본스러운 일본으로 남기로 했던 것 같다 ― 아무리 그 실체가 ‘버블 경제와 헤이세이 사이 어딘가의 좋았던 며칠’의 편집증적 취사 선택이었다 할지라도. 그 모든 걸 정당화하는 데 쓰인 개막식 연설이 20분을 넘긴 것은, 싫을지언정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어쩌면, 2021년에 치러진 경기의 이름으로 2020을 고수하며 기어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모든 걸 진행하려는 이 세계 전체가 일본 못지않게 관성을 따르고 있는 위태한 세상인지도 모른다.

얼마 되지 않는다는 ‘올림픽 반대 일본인들’의 생각의 핵심은, ‘정말 열리긴 열리는 거야?’를 되풀이 물으며 불안해하던 전 세계 나머지 나라 일반 인민 대중의 걱정과 맥이 닿는다. 지금은 명백히 온누리가 ‘정상’이 아닌데, 도대체 왜 ‘세계 스포츠 대회를 열어도 좋은 정도’라고 일축하며 이를 부정하려는 것인가 말이다. 부정이라는 표현은 전혀 과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닌막말로 미래의 역사책에, “전 인류가 1년 가까이 손도 못 써보고 수백만의 사상자를 낸 전염병이 창궐한 시기였지만 그래도 올림픽은 잘 열렸더랍니다”라고 적어야 할 판이다. 이게 역사 수정주의가 아니면 뭔가?

바른대로만 말하자면 사실 이 시기의 세계사는 이렇게 적어야 할 터이다. “전세계가 이 몇 세기 동안 자연 자원 착취, 자연 생태계 침략, 방만하고 탐욕적인 교통 통신 무역 확대를 무비판적으로 계속해 온 탓에 사스 등의 세계적 전염병과 기후 위기가 심화되었고 그 정점에 코로나19와 2020년대초의 기후 실패가 있었다. 그럼에도 인류는 이 시기에 여전히 이것들의 원인으로서 이러한 소모적 사회경제적 체제를 지목하여 저지하지 못했고, 심지어는 관성에 따라서 2020년에 올림픽을 개최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물론 그 경기는 현실적인 이유로 1년을 미루어 2021년에 개최되었으나, 여전히 그들은 그 올림픽을 2020년의 것으로 기념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나는 세계사를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기후 위기와 세계적 돌림병의 연관 관계에 대해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전문가는 더더욱 아니지만, 그럼에도 지금 세상이 뭔가 지구적으로 단단히 잘못됐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다. 오죽하면 이런 농담이 나오겠는가? “사실은 전 우주가 인류를 멸종시키려고 별의별 수를 다 쓰고 있는데, 인류가 눈치 없이 계속 살아서 버티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전문가들에 따르면, 기후 위기는 실제로 전염병을 촉진하고 있는 게 맞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이 논점에 관해 가장 긴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 계속 이대로 살려고 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심지어 이대로 살면 안 된다는 것이 이렇게나 명백해진 마당이니?

누구에게도 제대로 표명해본 적은 없지만, 실은 이번 올림픽이 ‘생략’되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지역 축제들이며 숱한 ‘페스티벌’들도 그렇게 했다. 어느 시점부터인가는 오직 세계 각국의 미쳐버린 극우 반동들 일부만이 굳이 방역 수칙을 어기고 구태의연한 구습을 답습하기를 마지않았다. 설마 IOC가 그러려구? 매년 세계 스포츠 랭킹의 현주소를 책임지는 축제가 그렇게까지 답답하게 굴지는 않겠지? 하고 말이다. 실상은 훨씬 더 실망스러웠다. 그들은 답답하거나 무식하거나 구태의연한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었고, 이 시기를 ‘코로나19 정도 말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시기로 규정짓는 결정을 내렸다. 일본은, 그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놀음에 어울려 줄 이유가 충분했고 실제로 너무나 잘 어울려준 협조자이자 공범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이제 와서 개최 반대를 요구하는 것은 늦었으니, 이런 건 이번 올림픽에서 끝내자고 하고 싶다. 이상적이지만 합리적인 세상을 향해서 과감하게 진로를 변경하자고 주장하고 싶다. 그 세상은 구체적으로는, 아무리 몇 세기에 걸쳐 진행된 행사라고 하더라도 세계 인민을 위험에 몰아넣는 일이라면 쉬어갈 수 있다고 결정하는 세상이며, 지금까지 허비해 버린 시간을 벌충하기 위해서라도 세계 경제 체제를 더 지역적으로, 더 민주적으로, 더 생태적으로, 더 검소하게 바꾸자는 급진적이고 총체적인 그린 뉴딜을 채택하여 추진하는 세상이며, 그래서 한 행성 위에 올라타 우주를 돌고 있는 우리 모두가 책임 있게 살아갈 세상을 더 직접적으로 더 적극적으로 더 과단성 있게 결의하는 세상이다. 2021년 여름에 “Tokyo 2020 Olympic Games”를 개최하는 세상이나, 초등학생들은 원격 교육을 받아도 되니까 어른들은 유흥업소에 출입 좀 시켜 주라고 억지를 부리는 세상 같은 게 아니라.

이건 과연 잘 될지 모르겠다. 우리 집만 해도 ‘열돔 현상’의 더위를 못 참겠어서 아까까지 에어컨을 틀어놨다가 방금 소나기가 온 김에 겨우 그걸 끈 마당이다. 우리가 마땅히 살아내야 할 세상을 살아낼 수 있을지, 막상 자신은 별로 없다.


#승리숭배 #니케로부터의자유

올림픽과 전혀 무관할 것 같은 다른 한 순간을 잠시 얘기해볼까 한다.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지인이 있는데, 그가 오늘 페이스북에 자기 근황을 적어 올렸다. 원래는 어디 정당 무슨 위원회에라도 출마를 해서 정치 활동을 할까 했었는데 그걸 어제 관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눠 준 속마음이 자못 가슴아픈 얘기였다. “요즘 들어서 나는 왜 저들처럼 못 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모두가 자기 디자인을 자신 있게 선보이고 있고, 모두가 정치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해서 성취를 거두고 있는데, 나는 이도 저도 아니니까, 남들이 보기에 나는 그냥 그런 인간 내지 괴짜로만 보여서, 그저 멀리 떨어져서 구경이나 할 대상으로 보이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이 친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일은, 아무리 객관적 주관적으로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넘쳐나더라도, 하여간 해놓고 나서 그 다음에 후회를 해도 후회하는 타입으로 알고 지냈다. 그런 인걸이 왜 갑자기 이렇게 남의 눈을 신경 쓰고 남과 비교를 하지? 무슨 계기가 있나? 싶다가, 왜인지 모르겠는데, 혹시 지금이 올림픽 시즌이라서 그럴까, 하는 직관이 척수를 스치고 지나갔다. 언제나 그렇듯이 내 뇌는 이번에도 그 직관을 책임지는 뒷처리를 위해 논리 연산과 기억 뉴런을 열심히 돌렸고, 이윽고 한 자료화면을 적절히 꺼내 오는 데 성공했다. 현존 미국 최고의 현역 체조선수라고 일컬어지는 시몬 바일스의 기권 선언 장면이 그것이다.

요컨대, 바일스 선수와 내 지인이 직면한 위기는 한가지로 같다. 더 이상 승리의 여신 니케를 만족시킬 제물이 없다는 위기.

자유주의의 지상낙원 미국이 전세계에 표준화하여 공급한 바 이 세계에 널리 포교되어 있는 또 하나의 종교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취와 승리를 향한 숭배이다. 성취가 인류의 존재 이유이고 승리가 그 자체로 삶의 목적이며, 그래서 이를테면 안 그래도 중시되고 있는 “공정한 경쟁”은 승리라는 목적을 달성할 가장 곧고 순결한 수단이라는 점에서마저 신성시되기까지 하고 있다. 가히 니케의 종교라고 할 만한 것인데, 이 종교가 초래한 가시적 현상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이 종교 덕분에 심지어 미국의 청소년들마저도 그들 역사에 유례가 없이 경쟁 압박에 몰려 자기를 학대하고 있고, ‘번아웃 증후군’이 지구적 예삿말이 될 만큼 정신 질환 발병은 광범위하게 급증했다. 당연한 일이다. 승리가 경쟁에 의해 결정되는 한 모두가 승리할 수는 없고, 누군가는 반드시 그 신을 합당하게 모시지 못하게 되는데, 어떻게 스트레스를 안 받겠는가.

세계적인 스포츠용품 제조업체 ‘나이키’의 이름이 이 여신의 이름에서 왔다는 것은 이 맥락에서 꽤나 의미심장하다. 확실히, 앞서 살펴본 바 쟁취의 경험이 필요한 소수자들은 분명히 있었고, 나이키는 그들에게 ‘그냥 해(“just do it”)라는 구호를 끊임없이 제공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그것은 그대로 행복을 향한 약속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그 여신의 이름으로 훈련하여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들이 어떻게 비윤리적으로 노동을 착취했는지 등을 잠시 접어두자면) 사실 여기까지는 썩 좋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이마저도 그다지 좋지 않다. 나이키를 입은 한, 현대 스포츠의 패러다임을 따르는 한 승리하지 못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고, 모든 선수가 자기 국가를 대표해서 출전하는 올림픽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때부터 “나이키”는 여신이 아니라 악마와의 계약의 갑에 불과하다.

자기가 믿는 신에게서 불가능한 목표를 요구받는 것은 생각보다 끔찍한 일이다. 상상해 보라. “전 세계가 내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고 그 무게가 내 어깨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데, 승리의 여신의 명의를 빌린 초국적기업이, 자신의 스폰서라는 이유로 자기 침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서, “그냥 해”라고 윽박지른다면, 그때도 그건 과연 자비한 격려의 복음으로 들릴까? 시몬 바일스 선수가 기권한 것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 대단한 용기다. 대다수 언론은 단순히 ‘정신 건강의 중요성’ 정도로 이를 축소시키는데, 나는 이 사안이 지극히 영적인 것이라고 본다. 그는 온 세상이 떠받드는 ― 아니 정확히는 참배를 거부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있을 뿐인 ― 승리라는 믿음 체계에 대한 거부를 선언한 것이다. 그가 나이키의 나라, 그 어느 나라보다도 니케를 숭배하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대표로서 그랬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올림픽은 그 특성상 승자가 더 중요하고 더 많이 승리한 자가 더 많이 중요한 행사이다. 승리의 여신께 그 숭배자들이 4년 단위로 내어바치고 있는 제례라 해도 좋을 지경인데, 이 숭배 행위에 대한 양심적 거부 선언이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등장했으므로, 이를 계기로 삼아 좀더 많은 영적 해방이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니케와, 승리 숭배 이념과 무관한 올림픽은 가능할까? 청소년들이, 어른들이 경쟁과 합격과 등급 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어떤 제도적, 인식적 혁신이 어느 정도까지 일어나야 할까? 아무런 변변한 성취나 성공 없이 평생을 살더라도 행복할 수 있으려면 어떡하면 될까? 모두가 “뭔가 이뤄내자”, “세상을 바꾸자” 외치면서 서로가 서로를 목적으로만 바라보는 이 숨막히는 세계에서, 나는 과연 그 기획에 동원되지 않겠다고 떳떳하게 거부할 수 있을까? 만약 할 수 없다면, 바일스 선수는 어떻게 그걸 할 수 있었을까?

이 대목은 순전히 그 지인을 위해서 쓴 글이지만 사실은 내게도 어느 정도 필요한 이야기 같다. 결국 나는, 그 지인은, 우리 대다수는 필부필부로 살아갈 것이고 니케는 지극히 특수한 직종의 몇몇만이 제대로 섬길 수 있는 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그 종교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아직도 언론지면에 “노메달”, “노골드” 같은 니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저주의 언령이 부끄러움도 없이 쏟아지는 걸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