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손으로 사회를 나서는 어느 겁쟁이의 이야기.

탈수급, 잘 할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있었으나 언제 올지 알 수 없었던 그 순간, 졸업. 7년 반이 되어서야 드디어 그 순간을 맞게 되었다. 졸업 유예를 3학기나 한지라 이미 졸업한 거나 다름없이 살았는데도,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온다고 하니 여러 느낌과 생각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그 중에서 내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감정은 부담감과 어려움이다. 졸업이라는 낱말이 불타는 이 땅에 사는 장삼이사 대학생들에게 참 어렵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더욱 어렵게 다가온다. 단순히 이 나이 먹도록 아직까지 취업을 못 해서만은 아니다.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는지가 막막하기 때문이다.

나는 현재 기초생활수급자,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생계급여 조건부 수급자”다. 정부에서 인정한 대한민국 하위 3% 맨손러다. (※X수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수저로 자기를 설명하라고 할 때 나는 수저가 없다고 말한다. X이라는 어감이 좋지 않을뿐더러 X으로 수저를 만들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생계급여’를 받는 조건은 노동으로 먹고 살 수 없는 저소득층인 경우들이다. 보통 미성년자, 노인, 장애인이 이에 해당된다. 쉽게 말해 평범한 일반 성인은 아무리 못 살아도 생계급여를 받을 수가 없다 ― 지병을 앓고 있어 노동 능력이 없다는 걸 증명하거나 자활근로/교육 등을 받는 조건이 아닌 이상은 말이다.

나는 성인이 된 이후 대학과 군 복무 기간에는 이런 ‘조건’을 ‘유예’받았다. 하지만 며칠 뒤면 대학마저 졸업하니 나는 이제 생계비를 탈 명분이 없다. “탈수급”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것이다.


수급자 생활은 진작에 벗어나고 싶었다. 수급자로 산다는 것은 참 답답하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 나는 금강산에 갔다 왔다. 그 당시 정부는 학교에서 한두 명을 뽑아 학생을 금강산에 보내줬는데, 담임 선생님이 나를 학교 대표로 추천해 준 덕분에 갔다 올 수 있었다. 돈이 없어서 면세점에서 제주 감귤 초콜릿 밖에 사오지 못한 게 아쉽기는 했지만, 외국으로 나가본 적 없는 나에게는 특별한 여행이었다.

중학교 때 갔다 온 금강산. 친척 분이 디지털 카메라를 나에게 안 줬더라면 이 순간을 남길 수 없었다.

며칠 뒤 읍사무소에서 전화가 왔다. 우리 집을 담당하는 사회복지사는 나에게 ‘외국 여행을 갔다 왔느냐’는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몹시 당황스러웠다. 사회복지사는 그 질문을 두세 번 되물었고, 나는 간 적이 없다고 말하다가 혹시나 싶어 금강산으로 갔다 온 사실을 아주 자세하게 설명했다. 비행기 탈 돈은커녕 밥 먹을 돈도 없는데 외국 여행을 어떻게 가냐는 억하심정이나 사회복지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전화 통화를 길게 이어가게 했다. 그러더니 사회복지사는 알았다고 하고 끊었다.

담당 공무원이 기초생활수급 자격 유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수급자의 출입국 기록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하긴 출입국 기록만큼 ‘이 사람이 돈이 진짜 없는지’를 가려낼 수 있는 건 없을 테다. 그래서 정부가 그걸 가능하게 했고, 공무원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사실을 알고 나니 기분이 참 더러웠다. ‘돈 없는 사람은 마음대로 여행도 못 가나? 그리고 다 조회가 된다면 왜 공짜로 갔다는 사실은 못 알아보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담당 공무원은 이렇게 출입국 기록 이외에도 개인 통장 잔액이나 각종 재산, 근로 소득 등을 앉은자리에서 한 번에 볼 수 있다. 애초에 수급자 신청 받을 때 이런 것들이 조회가 되어야만 신청을 받아준다. 이는 단지 부정 수급자를 가려내기 위해서지만, 한 공무원이 내 일상을 감시한다는 생각이 이따금씩 들 수 밖에 없다. 어릴 때는 이런 것들이 무서워 컴퓨터를 쓸 때조차 눈치가 보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정부 지원으로 컴퓨터와 인터넷이 생겼는데, 정부가 그 컴퓨터에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일일이 감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깔아놨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렇게 살다 보니 성인이 다 되었는데도 집에서 독립을 하지 못했다. 수급자가 근로소득이 잡힐 경우, 일해서 번 금액만큼의 생계비가 깎이거나 수급자 자격이 박탈되기도 한다. 고용주에게 미리 처지를 밝히고 근로 소득 신고를 안 하거나, 근로계약서를 안 쓰고 알바를 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나는 법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없고, 어차피 근로 사실이 밝혀지면 추후 그 소득을 추징당한다. 이쯤 되면 더러워서 취직 안 하고 만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이렇게 되면서 자연스레 대학 다니는 동안 인턴을 해 볼 기회도 사라졌고, 스펙도 변변치 못하게 되었다. 그 누구보다도 사회에 나가서 경험을 쌓고 일을 해보고 싶었지만, 수급 자격 유지를 위해 내 스스로 발에 족쇄를 채워야 했다.

1~2학년 때는 전철로 통학하다가, 3~4학년 때는 무궁화호 정기권을 끊어서 타고 다녔다.

어떻게 해서 대학은 ‘인서울’을 하긴 했으나, 대학 생활은 4년 내내 천안에서 자고 서울에서 수업 듣는 생활을 반복했다. 서울이라는 답답한 도시에서 살기 싫었던 것도 있고, 내가 기차 타고 다니는 걸 즐겨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학년이 될수록, 그런 이유들보다는 돈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이 통학 생활이 유지되었다. 새벽 5시 반쯤에 깨야 간신히 1교시 수업 지각을 면할 수 있었고, 통학 시간을 어떻게든 아껴보려고 수업 일정을 보통은 주 3일, 어떤 학기는 주 2일로 짰다. 이러다 보면 “인싸” 생활과는 한참 멀어지게 된다. 대학 가면 하려고 맘먹었던 학생부나 학보, 동아리 같은 것들은 현실이 되지 못했고, 과 동기들은 9시만 되면 자리를 떠야 하는 나를 점점 잊어 갔다.

무엇보다도 좌절감을 느꼈던 순간은 학기 초였다. 나는 “생계급여 조건 부과 유예”를 받기 위해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학교본부를 찾아가 학교장 직인이 찍힌 수강증명 내역서를 끊어달라고 요청해야 했다. 교직원들은 그런 서류가 없어서 당황하고, 내가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서류가 필요하다고 하면 그제서야 일일이 손으로 만들어서 발급해 주곤 했다. 그 이유를 설명하는 동안 내 자존감은 바닥을 뚫고 내려간다. 미안하기도 하고, 내가 무능하다는 걸 그 사람한테 읍소하는 느낌이 든다.

나와 동생이 대학에 다니는 동안 읍사무소(지금은 행정복지센터)는 대학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군 복무 전에는 재학증명서만 제출하면 됐지만, 복학한 뒤에는 수강증명내역이라는 것도 제출을 요구해 내가 많이 곤혹스러웠다.

이렇게 수급자 생활을 이어나가는 게 불만 투성이였는데도 나는 지금까지 수급자 생활을 질기게 이어 왔다. 이런 모순이 가능했던 건 우리 집 형편이 ‘탈수급’하기에는 턱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네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아버지는 어린 자식을 대신 돌볼 사람이 없어 일 나갈 엄두도 못 냈다. IMF 외환 위기마저 닥치면서 살기는 더욱 팍팍해졌고, 매정한 서울은 1998년에 우리 가족을 천안으로 내쫓았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결국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2000년에 아버지는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하게 되었다.

내가 성인이 된 뒤로 내가 가장으로서 우리집 생계를 책임져야 했지만 그러지도 못했다. 일단 공부와 노동을 둘 다 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당장 정규직으로 취업을 할 수 있었으면 다행이겠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러기는 불가능하고, 알바를 통해 돈을 번들 최저시급 정도로는 세 식구가 먹고 살기 어렵다. 때문에 나는 번듯한 직장을 구하기 전까지 탈수급을 미뤄야 했다.

저소득층을 위한 다양한 정책들이 수급자일 때만 누릴 수 있다는 것도 나를 수급자 생활에 눌러앉혔다. 수급자는 생계비만 지원받는 것이 아니다. 가장 큰 것은 의료비 지원이고, 그밖에도 전월세 및 집 수리비 지원, 국가장학금, 각종 세금/공과금 감면, 통신 요금 할인, 문화관광 상품 구입 지원, 지자체나 민간 단체에서 이따금씩 주는 선물 등등 수급자를 위한 다양한 복지 정책이 있다. 얼핏 들으면 혜택이 썩 많으니 그냥 계속 수급자로 사는 게 더 좋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부분은 정확히 말해야 한다. 수급자로 사는 게 더 좋은 게 아니고, 수급자 생활을 벗어나는 게 더 나쁜 거라고 말이다.

의료급여가 대표적이다. 나는 의료급여 2종 수급권자인데, 이 경우 동네 병원에서는 1000원, 약국에서는 500원만 내면 된다. 이런저런 지병 때문에 병원을 여러 군데 다니시는 아버지한테는 이것만큼 절실한 것도 없는데, 이 혜택은 이른바 경제적 자립 가능성이 인정되어 ‘탈수급’하는 순간 전부 없던 일이 된다. 탈수급을 한다고 그날부터 당장 살림살이가 확 나아지는 것도 아닌데, 지금껏 삶을 버티게 해 준 “혜택”들은 다 사라지거나 대폭 줄어든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몸 아픈 수급자들이 적극적으로 ‘탈수급’을 하려고 할까? 탈수급할 때가 수급자로 살 때보다 오히려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말은 이래서 나온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되면 여기에 있는 혜택 말고도 더 많은 걸 모두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수급자에서 벗어나거나 수급자가 되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누릴 수 없다.

이런저런 사정을 딛고 꾸역꾸역 학교를 다닌 끝에 마침내 성인이 되고, 대학교 졸업이라는 스펙을 득템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과 함께 나에게 돌아온 것은 학교 다니는 동안 한국장학재단에서 받은 천만 원짜리 생활비 대출밖에 없다. 아버지는 날로 늙어 이제는 지하철을 공짜로 탈 연세가 되셨다. 원래부터 허리 디스크가 있어서 몸이 안 좋은 아버지는 꾸역꾸역 자식 둘을 키우느라 성한 데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몸이 많이 망가졌다. 쌓여만 가는 약봉지만큼 내 걱정도 쌓여간다. 생계비는 딱 굶어주지 않을 만큼만 주다 보니 집에 모아둔 돈도 얼마 없다.

하지만 정부는 나에게 자립하라고 등을 떠미는 것도 모자라 “부양의무자”라는 허울 좋은 이름을 나와 여동생에게 붙여주며 너희들이 전적으로 아버지를 모셔야 할 책임을 지라고 닦달한다. 참 답답하다. 나 홀로 살기도 버거울 것 같은데, 아버지의 삶마저 책임지라고 강제하니…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는 아직 살 날이 많고, 앞이 어둡다고 그 자리에 머물거나 길 찾기를 포기할 수는 없지는 않은가. 결국에는 ‘평범한 내 삶과 가정’이라는, 언뜻 소박해 보이지만 사실은 무척이나 힘든, 이 모순되는 목표에 다가서려면 내가 그 길을 찾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부디 이 땅 위에 서 있는 나 같은 청년 수급자 혹은 “흙수저”들이 주눅들지 말고 자신의 앞길을 잘 찾아갔으면 좋겠다. 내가 내 여권 들고 어디를 다녀오든 누구도 내게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 전화하지 않는, 그런 인생이 될 때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