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것도 슬픈데
오만과 위선을 보이고, 검찰과 쉼 없이 치고받느라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며, 당 소속 시장이 성폭력을 저지르는 바람에 1년짜리 선거를 하게 됐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기어이 자신들이 정한 규칙을 바꿔가며 후보를 공천했다. 질 수밖에 없는 싸움에 전 재산을 건 끝에 국민의힘에 살림 밑천을 홀라당 다 뺏겼다는 소식은 전국에 떠들썩하게 퍼졌는데…
사실 민주당만 선거에서 지지 않았다. 서울시장 선거에 12명, 부산시장 선거에 6명이 출마했으니, 이번 선거에서 낙선한 사람은 각각 11명과 5명. 그런데도 사람들은 민주당만 졌다고만 말한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정당들은 진 것도 서러운데, 자신들이 졌다는 사실조차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없으니 서글프다.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서 민주-국민을 제외한 득표율의 총합은 3.28%. 2018년 지방선거에서 민주-자한 양당과 당시 바른미래당 당적으로 출마한 안철수를 제외한 군소 후보들이 받은 득표율만 해도 4.28%였다. 두 차례 선거에 모두 출마한 군소 정당이나 후보는 득표수나 득표율이 떨어졌다.
2016년 총선을 뒤흔든 제3지대 열풍과 촛불시위는 군소정당에 한 줄기 빛이었다. 제법 많은 국민이 거대 양당을 불신한다는 사실과 다양한 사회적 의제가 현실 정치에서 논의되기를 바라는 욕구를 엿볼 수 있었다. 민주당계 정당과 보수정당계 정당이 독점하던 정치 지형이 무너뜨릴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10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 이명박정권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냈고, 정권 교체 후 눈에 띄는 개혁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국민의힘을 국민들은 민주당을 대체할 세력으로 지목했지만, 군소정당은 외면했다. 군소정당은 아직도 칠흑 같은 어둠에서 헤매고 있다.
군소정당의 주적은 선거제도
우리나라 선거제도는 거대 양당에 매우 유리하게 짜여서 군소 정당 생존에 치명적이다.
우리는 한 선거구에서 당선자를 한 명만 뽑는 데 익숙하다. 이때 당선자는 2위 득표자보다 딱 한 표만 많아도 당선된다. 이 상황을 어려운 용어로 줄이면 ‘단순다수대표 소선거구제’가 되는 것이다.
이 제도를 비유하자면, 맹독성 제초제가 딱이다. 해충만 죽이면 되는데, 농작물에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는 생명체도 갈려 나가는 것도 모자라 생태계를 황폐화시켜버린다. 소선거구제에서 당선자 한 사람을 제외한 다른 후보 표는 쓸모없는 표가 되어버린다. 내 표가 사표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고,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후보가 당선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이럴 때 최악의 후보를 막을 수 있으면서 세력이 강한, 차선이나 차악의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것은 합리적인 투표 행태다. 이런 표가 몰려 세력이 강한 두 정당이 생긴다. 소선거구제를 채택한 영국, 미국, 캐나다, 인도는 대표적인 양당제 국가다.
비례대표제는 소선거구제와 반대되는 성질을 띤다. 비례대표제는 내가 좋아하는 정당에 투표해도 사표 될 위험이 거의 없을뿐더러 표를 얻은 만큼 의석이 비례 배분된다. 사람들이 신념에 따라 투표하는 성향이 강해진다. 소선거구제와 성질이 반대이며, 군소정당에 유리하다. 한국도 2000년에 들어서 시행했다.
문제는 비례대표를 같이 뽑는 데도 양당 우위가 굳건하다는 점이다. 국회 전체 의석에서 비례대표 선출 의석은 15% 남짓이라, 지역구 의원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리고 거대 양당은 지역구와 별개로 비례대표에서도 꾸역꾸역 의석을 배분받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비례대표 의석을 늘릴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 정원과 비례대표 의석을 같이 늘리는 것이 가장 좋고, 그것이 어려우면 지역구 의석을 줄인 만큼 비례대표 의석을 늘려야 한다.
하지만 양당은 어느 하나를 애써서 선택할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 현재 상황은 아주 만족스럽다. 국민이 싫어하는 정원 늘리기를 주장했다가 표를 잃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지역구 의석이 줄면 그들이 받아야 할 몫보다 더 많이 챙긴 밥그릇을 돌려줘야 한다.
문제를 고쳐보려고 1년 전에 선거제를 바꿨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라는 이상은 좋았으나 현실은 K-선거제였다. 비례대표 의석수는 그대로고, 추가 의석도 발생하지 않으며, 정당 득표율에서 절반만 의석 배분에 활용된다. 순수 연동형 비례제보다 효과가 훨씬 떨어지는 데도 민주당은 군소 정당을 압박해 통과시켰다. 그런데 자유한국당이 한다고 따라서 위성정당을 만들어버렸네? 그 결과 21대 총선에서 양당은 2000년 이후 가장 많은 의석을 점유했고, 군소정당으로는 유일하게 정의당이 원내에 진입했다.
국민은 군소정당에 실망했다
그래서 군소정당은 잘못한 게 단 하나도 없을까? 제도 탓만 하는 건 핑계다. 군소정당들이 독자적으로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도덕성과 정책적으로 차별화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유권자들은 군소정당에 투표할 이유가 없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이번 선거에서 군소정당이 했던 일들을 되짚어보려고 한다. 이번 선거는 군소정당의 난맥상을 잘 보여주는 선거였다. 양당이 밀어붙이고 군소정당이 뒤따른 단일화는 노잼 덩어리, 정치 공학 그 자체다. 성평등과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지역 문제 해결할 일꾼을 뽑아야 할 선거는 어느새 정권 유지와 심판으로 프레임이 틀어져 버렸고, 군소 정당 스스로 양당과 차별성을 선보일 기회를 걷어찼으며, 정치혐오 정서를 또다시 불러일으켰다.
보수 – 중도 후보 단일화는 이뤄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금태섭은 흐릿한 정치 이념과 부족한 지도력을 이유로 헤어지고, 인권과 소수자 문제에서 현격한 거리 차이를 나타낸 사람과 기어코 단일화를 했다. 안철수는 오세훈과 경선을 치르면서 조사 방식을 놓고 지루한 싸움만 벌이다 패했다. 문재인 정권 심판이라는 거국적인 목표가 세상에서 가장 어색하고 지루한 단일화를 만들어냈다.
이쯤에서 안철수 개인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단일화에서 나타난 오락가락 행보는 안철수가 왜 정치인으로서 실패했는지를 보여준다. 한때 그를 민주당이나 보수 정당계와는 차별화되는 제3지대 정치인으로 기대한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첫 번째 국민의당이 탄생했을 때는 40석 가까운 의석을 얻었고, 촛불 정국에서는 중재자로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에게 안철수는 간잽이에 불과하다. 그의 힘으로 창당을 해봤자 뿔뿔이 흩어지거나 거대 양당에 빨려들었다. 선거 운동 기간, 멀쩡히 살아 있는 두 번째 국민의당이 국민의힘에 흡수될 것이라는 소리를 당당하게 하고 다녔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정치 철학과 이념을 굳건히 세우고, 제3지대 세력을 굳히는 것이다. 야권 승리라는 명분 하나로 민주당에 붙었다 보수 정당에 붙었다 하는 게 아니라.
민주당 주도 단일화는 보수 진영보다는 상대적으로 조용했다는 것 빼고는 나은 게 없었다. 시대전환과 열린민주당은 민주당과 구별될 만한 정책과 공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이 선거가 누구 때문에 하게 되었는지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단일화에서 패할 것이면 차라리 출마하지 않거나 중도에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독자 출마하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진보당을 제외한 전통적인 진보 정당들은 후보를 내지 못했다. 정의당은 당대표 성추행 사건에 책임을 지고자 무공천 했는데,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진다는 평가를 받을 수는 있어도, 여성주의 지향 정당의 얼굴로서 저지른 추태는 씻을 수 없는 오점이다. 이 사건으로 주요 정치적 자산 중 하나인 도덕성을 상당 부분 까먹었고, ‘민주당과 다른 게 없다.’라는 비판도 들어야 했다. 녹색당과 노동당은 평소 지역 기반과 조직 정비 등 세력 확장에 소홀했던 데다가, 주요 정치인과 당원들이 잇따라 탈당하면서 당세가 상당히 기울었다.
기본소득당, 미래당, 여성의당 등 새로운 정당이 기존 진보 정당이 비운 자리를 탐냈지만, 그들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이 당들은 역사가 짧고, 인지도가 낮으며, 인적 구성이 20대에 쏠린 공통점이 있다. 게다가 기본소득당과 여성의당은 당명에서 드러나다시피 그들이 추구하는 이념과 정책이 한 분야로 특정되어 있는 데다가, 탄생 전후로 숱한 논란을 만들었는데 의미 있는 정치 세력으로 발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심판을 할 것인가, 당할 것인가
군소정당은 또 졌다. 다른 때와 달리 제대로 싸우지 않아서 정신승리도 못 한다. 이름 알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면 할 말이 없지만, 까고 말해서 정치인이 된 이유가 가슴팍에 금배지도 달아보고 푸른 기와집을 바꿔보고 싶어서 나선 것 아닌가?
제3지대 세력 등장과 촛불 정국은 양당제 정치나 군소 정당에 분명 전환점이 될 만한 일이었으나 군소정당들은 기회를 놓쳤다. 선거제 개혁은 양당의 횡포로 있으나 마나 한 일이 되어버리고, 정당과 소속 정치인의 헛발질로 국민에게 신뢰를 잃어버렸다.
군소정당들은 이번 패배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바깥 환경이든 속사정이든 눈에 띄게 바꿔야 한다. 바뀌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패배할 권리조차 빼앗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