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를 하염없이 뿌려대는 사이, 30이라는 숫자가 턱밑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나를 체험형 인턴으로 받아줬다.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계약이 끝난 뒤에는 또다시 백수가 되어서 아쉬울 수밖에 없지만, 일하는 동안에는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오래간만에 받아서 고맙게 생각한다. 특히 내가 속했던 팀의 선임 직원들은 하나같이 친절하셨고, 점심을 자주 사주셨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저 기분이 좋았지만, 들어오고 나서는 심상치 않은 뭔가가 나를 이곳에 이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놈의 건강보험료 때문에 원체 민원이 많은 기관인데다가, 코로나 시국에서 본의 아니게 막중한 업무를 맡았다. 하필 정부는 건강보험료를 국민지원금 지급 기준으로 삼은 것도 모자라 이것저것을 뜯어고쳤고, 졸지에 직원들은 성난 민원인을 맞이해야 했다.
민원은 공공기관에서 일한다면 어쩔 수 없으니까 넘어간다지만, 고객센터 직원 정규직화 문제는 도무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고객센터 노동자들에게는 이것만큼 절실한 것도 없었지만, 정규직 직원들은 대체로 싸늘하거나 분노했다. 나는 이런 어지러운 상황에서 3개월을 보냈다
첫 출근 날부터
첫 출근이랍시고 고리타분한 정장을 입은 채 직원과 인턴 동기라 하는 사람들을 처음 마주쳤으니 어색하고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 분위기 속에서 조직 역사와 사업을 한참 설명하던 정규직 직원이 갑자기 이런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은 콜센터 직원들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마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했겠지.
‘당연히 해야죠.’
하지만 나는 지금 어쨌든 ‘직원’이었다. 나는 뇌에게 비상경보를 발령했고, 뇌는 부지런하게 말을 만들어냈는데, 안타깝게도 결과물은 참으로 실망스러웠다.
‘하하. 참 안타까운 일이죠. 합리적인 방향으로 좋게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회의실에서 뇌 굴러가는 소리, 눈동자 돌아가는 소리만 몇 초 들리다가, 내 반대편인 동시에 직원과 가장 가까운 인턴이 목소리를 내었다.
“공정성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직원이 말을 이었다.
“그래요. 시험 봐서 들어온 사람도 있는데, 그런 절차 없이 들어온 사람이 정규직이 된다는 게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어쨌든 지금 공단에서는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요.”
상황은 마무리되었지만 씁쓸한 마음은 남았다.
동기와 어색한 점심
인턴 동기는 나를 포함해 세 명이었다. 동기와는 점심을 자주 같이 먹었고, 모이면 직장에서 있었던 일들이 주된 이야깃거리인데, 고객센터 노동자들이 소속기관 직원으로 고용된다는 소식이 들린 날은 당연히 그것이 주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A: 콜센터 직원들 정규직 된다는 소식 들었어요?
B: 정말?
A: 사무실에서 왜 고객센터 상담사들 정규직으로 채용한다는 소식에 반발하고 난리도 아니에요.
B: 시험도 안 보고 어떻게 정규직으로 받아들인다는 거지? 이해가 안 가요.
A: 그러게 말이에요.
B: 누구는 정직원 되려고 시험 보고 면접 보고 개고생을 하는데.
A: 하하핫쌤은 정규직화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하핫: 난 찬성.
분명 그 친구는 내 생각을 물었으니, 내가 생각한 것을 답했다. 그리고 말 나온 김에 일장 연설을 토해냈다.
콜센터 노동자들은 10년을 일해도 월급 250만원 수준의 대우를 받는데 그게 마땅한 거냐, 하루에 100건 가까이 되는 전화를 받는 게 쉬운 일이냐, 그들도 일에 대비해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 등등…
찬성한다는 이야기에 두 친구는 당연히 당황스러워했고, 주장이 끝난 뒤에는 잠깐 침묵이 흘렀다. 나는 황급히 우리가 먹고 있었던 짬뽕에 관한 이야기로 주제를 돌렸다.
그 뒤로도 콜센터에 관한 이야기가 몇 번 나왔다. 전화 민원 때문에 겪었던 여러 어려움을 이야기하다 보면 고객센터 이야기가 빠질 수 없었는데, 이상하게 서로는 말문이 막혔다. 나는 고객센터를 어느 정도 옹호하는 취지로 말을 했고, 두 친구는 모르겠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끝냈다. 아마 내 눈치를 봐서 그랬을까? 아니면 이 일이 그렇게 간단치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걸까? 그도 아니면 이 문제에 큰 관심 없어서?
심통방통(心통妨通)
마음이 사방팔방으로 통한다. 분명 사내 업무시스템 익명 게시판을 ‘심통방통(心通方通)’이라 이름 붙였을 때는 그런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사안을 놓고서는 심통이나 사람들 글을 보느라 소통은커녕 화만 났다.
차분한 어조로 반대를 주장하는 것은 괜찮았다. 사람 생각이 다 같을 수 없고, 무슨 근거로 반대를 하는지 엿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만 즐거운 아무 말 대잔치는 정말이지 화가 나거나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저 폭도들(사옥에서 점거 농성했던 고객센터 노동자들) 좀 건물 밖으로 내쫓아주세요!”
“못 배운 티를 너무 낸다.”
“요즘은 떼법이 법보다 위래요.”
“공산주의 국가도 아니고, 능력 없는 사람들 왜 도와줘야 합니까?”
“이 일에 외부세력/상급 단체는 왜 끼어드는 겁니까?”
(정규직 노조와 고객센터 노조는 모두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를 ‘상급 단체’로 두고 있다.)
공정, 정상화, 청렴, 바로 세우기, 멸공(?!) 등이 들어간 닉네임을 달고 그렇게 고객센터 노동자를 향해 험한 말을 쏟아냈다. 아마 닉네임에 쓴 단어들이 추천 수 치트키인 모양이었는지, 그런 글들은 공감 200개는 기본으로 깔고 들어갔다.
한번은 답답한 마음을 차마 억누르지 못하고 글로 풀었다. 다른 기관은 이미 마무리된 건데, 여기는 왜 아직 질질 끄는지 모르겠다는 투로. 그 글은 몇 시간 만에 300개가 넘는 비추 폭탄을 받았다. 내 소속이 졸지에 고객센터 상담사가 된 건 덤.
무책임함과 어지러움 사이
3개월이라는 시간은 참으로 짧았다. 직원과 인턴 동기들에게 정 좀 붙이고, 업무가 손에 익으려는 찰나에 나가야 했다.
하지만 고객센터 직원들을 향한 싸늘한 눈길은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시험이라는 도구와 능력주의라는 가치가 차별을 정당화했다. 공정을 이야기할 때 뒤에 따라오는 말은 채용뿐이었다. 사회, 노동, 대가 등 같은 것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분명 고객센터 직원들은 공단의 이름으로 노동을 하고 있었음에도, 돌아온 것은 굴러온 돌, 용병, 트러블 메이커, 폭도 취급이 전부였다.
문제가 마무리되는 모습을 보고 싶었건만 결국에는 보지 못하고 떠나야 했다. 근무 기간 중간에 고객센터 노동자들을 공단 산하 소속기관 직원으로 고용하겠다는 발표가 났고, 130여 일간 이어졌던 본사 점거 농성도 끝났다지만, 노사 간 완전한 합의는 지금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공공기관 비정규직, 민간위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정책은 문재인 정부가 많은 사람의 축하 속에 발을 내디뎠을 때 ‘정의로운 대한민국’이라는 구호를 내걸며 시작됐지만, 문재인 정권에 주어진 5년이라는 시간이 끝나감에도 이 일은 마무리 되지 않았다. 이사장이라는 사람은 고객센터 파업 중지를 촉구하며 단식 농성을 벌여 비웃음만 샀다. 정녕 비정규직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의지는 있는 걸까?
직원들 앞에서는 눈치 보여서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자유로운 몸이니까 정부와 공단 이사장을 향해 한번 묻고 싶다.
“고객센터 노동자 정규직화 언제까지 미적대실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