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싸움
내가 사는 이곳 충청도에서 이번 선거를 지켜보다가 문득 이 단어가 떠올랐다.
서울 태생에다가 일 때문에 충청도에서 2년 산 적이 전부인 칼잡이는 ‘충청의 아들’이 돌아왔다고 충청도 곳곳에 소란스레 외치고 다녔다. 자기를 ‘사위’라고 불러달라던 외지에서 온 사내는 초밥 먹다 체한 아내를 내버려 두고 아내의 고향을 홀로 쏘다녔다. 두 후보는 어찌 되었던 간에 충청도에 인연이 있음을 호소했다.
아들과 사위는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서로를 욕하기 바빴다. 사람들은 그들의 싸움에 비호감, 양극화, 네거티브 등 온갖 부정적인 수식어를 붙였고, 이 지저분한 싸움에서 승자는 아들이었다. 전국은 물론 충청도에서도 그러했다.
아들이 이겼다는 소식이 이 지역에 전해진 뒤, 몇몇 지역 정치인과 언론은 호들갑을 떨었다. 충청대망론이 이제야 빛을 발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중앙 정치에서 소외돼 경제 성장의 이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충청인의 한, 그것을 충청 출신 대통령이 풀어줄 것이라는 꿈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래. 그 잘난 아드님이 이번 대선에서 이기기는 했지. 그런데 승리가 진짜 그 놈의 충청대망론 때문에 나온 걸까?
14만 7,612표
충청권(대전광역시, 세종특별자치시, 충청남도, 충청북도)에서 윤석열과 이재명의 표 차는 전국 표 차보다 적고, 득표율 차이는 4.23%p에 불과하다. 충북 제천시 주민 수(2022년 2월 주민등록인구 기준 13만 1,498명)를 살짝 웃도는 정도로 표를 더 얻은 셈. 그리고 저 정도 득표율 차이는 양 후보가 치열하게 맞붙었던 수도권과 비슷한 수준이다. 윤석열 후보는 서울에서 4.83%p 차이로 승리했고, 이재명 후보는 인천과 경기에서 1.86%p, 5.02%p 차로 이겼다. 정녕 충청 사람들이 충청의 아들을 원했더라면, 접전 우세가 아니라 호남이나 대구-경북처럼 몰표를 줬을 것이다.
충청도 깊숙이 들어가면 충청대망론은 더욱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이 카토그램은 시군구 단위(기초자치단체 + 일반 구) 36곳 개표 결과를 보여준다. 그 지역에서 많은 득표를 얻은 당의 상징색을 칠해두었는데, 진하게 칠해진 곳은 그 후보가 50% 이상 득표한 지역이다. 행정구역명 밑에 숫자는 1위 득표자 득표율과 2위 득표자 득표율을 뺀 값이다.
지역을 크게 세 덩어리로 묶어 살펴보자. 이재명 후보가 표를 더 많은 얻은 지역은 수도권 인구가 많이 유입되었고, 젊은 사람이 많이 사는 지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정부는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 이전을 위해 세종에 행정중심복합도시, 진천에 충북혁신도시를 건설했다. 청주, 천안, 아산은 수도권 공장 총량제로 인해 삼성, 현대차, 하이닉스, LG 등 대기업/첨단 산업 공장이 많이 들어섰다.
대전과 청주, 천안 같은 대도시에서 윤석열 후보가 앞서기는 했으나 득표율 차이는 한 자릿수에 불과하다. 특히 천안에서 윤석열 후보는 이재명 후보보다 476표를 더 받았을 뿐이다. 한편, 파평 윤씨 집성촌이자 윤석열 후보 증조할아버지의 고향이면서 지방검찰청 산하 지청장으로 일했던 논산 또한 유효표를 절반 이상 얻지 못하는 근소한 차이로 이겼다.
윤석열 후보가 50% 이상 득표한 지역 대부분은 고령층이 많은 전형적인 농어촌 지역이다. 대도시에서 멀어질수록 윤석열은 이재명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표를 얻었다. 이 중 홍성, 청양, 부여는 2017년 대선에서 홍준표가 다른 후보 중에서 가장 표를 많이 얻은 지역이다. 충청도는 특정 정당으로 표심이 쏠리지 않는 스윙 스테이트(경합지) 특성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약하게 띄는 지역이다.
그래서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도시-젊은 사람은 민주당을 더 많이 지지하고, 농어촌-나이 든 사람은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세대와 지역에 따른 이념 성향 투표가 그대로 드러났다. 이것은 역대 선거에서 전국적으로 나타나는 투표 경향이고, 충청도 또한 그렇다. 다만, 윤석열 후보는 농어촌 지역에서 몰표를 받은 반면, 이재명 후보는 그나마 유리했던 도시 지역에서 몰표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충청도에서 윤석열 후보가 더 많이 표를 얻었다.
그러니까 충청도 사람들이 윤석열이 충청의 아들이라 이뻐서 표를 더 준 게 아니란 말이다.
“충청도에서 대통령이 한번 나올 때도 되지 않았어?”
충청대망론에는 이런 심리가 깔려있다. 경상도에서, 전라도에서 한 차례 이상씩 대통령을 해드셨는데 왜 충청도는 대통령을 못 하냐는 식이다.
이번 대선에 충청의 아들로 언급된 사람은 윤석열 뿐만이 아니다. 현재 충남도지사 양승조는 민주당 1차 경선에서 탈락했고, 충북 출신 전 경제부총리 김동연은 저조한 지지율을 이기지 못하고 이재명과 단일화했다. 그리고 과거에도 수많은 충청의 아들들이 대통령이 되려고 했다. 김종필, 이인제, 심대평, 정운찬, 반기문, 안희정, 이완구 등등.
지역 언론과 정치인들은 줄곧 충청에 대통령이 없어서 충청이 정치에서 소외됐다고 주장했다. 지역 출신 대선 주자들의 이름을 연호하면서 그들이 최초의 충청 출신 대통령이 됨으로써 소외의 한을 풀 것인 마냥 한껏 띄웠다. 그런데 그 꿈이 현실로 이뤄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충청도) 사람들이 충청대망론을 원하는가?”
충청대망론을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일단, 지난 선거를 살펴보면 충청도 사람들은 그것에 별로 신경을 안 쓰는 듯하다. 가장 대통령에 근접했던 김종필은 왜 결국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까? 충청도에서 민주당이 호남에서 얻는 표나 보수정당이 영남에서 얻는 표만큼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충청도 정당이라 자부하며 창당한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과 이회창의 자유선진당은 한나라당-새누리당으로 이어지는 유력 보수정당에 흡수되었고, 그 뒤로 지역 정당을 내세우는 원내정당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충청도 내에서조차 이 주장은 점점 힘을 잃을 것이다. 세종은 정부 부처 일부 이전을 넘어 새로운 행정 수도로 꼽히고 있다. 각종 수도권 개발 규제의 반사이익을 누려 성장한 천안-아산은 점점 생활권이 수도권과 가까워 지고 있다. (오늘날 천안-아산의 현실에 대해서는 다음 번에 자세하게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활발한 외부 인구 유입은 충청도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자 충청도라는 지역의 정체성을 점차 옅어지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게다가 대한민국의 인구 절반이 수도권에 살고, 지방은 소멸 위기로 치닫고 있다. 지역 자체가 사라질 마당에 충청대망론이 무슨 소용인가? 차라리 지방끼리 뭉쳐서 수도권에 맞서 작은 콩고물이라도 받는 게 훨씬 이롭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충청도 바깥 사람들에게 충청대망론은 코웃음 칠 소리다. 대통령은 국정 철학,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 지식, 경륜, 가치관, 도덕성 등을 따지는 자리다. 충청대망론에는 그런 것이 보이지 않는다. 충청대망론으로 언급된 사람을 보시라. 공통점이라고는 지역 출신 밖에 없다. 당적이나 사상, 경험 등이 모두 다 다르다. 시대정신이나 가치관을 읽을 수 없고, 어설픈 지역주의만 보일 뿐인데 충청도 바깥 사람 누가 충청대망론에 동의할까?
정책/공약/미래 계획 같은 인물의 이상적 모습, 하다못해 대통령이 이 땅에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같은 현실적인 결과물을 따져야 할 시간에 정치권과 언론은 충청홀대론이라는 근거 없는 여론을 부추기고 충청대망론을 무지성적으로 부르짖었다. 덕분에 후보 본인들은 실핏줄 같은 혈연을 강조하는데 시간을 솔찬히 써야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 낡아 빠진 떡밥에 큰 관심이 없다. 유권자 마음을 제대로 읽어야 할 지역 정치인들과 언론들만 그걸 모른다. 내 관점에서 이번 선거 최악의 장면 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충청대망론과 후보들이 충청의 가족을 운운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