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다음 참사는 일어날 것이다. 그때는 오직 이 매뉴얼만이 수행 가능할 것이다.

다음 참사 매뉴얼


서문: 다음 참사는 온다

인천에서 제주 가는 페리 여객선이 침몰한 사고가 났을 때까지만 해도, 그 이상은 없을 줄 알았다. 이태원에서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겹쳐 깔리는 사고가 났을 때까지만 해도, 이 이상은 없기를 바랄 수 있었다. 비 오는 날 일가족이 자기 집에서 물에 빠져 죽었다는 비보를 접했을 때까지만 해도, 이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겠는가 생각했다. 그리고 2023년 7월, 기어코, 평소에는 통과하는 데 30초 정도 걸린다는 내륙 지방의 한 지하차도에서 사람들이 익사한 채로 나왔다.

이제 냉정하게 학습할 때가 되었다. 상황을 파악하자. 이보다 더한 일이 올 것이라고.

그러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여기서는 그 ‘이보다 더한 일’의 구체적인 내용을 예상한다거나 하지 않을 셈이다. 그런 건 4.16 때도 10.29 때도 이번 오송지하차도 때도 못 했던 일이니까. 또한 여기서는 그 일들이 일어났을 때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논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처럼 상대적으로 안전한 때에, 아직 오지 않은 어느 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는 것처럼 흥미를 돋우지 못하는 따분한 농담거리는 없으니까.

그 대신 여기서는, 다음 참사를 준비하고 일으키고 대응하는 요령을 문서화해 볼까 한다. 이것들은 실천할 수 있다. 랄까 이 매뉴얼을 읽다 보면, 이 나라는 이미 이 매뉴얼의 상당 부분을 이미 실천하고 있고, 단지 그 원칙과 내용을 더 철저하게 관철할 필요만이 있을 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매뉴얼대로만 하면, 어떤 참사가 아무리 더 참혹하게 들이닥치더라도, 전부 어떻게든 지나갈 수 있다. 그야말로, “불행 중 다행” 아닌가?

다음 매뉴얼을 숙지하고 실천하고 주변에 전파하라.
어차피 다음 참사는 일어날 것이다.
그때는 다른 매뉴얼은 아무 소용이 없고, 오직 이 매뉴얼만이 수행 가능할 것이다.


제 1장 국민 정서

‘참사’와 ‘재해’를 언어에서 없애자

“참사”, “재해”, “재난” 같은 말은 이제 그만 쓰자. 그리고 모두 “안타까운 일”로 바꿔 쓰자. “이태원 참사”는 “이태원에서 일어난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자. “건설 현장 중대 재해”는 “공사장에서 일어난 안타까운 일”이라고 바꿔 쓰자. 청년들의 고립과 거듭되는 자살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꺼진 작은 촛불” 정도로만 말하자. 뭐가 문제인가? 안타까운 일 맞지 않은가? “외교 참사”도 정도가 지나친 과장법이다. “망신”이라고 하면 충분할 것이고, 사실은 그마저도 “해프닝”, “깜박”, “실수” 정도로 얼마든지 바꿔쓸 수 있다.

애초에 ‘참사’라는 말 자체가 너무 과하다. 뭐가 그렇게 참혹하단 말인가? 우리는 그런 감정적 강제를 당하고 싶지 않다. 사람이 몇 명 죽든, 재산 피해가 얼마나 나든, 독립 국가로서의 위상이 아무리 초라해지든, 그게 그렇게 참담한 일인지도 잘 모르겠거니와, 애초에 그런 일 때문에 내게 사회 계약 공동체 구성원의 정신적 의무로서의 죄책감을 부여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참사에 대비하려면 참사라는 개념 자체를 대비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우리 사전에 참사라는 말이 없다면, 참사는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결코 용서할 수 없는 허수아비를 세우고 찌르자

그런데 어떤 참사는 그냥 ‘안타까운 일’이라고 부르기엔 그래도 좀 너무 심하게 큰일인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어떡하느냐고? “재앙”이라고 부르면 된다. 어떤 정치인을, 내 정치적 입장과 완전히 대척점에 서 있는 누군가를, 누군가들을, 뭔가 생리적으로 두렵고 더럽고 역겹게 느껴지는 무언가와 연결하기 좋은 어휘에 연관지어 호출하면 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 누군가를, 무언가를, 무언가들을 탓하고 공격하고 비난하면 된다. 일이 이 꼴이 되도록 왜 아무것도 안 했느냐고, 혹은 일이 이 꼴이 될 줄 모르고 (뭐가 됐든) 뭔가를 하고 있었느냐고.

그 “재앙”의 허수아비를 쇠로 만들어 네거리에 끌고 나와 “규탄 대회”를 열어라. 그 허수아비에 기름을 부어 화형시켜라. 참사가 수습되든 말든, 진상이 규명되든 말든, 책임자가 처벌받든 말든, 재발 방지 법률이 제정되든 말든 그딴 것들과는 상관 없이, 오직 당신의 속이 풀릴 때까지, 결코 불살라지지 않을 쇠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에 태우고, 그 불놀이로 당신의 해결을 삼으라. 속이 풀리면 그 쇠 허수아비를 버리지 말고 당신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의 창고에 고이 넣어두어라. 그래야 다음 “재앙”이 왔을 때 다시 꺼내어 곧바로 불태울 허수아비가 있을 것이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를 복창하자

고인의 명복은 고인의 신상이 확보되는 대로 최대한 빨리 빌고 치워버리자. 좀 심한 일 같으면 눈 딱 감고 1주일 정도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어 주자. 분향과 헌화와 추모와 애도는 딱 49재까지다. 50일째부터는 향로를 걷어차도 되고 국화를 태워도, 제단을 부수어도, 영정을 내팽개쳐도 좋다. “언제까지 죽은 [자식/친구/기타 소중한 관계] 붙잡고 있을 거야! 죽은 사람을 보내줘야 산 사람도 좀 숨 쉬고 살 거 아냐! 누구 장사 망쳐서 신세 조질 일 있어?! 관짝 하나 더 나가는 꼴 보고 싶냐고!?” 정도의 ‘절규’도 아주 적절할 것이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것 아니냐는 소리를, 사는 게 사는 거 같지 않을 상복 차림의 유가족들의 귀청에 대고 그들의 정신이 말라 비틀어질 때까지 꾸억꾸억 윽박지르자. 그 ‘산 사람’ 중 하나로 남아 있을 수 있었는데 억울하게도 더는 그걸 못하게 된 고인들을, 산 사람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깔보고 욕보이자. 지금까지의 재난들을 운 좋게 잘 비껴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당신에게는 고인과 그 유가족과 이 사회를 조롱하고 겁박할 자격이 넘치도록 있다. 나는 안 죽었잖은가? 나만 아니면 되지 않는가?

제 2장 정치/미디어

모든 죽음을 교통사고와 비교하고, 모든 역병을 감기와 비교하자

매년 최소 2천 명이 교통사고로 죽는다. 매년 약 2천만 명 정도가 감기를 한 번 이상 앓는다. 이 통계를 외우고 주야로 묵상하며 그 의미를 끊임없이 되새겨서 판단의 규준으로 삼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어떤 재난도 단번에 2천 명 이상을 죽이지 않으며, 어떤 팬데믹도 한 해에 2천만 명 정도를 감염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게 얼마나 좋은 소식인지 모르는가? 누가 얼마나 죽어나가더라도 교통사고만 못하며, 무슨 병이 얼마나 창궐하더라도 감기만 못하니, 어떤 사회적 재난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는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재난은 기본적으로 사회 소수에게만 해당되는 사안이며, 교통사고나 유행성 독감만큼 만연 창궐한 일은 아니다. 지리산 골짜기에 파묻혀 사는 자연인에게 “우한 폐렴”이 남의 얘기였듯이, 서리풀공원 건너편 초고급 아파트 초고층에 사는 도시인에게 반지하촌의 수재해 따위는 남의 얘기다. 이런 식의 남남이 얼마나 많을 것 같은가? 그러니, 누군가가 “내가/희생자가 너무 불쌍해요” 하는 것까지는 봐주되, 그게 “이건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에요” 같은 저주로 넘어가려 하면, 그때는 절대 그냥 넘어가지 말고 근엄한 일침의 가르침을 따끔하게 놔 주어라. 교통사고로도 매년 2천 명은 죽는다고.

다음 선거를 위해서, 오직 다음 선거를 위해서만 행동하자

다시 강조하는 바 재난은 기본적으로 소수에게만 해당되는 사안이다. 선거 전략 차원에서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들이 모두 반대표를 던진다 하더라도, 나머지 모두로부터 찬성표를 받을 수만 있다면, 당신의 아젠다는 너끈히 가결된다는 뜻이다. 당신이 인간으로서, 정치인으로서 그 참사의 당사자들을 예우하고 관심 가질 수는 있으되 그들을 선거 전략 타겟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에게서 표를 얻지 말라. 그들을 통해서 표를 얻으려고 하라. 그들을 이용한다는 자책감을 가질 필요는 전혀 없다. 당신이 얻어야 할 표는 그들의 표가 아니라, 그들을 아직은 불쌍해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각자의 신변과 재산과 자신이 싫어하는 정치적 존재에만 관심이 있는 대다수의 표다. 비싼 돈 써서 굳이 지고 싶은가? 그게 아니라면, 참사와 재난 앞에서 사회 공동체로서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 다수에게 필요한 것을 주려고 하라. 시선을 돌릴 다른 사안도 좋고, “진상 규명”을 할 것처럼 하는 제스처도 좋다. 당신이 속한 선거구의 다수가 정 그걸 원한다면, 그 참사와 그 당사자를 외면, 부정, 모욕, 처벌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예견된 참사”와 “사회적 비용”을 거론하여 최대한 빨리 지치게 하자

이 사고는 이미 예정돼 있었던 것이라는 주장을 먼저 하자. 그 다음, 이 사고를 수습하고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를 하는 데 드는 비용이 너무 막대하니 더 이상의 예방 조치를 취하지 말자는 주장을 하자. 사람들은 이 두 주장이 모순임을 절대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오로지 “내 이럴 줄 알았어”라고 혀를 차고 싶어하는 다수 대중의 도덕적 우월감을 충족할 목적만을 갖고 있으며, 후자는 오로지 “아 근데 이제 이 얘기는 좀 그만하자 피곤하다”라고 혀를 내두르고 싶어하는 다수 대중의 도덕적 기능 부전을 변호할 목적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을 몸으로 겪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대부분은 사건을 뉴스로 겪는다. 그리고 참사는 뉴스로 전해 듣기만 해도 너무 충격적이고 마음이 힘들며 사회가 합의한 도덕 윤리 법규 수준의 밑바닥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썩 불쾌한 일이다. 이런 경험을 (앞서 살펴본 바 사실은 그리 크게 관련도 없는) 대다수에게 강제로 겪게 하는 것은 죄송한 일이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포기하고, ‘손절’하고, 윤리적 파산을 선언하자. 우리는 원래 이런 사람들이며, 이런 사람 이상이 되는 데 필요한 댓가도 치르지 못하겠다는 입장 표명 말이다. 이걸 빨리 하지 못하면, 우리는 정말로, 이딴 세상을 만든 댓가와 그 이자를 두고두고 치러야 한다. 정말 그걸 국민들에게 시킬 셈인가? 빨리 빠져나오자. 그 과정에서 궤변과 모순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나불대어도 좋다.

제 3장 경제/사회 각계

사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원칙을 지키자

교통 안전보다 중요한 것은 정시 출근이다. 사회의 성숙보다 중요한 것은 경제의 성장이다. 산업 안전 보건보다 중요한 것은 전년 대비 매출이다. 어떤 직종의 어떤 노동자라 할지라도 “너 대신 일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아파트 입주자들은 아파트의 존재 목적이 아니다. 그들은 아파트 건설 투자금 회수의 수단이고, 그 아파트의 가치를 떠받쳐줄 핵심 구조물이다. 그 아파트에서 철근을 얼마를 빼먹든, 그 아파트의 가치는 그들이 받쳐줄 것이다. 비싼 돈 내고 그 아파트에 들어온 사람들은 반상회에 모여 자기 목숨과 그 집의 평가금액을 저울질해 본 다음, ‘정말 심각해지기 전까지는 일단 함구’하기로 결정할 것이다. 이윤보다 중요한 것은 없고, 손실보다 나쁜 것은 없으니까.

이렇게 당연한 얘기를 입 아프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아직 미국의 군사적 보호와 정치적 후견과 경제적 동맹이 없으면 안 되는 후진국이지 않나? 우리가 아직도 전쟁 중이며, 이승만 박사와 맥아더 장군과 박정희 대통령 각하와 박근혜 대통령님께서 피땀 흘려 한강의 기적을 일궈 놓은 조국임을 잊었단 말인가? 입만 열면 참사 참사 거리는데 아니 머리 위에 김정은 정권을 이고 사는 것보다 더한 참사가 세상에 있나? 이 세상엔 사람보다 중요한 것, 사람 목숨보다 비싼 것, 인권의 존엄보다 우선해야 할 것이 얼마든지 있다. 이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은 다 주사파 빨갱이 새끼들이다. 제아무리 “이윤보다 사람”,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규명” 운운 옳은 말만 골라 할지라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골라서 하자

비상문은 잘 닫아둔 다음 벽으로 사용하자. 소화기의 빨간색과 비상구 표지의 초록색은 인테리어에 맞게 덧칠하자. 5인 이상 사업장이 이런저런 안전법규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면, 최대 4인까지만 속할 수 있는 하청 업체로 갈갈이 찢어버린 다음 하나하나 일을 주자. 원래대로라면 운항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할 배에 사람과 짐을 태우고 있다면, 기왕 그렇게 된 바에는, 한번 휘청했을 때 다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한계까지 그득그득 과적하자. 말이야 바른 말이지, 언제 영업 정지를 당할지 모르는데, 그때까지는 벌 수 있는 최대한 벌어야지 안 그런가?

이 나라에서 누가 법규, 의무, 원칙, 사회적 도리 다 지켜 가면서 장사한단 말인가? 그러면 망한다는 거 도대체 누가 모르느냐 말이지. 사실은 반대지 않은가? 법규, 의무, 원칙, 사회적 도리를 회피할 수 있다면, 그렇게 했을 때 최대 이윤과 최고의 경쟁력이 달성된다는 것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왜 모두에게 그걸 지키라고 강요한단 말인가? 그렇게 강요해 버리면, 나 혼자 그걸 안 지켜서 혼자 이득 보는 걸 못 하지 않는가? 순순히 그 강요를 따르지 못하겠다고 선언하자. 그리고 각종 금지법들을 꾸준히 어기자. 특히 ‘특별법’, 사람 이름이 붙은 법들 위주로. 그 사람에게나 특별하지 나한테는 불편하고 불쾌하기만 한 법만 꼬집어 골라서.

문제를 해결의 대상으로 간주하지 말고 협상의 대상으로 남겨두자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선 안 된다. 우리는 문제와 협상하려고 해야 한다. 재난, 재해, 참사를 일종의 ‘문제’로 간주할 수 있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걸 수습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게 아니라, 그 사회 공동의 죄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광야로 쫓겨 나갈 숫염소를 잡아 오는 일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회 공동의 죄와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어렵고 대체로 불가능하지만, 숫염소를 잡아 안수를 하고 들판에 내보내는 일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반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그 문제를 해결한 셈칠 수 있다면, 이제 그 죄들이 사라졌다는 주장을 모두와 합의할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쉽고 빠르며 지속 가능한 대응책은 없을 것이다.

황무지에서 천막 치고 농경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원전에 주어진 규칙은 2023년 대한민국에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다. 문제를 해결하지 마라!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지 마라! 재해의 책임자를 처벌하지 마라! 사고의 재발을 방지하지 마라! 아니, 오히려 재발이 되도록 그냥 그대로 두어라! 너희는 어차피 죄 가운데 태어난 어쩔 도리 없는 작자들이니 스스로를 고치려고 하지 마라! 그저 앞으로도 지금처럼 제물의 멱을 따서 그 피를 너희 머리에 바르고, 내게 잘못했다고 빌고, 내게 비는 대신 민주 법치가 살아 있는 공화국을 건설하자는 자들의 입에 돌을 던져라!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추신

이상의 모든 내용은 반어법이다. 그러나 서문만큼은 진심으로 썼다. 다음 참사는 올 것이다. 아무도 더 이상 죽지 않기를,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는 별개로, 냉정하게 그런 판단이 내려진다. 다음 참사가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약 온다면, 그때는 슬퍼하고 분노하고 하는 이상의 뭔가를 하고 싶다. 조직적인 것을, 좀 낯선 것을, 그리고 좀 시퍼런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