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구글플러스의 모 애니메이션 커뮤니티에 썼던 글입니다. 출처
0. 이 오리지널 기획은 아무래도 현대 일본이 겪고 있는 헤이세이 세대의 저조한 결혼/출산 문제를 은유한 것 같습니다. 아주 노골적으로, 하지만 별 소용없이 말이죠.
1. 여러 상징과 설정들을 둘러보건대 “아이들”의 임무란 규룡을 쓰러뜨리는 것이라기보다는 사실은 짝짓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이미 각처에서 밝혀낸 바이니 증명은 생략하겠습니다. 애초에 정말로 규룡의 박멸이 목적이라면 프랑키스처럼 효율 떨어지는 거대 전투기기는 운용되지 않을 것이며, 적어도 승무원의 성별이나 조종 자세 따위에 구애받지는 않도록 개발되었을 겁니다.
요컨대 프랑키스라는 방어체계 전체가 하나의 기만이고 은폐입니다. 아이들이 섹스를 공개적으로 훈련 및 실행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아니면 그냥 거대 로봇 조종석을 아주 특이하게 만들고 싶다는) 기획자의 의도에 대한 은폐 말이죠. 정말 너그럽게 보아주자면 이것을 그간의 전통사회가 강요해 왔던 가부장적 일부일처제에 대한 은유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더더욱 이것은 총체적인 시청자 놀려먹기에 다름아니게 됩니다.
2. 히로라는 캐릭터 자체는 에반게리온의 신지에서 1도 발전하지 않은, 닳아빠진 캐릭터입니다. 남성성을 갖지 못해, 혹은 발기나 성징이 되지 않아 이 가부장제적 체계에 편입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미성숙 상태의 남성(공공연한 비밀: 이것은 또한 오랜 세월 숱한 히로인들에게 기대어야만 했던 주로 남성 오타쿠들의 페르소나이기도 하죠). 하지만 이 옆에 제로투가 투입되면서 이 작품은 한층더 적극적으로 기만적이 됩니다. 제로투가 갖고 있는 남성성(이랄까 “포지티브 펄스” ㅋㅋ)이 히로를 구제하고 쓸모있는 인간으로 만들어 체계에 편입시키는 것이죠.
왜 기만적이냐면, 주인공 주제에 자기 신세를 자기가 고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애초에 히로가 ‘하는’ 게 뭡니까? 자기도 모르게 제로투에게 이끌려 키스하기? 느낌이 없다고 사과하기?)도 있지만, 가장 중요하게는, ‘남성적 남성의 군림과 여성적 여성의 피지배’로 요약 가능한 바, 프랑키스 체계에 전제된 성역할을 실제로는 전혀 뒤집지 않은 채 그냥 겉모양만 그런 것처럼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이렇게 이해하면 어떨까요? 오랫동안 “가부장제 사회를 깨부수자!”라고 외치던 여성 사회운동가가, 시집을 가더니, 남편에게 가사를 시키고, 자기가 ‘남자가 하는 일’을 하면서 그것을 여성해방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부장제를 정말로 깬 것도 아니거니와(보통은 비혼 선언 내지 가정 내 성역할 해체로 가부장제에 맞서죠) 오히려 남자가 남자 일을, 여자가 여자 일을 한다는 전제에 아주 안이하게 편승한 것이며 근본적으로는, 여전히 누군가가 “앱충” 역할을 하고 있는 만큼, 눈가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게 제가 지금까지 파악한 바 <달링 인 더 프랑키스>가 제로투와 히로를 데리고 하고 있는 짓의 실상입니다. 어딘가 탈락한 듯하지만 왜인지 존중받아야 하는 초식남들은, 어쩌면, 강하고 섹시하고 신비감 넘치는 육식녀(이거 만화냐?)를 안겨주면, 이 모순적 사회에서 그럭저럭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더 훌륭하고 잘 작동하는 결합체가 되어줄 수도 있다, 뭐 이런 소리인 겁니다. 짧게 정리하면, 이 작품이 시도하고 있는 것은 실효성이 전혀 없는 싸구려 미러링에 불과하다는 혐의가 아주 짙습니다. 그리하여, 있지도 않은 허구적 존재인 제로투만이 이 서사 전체의 구원자가 됩니다.
4. 이 기저 발상에 동의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요약하자면, 정당화가 매우 어려우므로 동의 못 합니다.) 시청자로서 정말 자존심 상한달까 콧방귀가 나오는 지점은, 이런 이야기를 할 거면 좀더 수준 있는 은유로 잘 승화해서 내놔야 할 텐데, 피스틸(사전을 찾아보면, 이 만화 속 승무원들은 꽃의 암술과 수술을 부르는 단어로 호명됩니다. 사실은 여기서 이미 기분이 나빠야 합니다)들의 스키니 수트와 제로투의 혓바닥 따위를 가지고 에비, 이 떡밥 좀 먹어봐라, 하면서 이 가소로운 알레고리를 우리 면전에 대고 흔들어댄다는 겁니다.
뭔가를 소비자한테 먹이고 싶다면 아예 직설적으로 성분 표기를 해서 먹을 사람만 먹게 해 주든지, 아니면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양념간에 재우든지 할 일입니다. 그래서 데즈카 오사무 선생으로부터 미야자키 하야오까지의 재패니메이션은 인류에게 호소하고 싶은 메시지들을 그렇게 손질해서 내놨고, 그러면 우리는 ‘우와 누구누구 모에!! 근데이게또 이렇게 심오한 뜻이’ 하면서 잘 받아먹어준 바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건 한꺼풀만 벗겨 보면 “얘들아 섹스 좀 해! 섹스!!”라고 우기고 있을 뿐인 걸 로봇물이라는 한꺼풀만 씌워서 들이밀고 있으니, 순순히 먹어줄 맘이 나겠느냐 말입니다.
5. 쉽게 말하자면,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는 어렴풋이 알겠는데 그게 일선을 훌쩍 뛰어넘어 주제 넘게 파오후 씹덕스러운 탓에 차마 못 봐주겠다는 소립니다. 그게 너무 심해서 차마 3화를 확인하지도 않고 그냥 이건 당분간 못 본 체하겠다고 결심했을 정도입니다. 그 ‘하고 싶은 말’의 내용 자체는 오히려 둘째 문제입니다. 팝팀 어쩌고 하는 애니, 케모노 어쩌고 하는 애니는 재미있게 봐지잖아요? 걔네들은 자기 주제를 아니까! 이건? 자기 주제를 몰라요! 지가 무슨 최첨단 대작인줄 알아(20세기도 못넘은 관념 가지고)!
말 나온 김에 이후 전개를 예상해 볼까요? 크게 두 가지 전개가 예상됩니다. 하나는 이대로 쭉 가는 겁니다. 아마도 제로투와 히로의 갈등과 완전한 결합을 위해 주변 인물과 사건이 총동원되는 과정일 것이고 꽤 지루할 겁니다. 다른 하나는 이보다 더 식상하게, 히로-제로투를 포함한 작중 ‘커플’들이 완전한 성숙 내지 결합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건데, 이건 지루한데다가 뻔하기까지 할 겁니다. 나중엔 규룡 따위 어찌되든 아무래도 좋을걸요. 어느 쪽이든 소위 “보이미츠걸”, “청춘성장물” 따위의 한참 잘못된 카테고리 밑에서 오독될 가능성은 불 보듯 하고요.
6. ‘비익조’를 사전에서 찾아 보면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되는 전설을 조금 알 수 있고, ‘금슬이 좋은 부부’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사실상 사전 속 비익조 낱말 풀이 이상의 콘텐츠적 내용량이 없습니다. 어쩌면 그냥 거대로봇물 마니아들이 이 단어 하나 보고서 망상두뇌 풀가동 상태로 모여 “야 요즘 잘 안 나온 모에 속성 넣어서 이거 갖고 뭐 만들자” 해서 만든 건지도 몰라요. 뿔 붙이고 육식녀 전파녀 속성 붙여 일단 제로투를 빚은 다음에.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기껏 이 작화, 이 액션, 이 성우진, 이 심도의 세계관 설정을 들여놓고는 가부장제의 담벼락 하나를 못 넘고 일부일처, 양성젠더 같은 사상의 기만적 재생산 따위에 발벗고 복무하고 있다니 말입니다. 제가 짐작하기로는, 제작진이, 이 애니를 보는 헤이세이 세대가 자기 짝을 찾아 비익조가 되고 싶어하리라는 야망 같은 걸 엄청 품고 있는 거 아닌가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깟 게 뭐라고 이렇게 진지하게 구는가 말이죠.
7. 아직까지 이 작품에 아무 불편함을 못 느끼고 계시다면 이 이야기는 전부 한갓 프로불편러의 개드립이오니 안심하시고 이 2쿨짜리 예비 대작을 계속 즐기시면 되겠습니다. 제가 2화까지만 보고 지레짚은 것도 많을 것이니 의견 있으시면 부디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커뮤니티가 썰렁해서 악플 없겠지 싶어 써봤어요
999. 좀 많이 허황되어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주제이긴 한데, 그 프랑크스라는 것들이 굉장히 4세대 이후 포켓몬을 닮았지 않나요? 그건 이 애니를 보고 있는 사회초년생들에게 대단히 친숙한 레퍼런스이자, “키우고 싶은 것”의 암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의 기호 체계를 들여다보자면, 프랑크스는 스테이먼과 피스틸의 결합으로 생명을 얻는 것으로서 “자손”을 은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거든요…? 그렇다면 이 작품이 현세대 젊은이들에게 이렇게까지 미끈하고 알록달록하고 매력 있고 튼튼한 자손들을 보여주며 약속하고 있는 것은… 어으 징그러우니 그만할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