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아직까지 안 보고 산 게 더 용하다 할 TOP 5.

(뉴타입 꼰대들이) 꼭 봐야 할 2000년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 5선


일러두기

제가 원래 이런 거에 버튼 눌리는 사람이 아닌데, 지나가다 결국 이딴 게시물을 읽어버렸고 무슨 배짱으로 4위에 쿄소기가를 올려놓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좀 제대로 된 필수 감상 목록을 만들어 덮어써야겠다는 의협심이 솟구쳤습니다. (쿄소기가는 뭐랄까, 예술성이 있는 TVA에 대한 최후의 시도였습니다.)

쿄소기가
이런 걸 보고 흥미가 생긴다면 보셔도 됨. ⓒ 도에이 애니메이션

원글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양적으로 (거품 끼었다 할 정도로) 팽창을 한 21세기의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인 만큼 5선을 추린다는 게 말이 안 됩니다만, 여기서는 딱 하나의 목적과 기준을 가지고 5선을 뽑아 볼까 합니다. 아직도 쇼와를 살고 계신 “아니메 오타쿠”님들에게 충격을 안겨주면서, 현재 일본 2D 산업이 어디에 와 있는지를 아주 빠르게 분위기 파악시킬 수 있을 만한 것들로.

#5 블랙★록 슈터 (2009)

21세기 특히 2010년대 언저리의 일본 “2D 산업”을 설명하기 위해서 반드시 언급하고 지나가야 하는 존재로 하츠네 미쿠가 있습니다. 일본 2D 산업에는 “공식이 딱히 뭘 안 했는데 순전히 캐릭터의 인기 때문에 온갖 파생이 나오는 IP”가 존재하고, 2000년대 중반까지는 ‘동방프로젝트’가 그랬던 것이 지금은 보컬로이드 특히 미쿠가 그렇습니다. 이 열풍의 한가운데에서 (쿄소기가 따위에 비할 수 없이) “특이한 내역을 가진” 작품이 나왔는데 그게 바로 블랙록슈터입니다.

블랙록슈터
이 그림 한 장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일을 시켰는지 믿기 어려울 겁니다. ⓒ huke

누가 봐도 미쿠의 원형에서 파생되어 나온 블랙록슈터라는 캐릭터 원안, 여기에서 영감을 얻은 보컬로이드 기반의 음악, 이 파생 콘텐츠들이 갖는 합집합의 세계관과 설정을 빌어 온 (그리고 누구도 딱히 그렇게까지 해달라고 한 적은 없었으므로 흥행은 참패한) TVA까지. 블랙★록 슈터는 그 존재 자체가 동시대 일본 2D 산업의 생리와 다이내믹을 예화하는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 프랜차이즈 전체를 조망하면서 그때 TVA’도’ 보시면 좋습니다. 애니 자체는 좀 재미없거든요.

#4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1기 (2016)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념을 (아무리 가까워도) 90년대 초중반에까지만 정지시켜 두신 분들이라면 다들 ‘열혈물’에 대한 관점이나 입장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뭔가 싸우고 모험하고 우정 노력 승리 뭐 그런 게 있어야 만화고 애니 아니겠느냐는 거지요. 음, 그거 아세요? 상술한 #5에서도 대충 암시한 것 같은데, 최근의 일제 2D 문화는 시놉시스나 예술성 자체에는 큰 비중이 없고, 세계관과 설정, 특히 강렬하면서도 신선한 캐릭터가 판을 주도합니다. ‘히로아카’처럼 말이죠.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한번 보기 시작하면 최소 한 명은 응원하게 됨. ⓒ 호리코시 코헤이

이 범주에 문호 스트레이독스 등 다른 작품도 많이 속해 있는데 굳이 히로아카를 고른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 팬덤이 세계 보편적이라는 겁니다. 방탄소년단의 눈빛과 춤사위가 BTS의 이름으로 세계에 뻗어나가는 바로 그 원리가, 웅영고교에 다니는 등장인물들의 강력한 캐릭터와 그들 사이의 ‘케미’, (멋이 강조된) 전투씬 등이 일본 안팎에서 사랑받으며 팬보이와 팬걸을 양산하는 현상에 적용돼 있습니다.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당신은 동시대 세계의 2% 정도를 모르고 사는 겁니다.

#3 케모노 프렌즈 (2017)

일본 2D 산업을 이해하고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의 개황을 파악하기 위해 아무리 항마력 떨어져도 반드시 체크해야 하는 분야가 있습니다. 원글이 조롱조로 인용하는 바 “작품성이 떨어지며 모에 요소만 충만한” 작품들 그리고 그것들이 이루는 업계가 그것이지요. 궁금하실 겁니다. 실로 변태적이라 할 만한 그 씹덕 모에 뽕빨물들이 어떻게 이렇게 팔리는가 말이지. 그거 아세요?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그렇게 씹덕한 모에 뽕빨물이기 때문에 편안하게 사먹을 수 있는 겁니다.

케모노 프렌즈
3D 모델링된 서벌캣 의인화입니다. 네. 요즘 사람들은 이런 거 봐요. ⓒ 야오요로즈

‘난민’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예컨대 치유계 난민이 있다고 하면 그들은 ‘치유계’ 애니메이션이 방영하지 않는 분기 동안 내내 힘들어합니다. 그들은 상한 것만 아니라면 그 장르를 분기마다 사먹어줄 준비가 된 소비자들이기 때문에,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저예산 3D 모델링을 써서라도 그들에게 그걸 떠먹여줘야만 하는 것이고, 그러다 아주 가끔 대박이 나면 그걸로 제작자들은 한숨 돌립니다. 그리고 사실은 이 위태한 순환이야말로 가난한 일본 2D 산업계를 꾸역꾸역 돌리고 있는 한 축이죠.

#2 울려라! 유포니엄 1기 (2015)

돈 얘기 나온 김에 좀더 풀어볼까요. 원글 저자가 썩 좋아할 만한 예술예술하고 간지간지한 고퀄 애니메이션은 대체 언제 어떻게 (안)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돈이 되느냐, 흥행이 보장되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사실은 이마저도 좀 과거형입니다. 최근은 바이올렛 에버가든 등의 사례를 보면, 그리고 유포니엄이 그러한데, 아예 처음부터 철저히 산술적이고 정량적인 기획 아래 투자를 받아 실패할 도리가 없는 퀄리티를 뽑고 그 성공을 돌려받는 방식이 도입되고 있습니다.

울려라! 유포니엄
관현악에 관심 없으시다고요? 걱정 마세요 관심이 생길 테니까. ⓒ 교토 애니메이션

유포니엄은 노골적으로 야마하의 스폰서십을 받은 프랜차이즈입니다. 작품 속 악기들은 시종일관 반짝이고 YAMAHA는 절대 가려지지 않죠. 그걸 숨기기 위해 그들은 A급 소설가를 동원한 A급 원작을 미리 내놓았고, “원작 기반 애니메이션”치고는 말도 안 되게 잘 만든 애니메이션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측 범위 안의 고객 호응을 돌려받았고요. 이제 일본 애니메이션이란 업계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더 성장”은커녕 노쇠한 것이죠.

#1 THE iDOLM@STER 1기 (2011), 러브라이브! 1기 (2013)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애니메이션 그 자체만으로는 뭐가 되지 않고 (분명 “원반판매량”만으로도 충분했던 황금기가 있었을 겁니다만 지금은 아닙니다.) 결국 부대사업을 진행할 수 있어야만 하게 되었는데, 그게 가장 쉬운 장르가 뭐냐 하면 “아이돌물”이라는 게 지난 헤이세이 내내 이 업계가 찾아낸 답이었습니다. 그래서 공동 1위는 양대 아이돌물로 선정해 봅니다. “@ㅏ재”와 “럽폭도”를 사이에 두고 우열을 가리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두 프랜차이즈는 노선이 조금 다를 뿐 결국 같은 종류의 비즈니스거든요.

아이돌마스터 러브라이브
그건 사실 SES와 핑클이 서로 싸운다는 소리만큼이나 유치한 얘기다. ⓒ BANDAI NAMCO, SUNRISE

그 사업이 뭐냐 하면, 결국 다시 ‘캐릭터라는 상품’으로 환원되는데, 당신의 아이돌을 키워서 최고로 만들어 주라는 게임을 제안한 뒤 한 명이라도 더 이 게임에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이 BM은 일단 궤도에 오르면 어떻게든 굴러가고, 잘만 하면 대박도 난다는 것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이는 일본식 2D 산업에서 정말 오랜만에 찾아낸 획기적인 발견이고 그래서 숱한 IP들이 “가챠”를 뽑는 “소샤게”를 들고 이 싸움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이 작품들은 이런 맥락에서 봐도, 그냥 봐도 재미있습니다.

좀 업데이트 좀 하고 사세요 좀!

사실 이 목록은 앞서 일러두었듯이 좀 유치하고 한쪽으로 편중되며 굉장히 많이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슈타게, 어과초, 마마마, 또 뭐 있죠? 한두 트럭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른 커뮤니티에 원글을 공유했더니 당장 이 목록에 넣지 못한 다른 명작들이 줄줄 언급되더라고요.

2000년 이후라면 강연금도 있고 사이코패스, 나만이 없는 거리 등 대중성 작품성 둘 다 잡은게 넘치는데 그냥 꺼무위키 켜서 ‘느낌있는’ 애니메이션 대충 소개하는 듯한 느낌.

아 맞지 그것들도 있기는 해… 흑 난 취향이 너무 모에부타 입맛이야… 울면서 결국 못 넣은 작품들이 산더미 같네요. 하지만, 비록 이렇게나 아무것도 아닌 목록일지언정, 아직도 “에바”를 레퍼런스로 인용하고 AKIRA를 지상 최대 명작이라고 떠받들며 “건담 재밌지 않니?” 같은 소리를 하는데도 자기 이빨이 요즘 2D 업계에서 먹힐 거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리스트마저도 유효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딱 한 달만 니코동과 픽시브를 돌아다녀 보면 받을 수 있는 업데이트를 왜 이 뉴타입 꼰대들은 받지 않는 것일까요? 혹시 이분들은 아직도 사람들이 흙 파서 나온 돈으로 투명 필름에 물감 발라서 애니메이션이라는 예술영화 장르를 하고 있다고 믿는 걸까요? 차라리 그런 거였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