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부진 책임은 감독만 져야하나요?

리더에 대해 묵직해야 한다, 그리고 안아줄 수 있어야 한다


나무에 낙엽이 질 때쯤, 한국 프로야구 ‘KBO리그’는 정규 시즌이 끝나고 포스트 시즌이라는 것을 한다. 구단 열 곳 중 상위 다섯 팀에 와일드카드 결정전 – 준플레이오프 – 플레이오프 – 한국시리즈에 진출할 기회를 준다. 정규 시즌 1위는 한국시리즈에 직행하고, 그 밑에 위치한 구단은 저 단계의 역순대로 상대를 꺾고 올라와야하며,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는 팀이 시즌 우승이라는 명예를 쥔다.

나를 포함한 야구 팬 대부분은 우리 팀이 저 다섯 팀에 들어 가을에도 야구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순위가 높고 낮건, 전력이 강하고 약하건, 이 시리즈에서 승리만 하면, 우승이라는 값진 열매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진 사퇴 당한(?) 감독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가을 야구 못 가는 팀을 응원해야만 하는 팬들은 손혁 감독이 이끄는 키움 히어로즈가 부러웠을 테다. 10월 7일에 키움은 3위였고, 그 자리를 지키기만 한다면 준플레이오프에서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승리한 구단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정작 키움 팬들은 별로 만족하지 않았다. 지난해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할 정도로 전력이 원체 강한데다가, 구단은 팀을 한국시리즈로 팀을 이끈 장정석 감독과 재계약하지 않은 대신 손혁을 감독으로 선임했으며, 그 감독은 초보였으므로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부터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데다가, 초보 운영하는 모습을 랜선으로 지켜봐야 했던 팬들은 심심하면 감독 교체를 주장했다. 가을야구를 앞둔 상황에서 그것이 실제로 이뤄지리라 생각한 사람은 흔치 않았지만.

야구 좀 봤다는 사람들은 손혁 감독이 ‘최근 성적이 부진해서’ 자진 사퇴했다는 구단 발표에 어리둥절했다. 어쨌든 3위고, 부진했다던 9월에 타선의 기둥 박병호가 없었음에도 14승 18패를 한 것보면, 이정도 성적은 상위권 팀에 한번쯤 찾아오는 고비라고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구단은 계약한 대로 내년 시즌까지 임금을 모두 지급한다고 밝혔다. 자진 사퇴한 감독은 남은 임금을 받지 않는 것이 관례다. 감독이 비운 자리에는 수상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기사들은 구단 이사회 의장 허민을 악취의 원인으로 손가락질했다. 대주주이자 구단주인 이장석이 횡령과 배임죄로 KBO에서 제명당한 사이 허민은 구단주 행세를 했다. 그는 투수 기용부터 대타 · 번트 작전까지 개입했고, 지방으로 원정 경기 갔던 감독을 서울로 불러냈다고 한다. 프런트와 감독 간 갈등은 끊이지를 않았고, 감독직을 그만 두겠다는 말도 나왔다.

감독과 프런트 사이에서 일어난 갈등은 적어도 키움에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프런트는 현장에 적극 개입하는 팀 색깔로 유명했고, 이를 못마땅해 하는 야구인들도 제법 있었다. 하지만 이런 구조는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릴 수가 있어도, 옳고 그름이 갈리는 문제는 아니다.

키움은 시대 흐름을 한국에서 가장 빠르게 따라갔을 뿐이다. 히어로즈가 창단될 당시, 메이저리그에서는 새로운 야구 접근법이 그라운드를 휘몰아쳤다. 세이버 메트릭스는 경기 기록과 첨단 측정 장비를 이용해 선수 능력치를 통계화하는데, 이를 통해 선수 개개인의 역량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한 구단은 세이버 메트릭스를 적극 활용해 저평가 된 선수로 전력을 최대한 꾸리면서, 프런트가 큰그림을 그리면 감독이 현장에서 전술을 구사하는 전략을 취했다. 새로운 구단 운영 방식은 성공했고, ‘머니볼’이라는 그럴 듯한 이름을 얻었다. 키움은 선진 야구를 빨리 받아들인 덕분에 모기업이 없어도 모기업 있는 구단과 대등하게 싸웠다.

이번 사건이 이전 흐름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손혁 감독은 그 프런트랑 싸운 것이 아니라 허민 의장 개인과 싸웠다는 점이다. 허민은 예전부터 대한민국 최초 독립 야구단인 고양 원더스를 만들고, 미국 독립 야구리그 선수로 활동할 정도로 야구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게임 ‘던전 앤 파이터’ 제작사와 소셜커머스 ‘위메프’를 경영한 경험은 있어도, 야구 운영과 관련해 전문적인 경력을 쌓은 사람은 아니다. 게다가 그에게는 구단 지분이 하나도 없다. 구단주처럼 행세하면서, 프런트를 제치고 구단과 경기 운영에 독단적으로 나섰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은 그 어느 때보다 우려가 깊을 수밖에 없다.

한 달 만에 쫓겨난 감독

가장 먼저 감독 대행을 내세운 구단은 한화 이글스다. 6월 9일부터 한용덕 감독 대신 최원호 2군 감독이 1군 경기를 지휘했다. 리그 개막(5월 5일) 이후 한 달 넘긴 지 얼마 못 가서 감독이 물러났다. 키움보다 앞서서 성적 부진을 자진 사퇴 이유로 삼았는데, 이유가 키움보다는 그럴 듯했다. 한용덕호는 구단 최다 연속 패배 기록(14연패)은 물론 프로야구 최대 연패 기록(18연패)을 깨뜨릴 기세로 꼴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사퇴 소식이 알려지고 나서 인터넷 여론은 의외로 감독에게 따뜻한 분위기였다. 야구팬들은 구단이 늪에 빠진 데에 감독 개인 역량 부족보다 구단에 더 책임이 크다고 봤다.

한화는 프로야구에서 대표적인 약체 구단이다. 구단은 유망주 육성을 소홀히 한데다가, 전임 감독 김인식과 김성근은 경험이 많은 노장 선수들을 끌어들이려고 유망주를 몽땅 팔아버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망하겠다고 생각한 구단은 김성근 감독을 사퇴시킨 뒤, 구단 운영 방침을 성적에서 육성과 절약으로 틀었다. 외부 선수 영입 축소, 과감한 노장 선수 정리, 유망주 육성이라는 계획을 내세웠다.

리그 우승을 향한 방향은 잘 잡았지만, 그 길은 지루하고 험난하다. 신인 선수 육성은 성과만큼 위험도 큰데, 이글스는 여전히 교육 체계가 부실하다. 그 결과 올 시즌에도 구단이 바라던 스타 유망주는 나오지 않았다. 안 그래도 전력이 약했는데, 시즌 전에는 다른 구단 출신 자유계약 선수는 한 명도 영입하지 않았고, 시즌 후에는 그나마 있던 베테랑 선수들마저 나이라는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기량이 떨어졌다. 올해 꼴지는 예견된 일이었다.

연패가 계속되면서 팬들은 서서히 화가 쌓여갔지만, 프런트가 책임지고 올바른 방법으로 사태를 수습했거나 팬들과 소통했다면 팬들은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팀이 5886899678이라는 비밀번호를 찍고 있었음에도 끝까지 응원한, 보살로 유명한 한화 팬이니까. 하지만 프런트는 감독에게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 책임을 묻고 말았다. 홈경기에서 감독을 보좌할 코치를 전부 2군으로 내려, 감독 혼자 경기를 운영하게 하는 기행을 저질러 가면서까지. 굴욕을 맛본 감독은 며칠 뒤 쓸쓸히 물러났고, 감독 대행은 114경기를 다 떠안아야 했다.

한국야구위원회가 2020년에 발표한 구단 별 평균 연차와 연령에서 한화 이글스는 모두 1위를 차지했다.
선수단 연령이 가장 어린 키움 히어로즈와는 2.5년, 2.1세 더 많다.

프런트만 좋은 감독 대행 시즌

누군가는 시즌 중간에 감독을 내치는 것이 뭐가 대수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감독은 성적에 책임이 있고, 성적이 떨어지면 직을 내려놓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도 덧붙이면서.

내 생각에 이 말은 딱 반 푼짜리 진실만을 담고 있다. 성적을 올리려면 좋은 선수를 키우고, 경험이 풍부한 감독을 데려오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유감스럽게도 현대 프로스포츠는 노력과 경험만으로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

‘프로 축구는 자본으로 실력을 쌓는다.’는 축구 자본주의가 축구계에서 화두가 되었지만, 저 흐름은 축구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프로 스포츠에서 통할 정도로 고도로 산업화 되었다. 선수 행동 하나하나가 디지털 장비를 통해 수치로 측정이 되고, 이를 선수 기량 향상이나 경기 운영에 활용하는 과학화도 활발하다. 이런 것들은 현장을 지휘하는 역할에 한정된 감독이 할 수 없는 일들이자 프런트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성적에 책임을 져야할 주체는 감독만이 아니라 프런트도 포함된다.

한국 프로스포츠 구단 대부분이 감독을 경질한 뒤 수습하는 과정을 보면 진짜 성적 때문에 감독을 경질한 건지 의문이 든다. 다른 나라에서는 감독을 경질하고 나서 한 두 경기만에 신임 감독을 모셔오지만, 한국은 시즌 끝날 때까지 감독 대행 체제로 가는 구단이 적지 않다.

키움과 한화 이외에도 SK 와이번스 염경엽 감독이 피로 누적으로 감독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서 박경완 수석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았다. 이로써 KBO리그는 감독 대행이 세 명이나 되는 전례 없는 상황을 맞이했다.

2020 KBO리그 감독대행들의 성적. 성적 칸 큰 글씨 왼쪽은 승률, 오른쪽은 임기 끝날 때쯤 거둔 순위.
감독대행들은 감독보다 승률을 올리기는 했으나, 한 번 정해진 순위를 끌어올리기는 어려웠다.

사정은 옆 동네도 다르지 않았다. 프로축구 최상위 리그 ‘K리그 1’에서는 12팀 중 4팀(수원 삼성 블루윙스, 서울FC, 부산 아이파크, 인천 유나이티드)이나 감독을 중간에 경질했고, 대구FC는 아예 감독 대행 체제로 시즌을 시작했다. 서울FC는 감독 대행이 구단과 불화를 이유로 물러난 뒤 구단이 또다시 감독 대행을 선임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벌였다.

2020 K리그1에서 리그 시작 후 경질된 감독과 새로 취임한 감독(대행)들의 성적.
이름이 굵은 글씨인 것은 감독, 보통 글씨인 것은 감독대행이다.

한 끗 차이지만, 너무나 큰 차이

감독과 감독대행은 단어만 놓고 보면 말장난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권위와 정당성에 있어서는 두 직책은 전혀 같을 수가 없다. 황교안 국무총리는 박근혜가 대통령직에서 탄핵된 뒤 대통령이 아닌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헌법상으로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사라졌다고 해서 바로 대통령이 될 수 없고, 60일 내로 대통령을 새로 뽑아야 한다. 한국에서는 임명직인 총리가 선출직인 대통령과 비교해 절차적, 민주적 정당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권위는 그 정당성을 기반으로 두고 세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한대행이라는 이유로 정상회담에서 다른 국가 정상에 정상으로서 대우를 받지 못했다.

대행은 자기 이름으로 시계를 만드는 것조차 논란거리가 된다.

장기간 감독 대행을 맡아야 했던 사람들은 원래 신분은 코치인 상태에서 감독 역할을 맡아봤자 감독으로서 대접을 받지 못해 힘들었다고 말했다. 감독 대행이기 때문에 감독실을 쓸 수 없고, 축구에서는 감독만 정장을 입을 수 있는데 감독대행은 입지 못한다고 한다. 권위가 모자란데, 구단 미래나 감독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장기적 운영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저 주어진 전력을 짜낼 수밖에 없다. 팬들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하는지 막막하다.

이상을 현실에서 구현할 책임자가 없어서 구단 미래는 불투명해지고, 선수단을 지휘하면서 하나로 이끌어야 할 사령탑이 사라진 선수들은 동요한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시즌을 포기했다는 생각에 팬들은 실망하고, 소극적인 경기 운영으로 리그 수준과 질은 떨어진다. 누구에게도 즐겁지 않은 프로스포츠는 존재 이유가 없다. 부디 이번 시즌에는 이해 안 가는 구단 운영으로 팬들이 눈살 찌뿌리는 일이 없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