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미지에 삶을 빼앗기고 있는 거라고? 글쎄.

참말 인스타그램에까지 절망이 있어야겠는가


모 웹진에 올라온 모 문화평론가 님의 무슨 글을 읽었다. 원래는 제목이 없는 글인데, 웹진으로 가면서 글의 첫 줄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가 제목이 됐다.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그래서 어딘지 괴기스러워 보인다. (…) 그곳은 언제나 밝고 희망차고 화려하다. 청년 세대에 대한 담론과 인스타그램의 간극은 마치 매트릭스의 밖과 안처럼 극명하다.

음? 그래서? 좀더 읽어보기로 한다.

사실 이 간극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하는 한 청년 담론, 청년 세대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이 간극이야말로 청년 세대가 지닌 딜레마의 핵심이자 청년들의 가장 절실한 실존적 문제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확실한 건 그들이 언제나 이와 같은 밝고 화려한 이미지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그런 방식으로 끊임없이 전시하고, 또 그렇게 전시된 이들 속에 있는 동안에만 온당한 곳에 있다는 느낌을 얻는다. 나는 예전부터 이를 ‘상향 평준화된 이미지’라 불러왔다. 이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것은 죽음보다 두려운 일이다.

그런가? 끝까지 읽어보기로 한다.

어떤 이미지로 전시된 자기 자신에 대한 흡족함은 결코 지속 가능한 행복이나 기쁨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초콜릿이 주는 일시적인 쾌감이나 도파민에 불과할 뿐, 우리가 실제로 먹고 살아가야 하는 삶의 온전한 영역일 수는 없다. (…) 나는 우리 시대의 각자가 가장 절실하게 마주해야 할 진정한 전선은 그 어디쯤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삶을 되찾기 위한 전쟁일 것이다.

뭐 아주 잘못된 이야기는 없으니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가려는데 고개가 앞으로 굽지 않고 옆으로 갸우뚱 하고 넘어간다. 왜일까? 왜 전면적으로 수긍하기가 어려울까? 문화 자본 권력이 환상 속 가상의 현실에 대한 우리의 탐욕을 이용해서 삶을 뺏고 있지 않느냐는 이처럼 점잖고 강력하고 타당한 경고가 있는데?

왜냐면 여기서의 ‘탐욕’이란, 정말 탐욕이라기보다는, ‘갈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여기서부터는 사태를 좀 다르게 읽어 보자는 시도의 제안이다.

낙오에의 두려움인가, 결핍에의 탄식인가

청년 세대의 주요 담론이 각종 생활의 문제, 우울, 좌절, 증오, 혐오인데 비해 그들이 사용하는 인스타그램은 완전히 표백되고 정제된 끊임없는 여행과 핫플레이스, “커피 한 잔과 밥값으로 몇만 원씩”으로 점철돼 있다는 것은, 문화 평론가쯤 되시는 분이 보시기엔 영 앞뒤가 안 맞아 보이는 일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분이 분석해 본 결과, “그들은 스스로를 그런 방식으로 끊임없이 전시하고, 또 그렇게 전시된 이들 속에 있는 동안에만 온당한 곳에 있다는 느낌을 얻는” 것이다. 예전부터 이걸 상향 평준화의 경향이라고 불렀다는 글쓴이는 이어서 이렇게 덧붙인다. “이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것은 죽음보다 두려운 일이다.”

만약 이 분석이 맞다면, 인스타그램은 이를테면 소속감에 대한 강박적 추구가 고요하게 이루어지는 음습한 공포의 공간이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감지하고 있는 인스타그램의 센티멘트는 강박이나 공포가 아니다. “다시 가고 싶다”, “우리 언제 또봐?”, “여기 진짜 맛있었는데”가 주를 이루는, 결핍에 대한 한탄이다.

물론 인스타그램도 공개 계정이 존재하고 친구 개념이 있으므로 일대다의 방향으로 무작정 주어지는 화려하기만 한 별세계의 환상 그리고 그걸 부추기는 권력의 영향이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건 예컨대 트위터나 페이스북의 본질일 수는 있을지언정 인스타그램의 본질은 되지 못한다. 인스타그램은 그 태생부터가, 내가 선택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예쁜 세상 그 자체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을 본래 목적으로 사용 — 자기 근황 사진을 올려 친구들의 좋아요와 댓글 받기 — 하는 사람들 특히 청년들은 인스타그램을 무엇으로 사용하는가? 좋았던 순간의 회고를 위해 사용한다. 어디 여행 간 사진, 비싼 가게에 큰맘 먹고 가서 찍은 영상, 친구들과 본 공연의 티켓 인증, 하다못해 퇴근길 야경이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꽤 필사적인 동작이다. 사진 자체는 그 관광지에 도착한 하루 동안 오만 장을 찍어놔 둔 거지만, 그걸 일단은 외장하드에 갖고 있다가, 가끔 쳇바퀴 같은 직장 생활이 염증이 나서 빨리 돈 모아 다시 외국 나갈 생각을 하게 될 때쯤 그들은 그 사진을 꺼내어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것이다. “그 어느 나라의 어느 구석에 있는 마을이나 도시를 해시태그로 검색해도” 나오는 “그곳에서 웃는 청년”은, 그걸 올리고 있을 때는, 사실 별로 웃고 있지 않다.

아마도, 웃기는커녕, 한숨을 짓고 있을 것이다. 아 진짜 너무 생각난다 저기 진짜 좋았는데. 그래 나도 이렇게 사는 게 즐거울 때가 있었지. 다시 가고 싶다. 좀만 참자. 어 이친구가 댓글을 달았네? 답글 달아 줘야지. “그니까 ㅋㅋㅋ 현실은 내년까지 휴가0일^^…” 에휴 내일 출근하려면 자야지. 아 마라샹궈나 먹으러 갈까. 요전번에 마라탕 집 간 애가 누구였더라… 찾아볼까?

여기서 조금 정색하고 다시 물어봐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이런 기분에 젖는 것은 과연 지적받아야 할 잘못인가?

삶을 긍정하려는 편집의 시도인가, 허구적 망상의 강박적 추구인가

원문 글에서 인스타그램 사용자의 심리를 분석해 놓은 대목 중 가장 동의하기 어려운 것은 이 부분이다.

실제로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사진들을 계속 보면 현실감각을 묘하게 잃어버린다. (…) 삶이란 잘 정돈되고 단정하게 꾸며진 홈 인테리어의 순간, 잘 차려입고 멋진 공간을 거니는 순간, 아름다운 야경을 배경으로 커피를 마시는 순간, 수영장에 몸을 담그고 칵테일을 마시는 순간, 어느 햇빛 드는 오전 따끈따끈한 브런치가 나온 순간으로만 구성되는 듯한 착각을 느끼는 것이다.

안 느끼는데. 엄밀히 말하면, ‘왜 저게 내 일상이 되지 못하나’ 하는 한탄이야 느끼지만, 그 강렬한 감정이, 반드시 ‘이건 내 일상이(어야만 하는 것이)야’라는 착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유를 들어, 사진 앨범을 만든다고 생각해 보자. 그건 아무 문제가 없다. 매일 사진을 찍고 현상을 해서 앨범을 추가해 나간다면, 그건 좀 유난스러운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앨범 속 돌사진을 지금 모습과 헷갈려 한다면 그건 분명히 문제다. 자, 그러면 청년들의 인스타그램 활용성은 이 중 어디쯤에 위치해 있을까? 나는 대략 중간 어디쯤이라고 본다. 좀 유난스럽긴 하지만, 이상하게도, 인스타그램이라는 사진 앨범 만드는 유행이 퍼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다들 앨범 속 자기가 실제 자기라고 믿고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일까?”는 영 좋지 않은 질문이다. 대다수가 사진 앨범 중독 말기 증상을 보이고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필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왜들 갑자기 이렇게까지 사진 앨범 만들고 꾸미고 돌려 보기에 열을 올리게 되었을까?” 그건 짐작 가는 데가 있다. 사람은 사는 게 힘들어지면 사진을 꺼내 보곤 하는 것이다.

인스타그램 피드를 눈팅만 하고 있는 내 감상을 말하자면, 다들 얼마나 사는 게 힘들길래, 이렇게까지 화창하고 산뜻하고 행복했던 기록(환상이 아니라 기록임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싶은데)을 필사적으로 규칙적인 주기에 맞추어 쉼 없이 자기 피드에서 복각하고 있느냐는 생각이다. 다들 뭔가가 절실히 필요하고 목이 말라서, 그걸 시각적으로나마 해소할 수 있는 사진을 찾고, 보고,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뭔가 문제가 있다. 하지만 그 문제가 각 사람의 개별 문제일 리는 없다. 이렇게 많은 각각의 사람들이 좋았던 순간을 모아 놓은 사진 앨범을 자꾸 품에서 꺼내어 보고 서로 돌려 보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다면, 우리는 그걸 보고 혀를 차고 지나가면 되는 걸까? 어쩌면 지금 우리가 어떤 모자를 쓰고 있는 건지 확인해 봐야 하는 건 아닐까? 무슨 전쟁 무슨 방어선 경계병들에게 마지막으로 지급된,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방탄모 같은 게 우리에게 씌워져 있을지, 알 게 뭔가?

참호 군인

삶의 고통은 상기되어야 하는가, 해소되어야 하는가

전쟁이라고? 그렇다. 만약 우리가 지금 전쟁의 최전선 어디 참호에 배치되어 있고, 전쟁이 다음 주에 끝나니 마니 하는 소문이 매일 바뀌며 들려오는 곳에서 하루하루 개밥 같은 식량으로 연명하고 있다면, 당장 나라도 사진 앨범을 — 없으면 단 한 장이라도 아니면 누구한테 부탁해서 그림으로라도 그려서 — 추억과 소중한 사람의 얼굴을 박제해 놓고 그거라도 보면서 버틸 것 같다.

하긴 따지고 보면 그렇다. 그럼 전쟁이지 뭐겠냐고. 투표권을 받기도 전에 전교 석차를 받았으며, 그 석차에 따라서 “합격률”(즉, 생존률)이 더 높은 학과에 배정되었고, 어찌어찌 세상에 나와 보니 아무도 자기 생존을 보장해 주거나 생존 요령을 지도해 주지 않고 사방에서 친구와 동기들이 나가떨어지고 있는데, 대뜸 ‘살고 싶으면 이래라 저래라’ 하는 말이 쩌렁쩌렁 울리는 곳이라면… 그게 전쟁터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무슨 자유 대한민국이라도 되는가?

좀 과장한 감은 있을지 모르되 이게 소위 “가장 적은 파이를 손에 쥔 청년 세대가 (…) 가장 거대하게” 느끼고 있다는 “삶과 이미지의 간극”의 실제이다. 그들은 훨씬 더 강렬하게 과장하여 “헬조선”이라고 부른 바 있다. 지상이기는 커녕 지하의 ‘헬’이고, 자유 대한민국이기는커녕 ‘조선’인 것이다. 이렇게까지 힘들게 경쟁적으로 악착같이 살아야 할 리가 없는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해야만 하는 세상, 그게 지금 청년들이 사는 한국이다.

그렇다면, 전반적인 차원에서 “위안의 이미지를 제공하는 것들에 돈과 시간을 바칠 것”이 정말 “이 시대의 지상 명령”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위안의 이미지라도 필요한 이 ‘헬조선’에서 그것에마저 의존하지 말라고 하는 요구는, 좀 너무하는 것이거나 뭘 모르고 하는 이야기가 된다. 이들이 엿 같은 회사에서 개 같이 번 돈 정승같이 한 번 써보겠다는데, 그 기념 사진 좀 모으겠다는데, 그걸로 이렇게까지 훈장님께 야단맞을 일이냐 하는 것이다.


최근 트위터에서 한 번 돌았던 것으로, “진짜 탈덕한 사람들”에 대한 농담이 있다. 어떤 덕질 분야를 정말 끊은 사람, 그것의 마수와 중독 증세로부터 정말 벗어나는 사람들은 구구절절 “나는 이제 더이상 이걸 사먹지 않을 것이고 이건 아주 해롭고” 운운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자기 인생이 재밌어져서 잘 놀고 잘 살다가 더 이상 트위터에 안 들어오는 사람이라는 거다.

인스타그램은 어떨까? 만약 청년들의 삶이 국민 소득 2만 불 국가에 걸맞게 “상향 평준”이 정말로 되어서, 다들 매주 한 번쯤 큰맘 먹고 비싼 것 사먹거나 2년에 한 번쯤 지구 반대편에 놀러 나갔다 오는 일이 흔해지면, 절대 다수가 예쁘고 말쑥한 집안 인테리어를 가꿀 수 있을 때쯤이 되면, 그때도 우리는 그걸 일일이 사진 찍어서 전시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냥 그 삶을 즐기기 바빠서 아예 인스타그램을 졸업하게 될까?

한국이라는 맥락에 있어서, 사람들이 인스타그램에 맨날 자기 처지와 다른 무엇인가를 올린다는 것이 온전히 정당한 비판이 되기는 어렵다고 내가 생각하는 이유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친숙하고 흔한 것을 사진으로 찍지 않는다. 사람들이 인스타그램에 달콤하고 반짝거리는 것만 올리는 이유는, 자본이니 권력이니 개인의 착각이니 하는 것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냥 그게 사람들 인생에 흔하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높다.

해야 할 일은, 좀더 살 만하고 달콤하고 반짝거리는 인생이 좀더 흔해지도록 다함께 힘을 합쳐서 세상의 모순을 혁파하고 경쟁을 완화하며 안전하고 자유로운 공동체를 지향해 나가는 것이다. 그 과업이 정말 완수되면 더 이상 ‘왜 다들 정말 맨날 여행 다니고 놀러 다니는 것도 아니면서 맨날 그런 사진만 주고받느냐’ 혀를 찰 일은 없어진다. 이를테면, 그렇게 참호전을 끝내야, 다들 꺼냈던 사진 앨범을 품에 넣고 집으로 돌아가 가족의 품에 안겨 살 맛 나는 인생을 되찾을 수 있게 된다.

스펙터클 이론은, 이런 맥락에도 정당한가

사실 이 글은 기 드보르라는 철학자한테 써 보라고 해도 대충 비슷하게 썼을 법한 논지와 구성으로 되어 있다. 드보르에 따르면 대중 문화 사회에서 우리는 주어지는 구경거리(spectacles)를 소비하는 구경꾼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며, 구경꾼 따위는 삶의 주인이 아니며, 그러므로 정신 똑바로 차려서 자기 삶을 되찾아야 한다고 한다. 와, 정말 비슷하지 않은가? 이 글은 심지어 그 결론까지 바로 그 “스펙타클 사회”론과 매우 흡사하다.

어떤 이미지로 전시된 자기 자신에 대한 흡족함은 결코 지속 가능한 행복이나 기쁨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초콜릿이 주는 일시적인 쾌감이나 도파민에 불과할 뿐, 우리가 실제로 먹고 살아가야 하는 삶의 온전한 영역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 시대는 전방위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이미지들을 주입하고, 그 이미지를 좇으며, 그 이미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속삭인다. 결국 그 이미지 속에 살아야만 한다는 강박을 심어놓는다.

그리고 내가 여태까지 쓴 소리는, 누가 강박을 갖고 싶어서 갖는 줄 아느냐는 것이고 말이다.

사실 스펙터클론은 70~80년대 미국 위주의 호황기 소비 대중 문화에 대한 비판이지, 청년의 생존 같은 것이 논의의 대상이 되던 시기의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청년의 생존이나 복지 수준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는 대단히 부끄럽게 후퇴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상황의 이런 사람들에게 과연 드보르의 잣대를 대는 것은, 과연 합당한 대우일까?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면 청년들은 어찌해야 할까. 이제 청년들은 ‘남들의 눈 신경 쓰지 않고 삶을 되찾는’ 노력을 추가로 해야 하는 것일까? “노력하지 않고 성과를 이루고 싶다”라고 농담조로나마 간절하게 빌고 있는 그들에게, 자기 옛날 좋았던 순간 추억 사진 정도는 음미하게 해 줘도 좋지 않을까? 사실은 변변한 참호조차도 없어서 각자 삽을 들고 구덩이를 파 웅크리고 있는, 이 지긋지긋한 신자유주의 전쟁의 최전선에서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