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광용의 옐로우카드’라는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이 프로그램은 KBS에서 간판 스포츠 캐스터로 내세우고 있는 아나운서 이광용이 진행하며, 축구와 야구가 중심인 30분짜리 토크쇼다. 축구나 야구 좋아하는 사람들이면 알 법한 한준희 해설위원이나 장성호/봉중근 해설위원 등이 방송 주제에 따라 번갈아가며 나온다.
이 프로그램은 유튜브가 알려지기 전인 2008년부터 인터넷 방송으로 시작했는데, 그 당시에 스포츠를 주제로 토크를 한다는 것은 색다른 시도였다. 새로움 못지않게 묵직함도 있었다. 축구 편에서는 K리그가 왜 사람들에게 인기 없는지에 대한 애정 섞인 비판이 있었고, 야구에서는 왜 떨어질 팀은 계속 떨어지는지에 대한 다양한 비판과 함께, 무관심 속에 묻혔던 프로야구 역사를 되짚어 보기도 했다. 그리고 ‘피묻히기’라고 해서 국내외 프로야구와 축구 리그에서 이번 시즌 우승은 어떤 팀이 할지 예측하기도 했다. (물론 맞은 적보다 틀린 적이 더 많다.)
즐겨보는 시청자 층이 꽤 두텁고, 역사도 제법 긴 프로그램이지만, 프로그램이 오늘날까지 이르는 데에는 많은 부침이 있었다. 진행자는 이명박근혜 정부가 주도했던 KBS 농단에 적극적으로 저항했기 때문이다. 2012년에는 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진행자가 징계를 받아 프로그램 방송이 중단 되다가 몇 달 뒤에야 시즌2를 통해 볼 수 있었고, 시즌2 후반에는 방송 시간이 15분 이내로 줄더니 얼마 안 가 종영해버렸다. 진행자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방송시간 축소와 종영이 결국 사장에 반했기 때문 아니겠느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렇게 완전히 사라질줄 알았던 옐로우카드는 기나긴 2017 KBS 파업(이때도 당연히 진행자는 파업에 참여했다.)을 지나 고대영 사장 퇴진과 양승동 사장 선임 이후 부활했다. 2018 아시안게임 전에 이름 없는 파일럿 방송으로 슬쩍 간을 보다가 2018년 10월 5일, ‘옐카’라는 이름과 함께 K리그 팬들 사이에서 제법 논란이 되었던 ‘K리그 인기 거품인가 진품인가’ 편으로 돌아왔다. 뭔가 토크 내용이나 화면 디자인에서 아재스러움이 느껴지게 되기는 했지만, 활발한 비판과 밀도 있는 이야기는 여전했다.
9일에 올라온 영상에는 옐카 사상 최초로 한국 농구(KBL)를 다뤘다. 게스트는 ‘농구박사’ 손대범 기자와 박세운 기자가 나왔다. 이 둘은 KBL이 왜 인기를 못 끄는지에 대해 냉철하게 원인을 진단하고, 자신들이 생각한 농구 인기 부흥책을 이야기했다. 나는 농구에 대해 그렇게 크게 관심이 없지만(사실 KBO리그 빼고 다른 스포츠에 별로 관심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옐카답게 비판할 점과 개선할 점을 잘 지적한 좋은 방송이었다고 생각한다. 방송이 유튜브에 올라온 첫 날과 둘째 날에 댓글 반응들은 꽤 호의적이었다.
자 그러면 여기서는 일단 ‘옐카’라는 게 있고, 스포츠 얘기 재밌게 하는 방송이라는 점, 그리고 지난 9일의 방영분이 괜찮았다는 정도를 기억하고 넘어가자. 그런가 하면, 요 며칠 전에는 이런 방송도 있었다.
문재인 정부 2주년을 맞이해 KBS가 진행한 특집 프로그램 ‘대통령에게 묻는다’는, 당초 예정된 시간을 넘겨 100분 가까이 진행되었다. 대담은 예상과 달리 공격적이었고, 문재인 대통령이 추진한 각종 정책들에 대해 비판하는 질문으로 가득했다. 나는 시청자이자 국민으로서 이 프로그램을 흥미로운 마음으로 지켜봤지만, 끝난 뒤에는 그 대담 자체에 대해서 아쉬움을 많이 느꼈다.
일단 대담 주제의 폭이 넓지 않았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대담에서 북한, 정치권, 소득주도성장 외의 문제들은 크게 다뤄지지 않았고, 대화 내용들도 거시적인 내용보다는 지엽적이거나 이미 이야기가 오고간 바 있는 내용이 많았다.
- 북한 미사일 발사는 유엔 안보리 재제 위반이다
- 조국 민정수석은 정치권 인사로 나서지 않는다
- 박근혜 사면은 대법원 판결 이후에 검토해 보겠다
- 최저임금 인상은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
- 적폐 청산은 계속된다
대담 핵심 내용을 내 기억대로 요약하자면 대략 이러한데, 북한 미사일 발사에 대한 반응 빼고는 이미 들은 내용들이다. 개인적으로 기대했던 정치/사법 개혁과 여성, 청년 문제에 대한 이야기는 슬쩍 지나가든지, 아예 나오지 않든지 했다.
대통령 말을 중간에 끊는 것도 잘 이해가 안 갔다. 현장에서는 방송 시간 문제나 대통령이 내놓은 대답이 이미 중복되기 때문에 끊는 게 낫다고 판단했겠지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자신의 입장을 모처럼 밀도 있게 전달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답변이 길어졌을 테고, 국민 입장에서도 그 답변을 다 듣고 판단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기자가 자주 답변을 끊다 보니 대화 흐름이 끊기거나 대통령이 하고 싶은 말을 다 못 했고, 이러다가는 진짜 싸움 날지도 모르겠다는 느낌도 받았다. 축구 경기로 치면 서로 신나게 태클만 주고 받은 게임이었다.
소통이 부족하다는 지적과 관련해 5‧18 기념식을 운운하면서 질문한 것은 듣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소통 부족을 지적하고 싶었다면 차라리 공약이나 대통령이 주장했던 것, 혹은 5‧18과 상관없는 대통령의 과거 행적을 인용하는 게 백 번 옳다. 안 그래도 광주민주화운동 폄훼 논란이 있는 상황에서 질문 의도가 대통령을 이념적으로 공격하려는 것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다. 이건 진짜 옹호를 해줄 수 없다.
그래도 기자는 대담 서두에 밝혔던 의도를 잘 반영했던 것 같다. ‘지지자나, 지지자가 아니거나, 지지자였는데 철회했거나, 지지자가 아니지만 향후 지지자가 될 수 있는 사람 등’의 다양한 입장을, 다시 말해 국민의 시선에 대입해 질문하겠다는 의도 말이다. 다소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은 그때의 질문이 지지자가 아닌 사람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어느 정도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다. 총평을 하자면, 다양한 국민의 시선에서 질문을 하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대통령에게 공격적으로 질문한 것은 수긍이 갔다. 대화 주제 자체가 폭넓지 않고 대답도 뻔한 게 많아 썩 만족스럽지 못했을 뿐이다.
도대체 서로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두 프로그램의 감상평을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유가 뭐냐고? 왜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냐고? 의식의 흐름 기법을 쓴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내가 봐도 두 프로그램은 전~혀 상관이 없다. KBS라는 공통점만 있을 뿐, 제작 부서며 진행자, 프로그램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 등이 서로 완전히 다르다. 옐카는 인터넷 방송이다 보니 스포츠 마니아들만 즐겨 보고, 대담은 KBS 독점 생중계에 이어서 방송이 끝난 이후에도 여러 언론이나 정치권에서 물고 뜯고 씹고 있다. 그런데 둘의 연결고리는 전혀 엉뚱한 곳에 분명 있다.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부터인데, 아까 ‘옐카’ 9일 방영분을 재밌게 봤다고 한 것 기억나시는지? 사실 나는 그 에피소드의 댓글 창을 보고 놀랐다. 그곳에서 이광용 아나운서는 “적폐” 그 자체가 되어 ‘기레기’, ‘친일파’, ‘일베충’, ‘머리 검은 짐승’, ‘삼성 장학생’ 등등으로 매도되고 있었고, 구독이나 시청을 끊겠다는 사람도 많았다. 당황스러웠다. 보면 알겠지만, 해당 방영분에는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런 반응이 나왔을까? 이유는… 그 전날 ‘KBS 대통령과의 대담’에서 ‘건방진’ 태도로 우리 위대하신 문재인 대통령의 치적을 알리기는커녕 독재자라도 되는 양 공격을 한 송현정 기자를 이광용이 선배로서 그리고 “동료 기레기”로서 ‘옹호’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걸 참을 수 없었던 깨어 있는 촛불 시민 문빠들께서 기레기 이광용을 처단하기 위ㅎ…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와 이거 실화냐?
참 할 말이 없다. 문빠들이 별 시답잖은 이유로 여기에서 특정 사람을 조리돌림할 줄은 몰랐다. 문제(?)의 SNS을 보면 이광용이 한 것은 김경래 기자 의사에 동조해준 것뿐이다. 도대체 뭘 잘못했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잘못했다 쳐도 댓글 창에서 난리를 치면 안 되는 것이다. 옐카는 정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스포츠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 대신 온갖 이광용 성토글, 문재인 찬양글 같은 정파적인 댓글로 댓글 창을 채우는 것이 말이 되는가.
대통령과의 대화가 끝난 이후 문빠들은 옐카말고도 KBS 시청자 게시판과 청와대 국민청원을 점령하고 행패를 부렸다. 그들이 분노한 이유는 단지 송현정 기자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 하나다. 여기에는 문재인에 대한 비판은 어떤 것도 수용할 수 없으며, 문재인을 조금이라도 공격만 한다면 ‘촛불정권’의 적이라는 옹졸한 편 가르기 사고가 보인다.(왜 문재인만이 촛불 정신을 계승한 사람인가를 따지고 싶지만, 거기까지 가면 이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다.) 옐카 댓글 창에서는 지난 2017년 KBS 파업 때 지지해줬는데 어떻게 송현정을 옹호할 수 있냐며 배신감을 토로하는 댓글이 종종 보였다. 마치 같은 편에게 뒷통수를 맞았다는 태도였다. 머리 검은 짐승이라는 요즘 지지층 사이에서 핫한 유행어(?)도 자주 볼 수 있었다.
문빠들 덕분에 KBL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오고 갈 거라 예상했던 댓글 창은 이 글에 다 옮겨 적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진행자 개인에 대한 비방으로 가득 찼고, 활발한 토론을 원했던 시청자들의 목소리는 묻혔다. 문재인 대통령조차 이번 대담에서 불쾌한 것은 전혀 없었으며, 송현정 기자가 잘못한 것은 없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를 위해서 이 짓거리를 벌였는가? 이렇게 잘나신 문빠들은 또 일반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