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녕 이대로 사투리는 표준어에 밀려 사라져야 하는가?

기어이 ‘바르고 고운 말’의 세상이 왔다


정확히 언제라고 콕 집을 수는 없지만 요즘 들어서 부쩍 그러는 것은 확실하다. 아버지랑 대화하면 가끔씩 몇몇 마디가 거슬릴 때가 있다. 혼잣말이나 고향 사람들과 대화할 때 그런 현상은 더욱 심해진다. 다른 건 아니고, 이야기 중간중간에 ‘~했는가’, ‘~부렀고’ 같은 어미를 남도 섬사람 특유의 억양과 곁들여 쓰는 것이었다.

나는 사투리가 왜 거슬린 걸까?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분명 섬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오늘날 아버지는 완전한 뭍사람이다. 성인이 되자마자 고향을 떠나 전국 사방팔방을 돌아다니다 서울에 정착했고, 올해는 애써 뿌리내린 서울에서 등 떠밀려 천안으로 내려온 지 25년째다. 고향보다 고향 바깥에서 보낸 시간이 두 배 더 많음에도, 경부고속도로가 내려다보이는 충청도 어느 시골에 우뚝 솟은 아파트에서 바다 내음을 뿜어내니 어색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억울함 때문이다.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 쓸 수 있는 말은 오로지 표준어였다. 어휘력이 급격히 늘어난다는 초등학교 입학 무렵, 아버지 고향에 갔다 오고 나서 혹은 동네 어른들을 만나고 나서 멋모르고 사투리를 쓸라치면 아버지는 나를 혼구녕냈다. 투박하고 늘어지는 말 대신 ‘바르고 고운 말’을 쓰라면서.

그때는 무슨 의미인지 모른 채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고, 표준어가 입에 붙은 지 한참 지난 지금까지도 은연중에 신경을 쓴다. 아버지 또한 ‘거석’이라는 전남 동부 지역에서 거시기로 쓰는 말만 빼놓고는 표준어만을 잘 써왔다. 이런 노력이 통해서였는지 지금 자식들은 표준어로만 말하고 쓰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어째서인지 거꾸로 가고 있었다. 나를 그렇게 혼내놓고서 본인은 자유롭게 사투리를 쓰다니. 칫.

이렇게 말하면 순전히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탓에서만 내가 사투리를 안 쓰게 된 것 같지만, 그것만으로 내가 사투리를 안 쓰게 된 것은 아니다. 천안은 분명히 충청도다. 하지만 충청도 사투리를 듣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천안을 내가 태어났을 때보다 인구가 두 배 늘어 어느덧 70만 명을 눈앞에 둔 대도시로 만든 건 나를 포함해 충청도 태생이 아닌 사람들이었다. (이래서 요즘 들어 천안을 ‘경기도’ 도시로 생각하는 사람이 제법 있나 보다.)

어린 시절 친구들은 명절만 되면 서울, 부산, 광주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천안이 고향인 사람은 드물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표준어는 누가 정한 것도 아니었는데 국룰이되었다. 애들에게서 그리고 선생님들에게서 충청도 사투리를 듣기는 어려웠다. 말투가 심한 애들은 어쩌다 한두 명만 있을 뿐이었고, 그런 애들조차도 어휘는 교과서가 가르친 그대로였다. 어휘마저 완벽하게 충청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내 또래를 찾은 곳은 내가 4년 동안 낑낑대며 다녔던 서울 변두리에 있는 한 대학이었다.

초중고 시절을 충청도 사투리를 제대로 접하지 못한 채 보낸 내게 충청도 사투리는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옛날 옛적 이야기를 듣는 느낌 같았고, 도시화되기 이전 천안의 흔적 같은 같은 것이었다.


사람은 단일한 종족이기는 하지만, 환경에 따라 피부색부터 체형, 정서, 성격 등 많은 것이 달라진다. 말도 마찬가지로 한반도 토박이는 한국어라는 단일한 언어를 쓰는 듯하지만, 지역 곳곳에서는 그 지역의 모습을 닮은 사투리라는 것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 배운 말들이 그 사람에게는 말의 뿌리가 된다.

아버지는 남해 특유의 구불구불한 해안선, 풍요로운 황토와 푸른 바다를 보고 자랐다. 그곳에 좋은 기억이 많고 지금도 그 땅을 그리워하는 아버지한테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전라도 사투리가 굳건히 자리 잡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나는 주민등록상 출생지 서울도 아닌, 아버지가 항상 그리워하지만 어쩔 수 없이 등 돌린 아버지의 고향도 아닌, 이곳 천안을 내 고향으로 생각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내 말의 뿌리는 표준어가 섬기고 받드는 저 멀리 서울에 깊숙이 뻗어있다. 내가 충청도 고유의 억양을 내면 자연스럽지 않고 서울 사람들이 흉내 내듯이 하는 것처럼 나온다. 구사할 수 있는 범위는 ‘~겨’, ‘~겄다’, ‘그려’가 전부고, 이마저도 어쩌다 혼잣말로 한 번씩 아니면 이따금 동네 친구들끼리 친근감을 나타내고 싶을 때 일부러 써야 나온다. 충청도 역사, 지리 등 많은 것이 익숙하지만, 차마 사투리는 입과 손에 붙지 않는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을 써도 될지 모르겠으나 나만 이런 일을 겪는 것은 아니다. 지방 중에서 서울의 마수가 가장 많이 뻗치는 천안에서 사투리 쓰는 젊은이는 희귀종에 가깝고, 대전이나 청주같이 충청도를 상징하는 제법 큰 도시들 또한 천안보다는 정도가 약하지만 그런 현상을 겪는다. 그리고 방언이 희미해지는 흐름은 금강을 넘어 전국 사방팔방에서 슬며시 퍼지고 있다.

지금까지 대서울은 권력과 돈의 손을 빌려 표준어를 필요 이상으로 우악스럽게 지방에 들이밀었고, 지방은 속절없이 당하기만 했다. 토박이들은 선조들에게 대대로 물려받은 말을 스스로 ‘고치고 바로잡기’를 하거나 사투리를 물려주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 결과 표준어는 지방 사람들에게 ‘신어’가 되었다.

그래. 표준어 덕분에 소통하기는 참 편해졌다. 적어도 ‘정구지’가 뭔 뜻인지 몰라서 ‘시절’ 될 일은 사라졌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편리함이 마냥 유쾌하지는 않다.

우리는 특정 지역을 생각할 때 곧장 사투리를 떠올리곤 한다. 충청도의 여유로움, 전라도의 정감 넘침, 경상도의 강인함, 강원도의 순박함, 제주도의 활기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내 생각에 사투리가 사라진다는 것은 말 하나가 사라지는 현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첩첩산중, 혹은 육지에서 저멀리 떨어진 섬에서 사는 사람조차 그들에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지역 정체성은 온데간데없이 깍쟁이스러움, 현대성, 획일성만 남는 것을 의미한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이 글을 다 쓰고 나서 맞춤법 검사기를 돌렸을 때 검사기는 기어이 사투리를 ‘입력 오류’나 ‘교정’할 단어로 골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