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바꾸자, 선거제! ①] 한국 국회의원 선거제도는 어떻게 변했나

우리의 선거제를 찾아서


지난해, 우리는 석 달 간격을 두고 선거를 두 번씩이나 치르는 동안 꼴사나운 모습을 제법 지켜봐야 했습니다. 역대급 비호감 선거라는 오명 뒤에 숨은 당사자들, 한자리 꿰차려 높으신 분들 마음만 바라보는 정치인들, 단지 상대보다 한 자리 더 얻어야 한다는 마음에 진영 논리와 정쟁을 부추기는 주변인들 등등.

이들 덕분에 선거는 꽃밭이나 잔치가 아닌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정치판에서 통합과 화합이라는 단어가 선거 이후 사라졌고, 바르고 고운 말이 오고 가야 할 국회에는 힘자랑과 험한 말만이 남았습니다. 정치판은 다 썩었다는 말이 어느 때보다도 와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오늘 진 태양이 다음 날 아침에 동쪽에서 뜨듯이, 일상은 계속되고 선거는 돌아옵니다. 다음 해에 총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치에 관심을 끊고 싶다가도, 우리는 그날이 오면 또다시 투표장에서 어떤 후보/정당에 표를 줄지를 고민할 것입니다.

이왕 당신이 누군가를 선택한다면, 그리고 당신의 목소리가 저기 보이지 않는 높은 곳에 있는 것 같은 정치인들에게 닿으려면, 저는 국회의원 선거제 개혁이 더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민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거대 정당이 더 많은 이익을 보는 선거제도 때문에 국회, 그리고 정치판이 이렇게 어지러워졌다고 보기 때문이죠. 그러면 어떻게 바꾸냐고요?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

인생의 교훈 같은 말이 선거제 역사에서도 얼추 들어맞는다.

1948년 5월 10일, 한반도에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라는 것이 처음 벌어졌다. 첫 선거라는 의의도 있지만, 정치 구조를 결정하는 ‘정초선거’라는 의미도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보수 정당 양당제가 이 선거를 계기로 틀을 갖췄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우리에게 익숙한 선거제도가 등장한다. 한 선거구에 한 명을 뽑는 ‘소선거구제’와 1위 후보가 2위 후보보다 한 표만 앞서도 당선이 되는 ‘단순다수제’ 말이다. 오늘날과 차이점이 있다면 선출되는 의석 200석 전부에 단순다수 소선거구제가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왜 하필이면 단순다수 소선거구제였을까? 이유를 들려면 여러 가지가 있다. 법을 만들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 식민 지배에서 갓 벗어난 상황이어서 모든 면에서 매우 낙후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선거라는 개념 자체가 낯선 것이었고, 선거도 결국에는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선거제도가 단순하면 사람들도 이해하기 쉽고, 돈도 덜 든다. 단순다수 소선거구제는 근대 민주주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을 정도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면서 단순한 선거제도였고, 그때 사정에 딱 맞았다.

물론 이런 환경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선거법을 만들 때 당시 남한을 통치했던 미군정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대통령제며, 소선거구제며 하는 것들이 다 미국이 하는 것이고, 대한민국의 각종 제도를 정비하느라 분주했던 미군정은 생판 인연도 없는 땅에다가 이상한 선거제도를 심을 수는 없을 테다.

여기에 미군정과 그들에게 결탁한 세력의 음모도 숨어 있다. 해방 직후 우위를 차지했던 정치 세력은 공산주의(김일성, 박헌영), 중도파(여운형, 김규식), 임시정부 출신 민족주의 우파(김구) 세력들이었다. 공산주의 세력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결국 북으로 쫓겨났고, 나머지 세력은 신탁통치나 남한 단독 정부 수립 등 여러 차례 충돌 끝에 미군정과 멀어진 데다가 지도자 암살로 힘을 잃었다.

국내 독립운동가와 자본가 중심으로 결성한 한국민주당(한민당)과 이승만은 그 벌어진 틈을 비집고 들어가 미군정에 신임을 얻었고, 미군정은 이들이 독점적으로 정권을 잡아야 남한 단독 정부가 안정되리라 생각했다. 의도대로 되려면 양당제를 유도해야 했고, 소선거구제는 그런 그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앞서 남한에 남아있던 중도파와 민족주의 우파는 출마를 포기하거나 소극적이었고, 한국민주당은 의지와 조직력, 자금력 등에서 다른 정치세력보다 우월했다. 막상 결과는 무소속 전성시대라는 평가가 나올 만큼 시원치 않았지만, 이후 같은 규칙으로 두세 차례 선거를 더 하면서 한민당 세력과 자유당-이승만은 양강 구도를 형성하며 ‘큰 그림’을 그린 효과를 누린다.

제1/2공화국 시기 선거제도. 제1공화국에서는 단순다수 소선거구제로만 선거를 치렀고, 4. 19혁명으로 수립된 제2공화국에서는 양원제가 도입되면서 상원과 하원 간 선출 방법을 달리했다. (여/야당은 선거 당시 대통령의 당적이 기준, 과반을 차지한 경우 밑줄 표시.)

선거제도를 주무른 군사정권

전쟁, 부정선거, 혁명… 짧은 시간 동안 온갖 일이 닥치며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는 동안 희한하게도 소선거구제 선거제도는 별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이상한 평화를 깨뜨린 것은 군사정권이었다. 군사정권은 비록 힘으로 정권을 잡기는 했으나 민주주의 국가라는 구색을 버리고 싶지는 않아서 선거를 어떻게든 치렀다. 그런데 그냥 치르면 자신들이 재미를 못 보니까 안정적 집권에 유리한 방향으로 규칙을 바꿨다. 자유롭고 공정해야 할 선거가 군사정권에 권력 안정과 정당성 확보를 동시에 안겨주는 도구로 떨어진 셈이었다.

박정희 육군 소장이 민간인이 되어서 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그 한 달 뒤인 1963년 11월 26일에 6대 총선이 치러졌다. 이때 처음 등장한 것이 비례대표의 전신이 되는 ‘전국구’다. 총 175석 중 약 1/4인 44석이 전국구에 할당되었다.

정당이 지역구에서 얻은 표의 전국 득표율이 5% 이상, 그리고 지역구에서 3석 이상 확보한 상위 세 정당에만 전국구 의석을 배분했다. 의석 배분 요건을 갖춘 정당에만 의석을 배분하는 ‘봉쇄조항’은 지금도 있지만, 정당 득표율 ‘3%’ 이상 ‘또는’ 지역구에서 5석 이상이면 비례 의석을 주는 지금과 비교하면 꽤 빡빡하다. 여기에 제1당이 득표율이 50%를 넘기지 못해도 전국구 의석의 절반을 1당에 배분하는 특례 조항을 뒀다.

이렇게 선거제도를 설계한 이유를 두고 공식적으로는 ‘양당제’를 지향해서라고 나왔지만, 속셈은 너무 뻔했다. 보통 소수정당에 유리한 제도인 비례제를 군사정권은 정권 강화 도구로 잘 써먹었고, 비례대표제는 잘못된 선거제도라는 억울한 오명을 쓰며 역사를 시작한다.

5. 16 군사정변 이후 수립된 제3공화국 시기 선거제도. 이때 비례대표제의 전신이 되는 전국구 제도가 처음 도입되었다. (여/야당은 선거 당시 대통령의 당적이 기준, 과반을 차지한 경우 밑줄 표시, 의원정수 아래 숫자는 ‘지역구+전국구’ 의석 수)

노골적인 국회 길들이기

하지만 애써 만든 선거제도는 10년을 가지 못했다. 끝내 유신이라는 독재 체제로 접어든 박정희 정권은 자신들이 만든 선거제도를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국회를 통한 대화와 타협 정치를 시간 낭비로, 야당을 반대만 하는 쓰레기 집단으로 여겼던 박정희는 유신 뒤에 노골적으로 국회를 ‘통법부’로 길들이려고 노력한다.

전국구가 사라지고, 총 의석 219석 중 73석을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구성된 유신정우회에 배분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체육관에 모여 대통령을 뽑는 기구다. 유신정우회에 소속된 국회의원은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들이었다.

여기에 한 선거구에서 국회의원을 두 명 뽑는 중선거구제가 도입되었다. 이것 또한 여당 의석 확보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소선거구제하에서 여당이 인기 없는 지역구, 특히 도시 지역은 여당 후보 당선이 어렵다. 그래도 그런 지역에서 여당은 2등을 놓치지 않았는데, 그런데 중선거구제에서는 2등도 당선이 된다. 이에 따라 여당은 지역 상관없이 의석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길이 생겼고, 선거 결과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석을 합해 전체 의석의 2/3를 차지함으로써 국회를 여당이 완벽히 장악하게 되었다.

오래 못 간 유신을 대체해 새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 또한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노골적이었던 유신정우회를 없애고 전국구 제도를 부활했지만, 지역구에서 가장 많은 의석을 얻은 정당에 전국구 의석의 2/3를 몰아줌으로써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여기에 중선거구제는 그대로 유지되면서, 신군부가 만든 제5공화국 헌법하에 처음 치른 1981년 3월 25일 11대 총선에서 여당 민주정의당은 넉넉하게 과반을 획득했다. 사실 야당이라고 해 봤자 정보기관이 창당 자금을 대고 후보를 공천했던 관제 야당이었기 때문에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군사정권이 아무리 감추려 해도 국민 불만을 잠재울 수는 없었고, 그 불만은 6월 항쟁으로 모여 민주화를 이루게 된다.

유신 헌법 제4공화국과 신군부 쿠데타로 수립된 제5공화국 시기 선거제도. 대통령이 임명한 국회의원들은 유신정우회라는 교섭단체를 꾸려 여당으로 활동했다. 제5공화국에서는 정보기관이 야당을 통제해 야당이 야당으로서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여/야당은 선거 당시 대통령의 당적이 기준, 과반을 차지한 경우 밑줄 표시, 의원정수 아래 숫자는 ‘지역구+유신정우회/전국구’ 의석 수)

더욱더 민주적인 선거제도를 향해

단순다수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 혼합이라는 큰 틀은 민주화 이후 첫 총선이자 헌정사상 첫 여소야대 정국을 이끈 1988년 13대 총선에서 도입된 이래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표가 되도록 같은 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등가성과 정당이 표를 받은 만큼 의석을 얻는다는 비례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한 발짝씩 나아가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비례대표제는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13대 총선만 하더라도 지역구에서 5석 이상 차지한 정당에만 지역구 의석 비율대로 의석을 배분했고, 제1당이 득표율이 50%를 넘기지 못해도 전국구 의석의 절반을 1당을 보장하는 등 여전히 여당에 유리했다. 14대 총선에서는 제1당 절반 보장 조항이 삭제되었고, 15대 총선에서는 기존 조건이나 유효투표 총수의 3% 이상을 득표한 정당에 비례대표 의석 배분 자격을 주고 지역구 선거 득표 비율에 따라 배분했다.

그런데 앞의 문장에서 이상함을 못 느꼈는가? 이때까지 비례대표 의석 배분 기준이 되었던 것은 ‘지역구 투표’였다. 후보에게 준 표로 정당에 의석을 나눈 것이다. 별것 아닌 이 차이는 비례대표 도입 취지를 상당히 훼손했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에 가야 할 표가 온전히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본인이 투표하는 지역구에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에서 후보를 내지 못했을 때 그 사람은 원하던 곳에 투표할 수 없었고, 무소속 후보나 비례대표 무공천 정당 후보를 찍을 때 그 표는 사표가 되었다. 이에 따라 투표한 지역구 후보랑 지지 정당이 다른 경우가 쏟아져 나왔다. 단순한 당리당략 문제가 아니라 국민 개인이 정당 지지를 온전히 표현할 권리를 뺏긴 셈이었다. 헌법재판소는 이 조항이 위헌이라고 판단했고, 국회는 후보에 한 표, 정당에 한 표 주는 1인 2표제를 도입해 지역구 후보에 한 표, 내가 지지하는 정당에 한 표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민주화 이후 2000년까지의 선거제도. 단순다수 소선거구제+전국구라는 틀은 지금까지도 활용되고 있다. (여/야당은 선거 당시 대통령의 당적이 기준, 과반을 차지한 경우 밑줄 표시, 의원정수 아래 숫자는 ‘지역구+전국구’ 의석 수)

물론 모든 변화가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됐던 것은 아니다. 지난 총선에서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되었다. 독일의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빌려 한국에 적용한 것으로, 정당이 득표 받은 것만큼 의석을 나눠 가짐으로써 비례성을 높이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선거법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애초 취지와 상당히 멀어지게 되었고, 위성정당 논란으로 빛이 바래고 말았다.

한편, 선거구에도 어느 정도 변화는 있었다. 인구가 선거구 획정에서 주요 기준이 된 것이 가장 중요한 변화다. 마땅한 기준이 없을 때는 특정 정치 세력의 유불리에 따라 선거구가 기준 없이 획정되는 게리맨더링이 종종 일어났다. 군사정권에서도 도시 선거구를 줄이고, 농촌 선거구를 늘리는 방향으로 게리맨더링을 펼친 바 있다.

하지만 1995년에 헌법재판소가 최대 인구 선거구의 인구수는 최소 인구 선거구의 인구수를 4배 이하여야 한다는 방침을 내놓았고, 2016년 20대 총선에서는 편차를 2:1까지 좁혔다. 이에 따라 몇몇 농어촌 선거구의 존립이 위태로워지는 문제가 새로 생겼지만, 표의 등가성은 높아졌다.

2001년 1인 2표제 도입 이후 선거제도. 1인 2표제 도입과 더불어 이름을 되찾은 비례대표는 비로소 제몫을 다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최근 선거는 2020년 21대 총선으로 준연동형 비례제가 도입되었다. (여/야당은 선거 당시 대통령의 당적이 기준, 과반을 차지한 경우 밑줄 표시, 의원정수 아래 숫자는 ‘지역구+전국구’ 의석 수)

※ 앞으로 4일 간격으로 [제대로 바꾸자, 선거제!] 시리즈를 연재하려 합니다. 12일에는 ‘중대선거구제는 왜 안 되는가 – 실전편’을 올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