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소함 덕분에 누군가가 더 큰 이득과 권력을 누린다

머릿수 정치학


내가 알고 있는 파업은

일이 너무 고되고 위험해서, 일한 만큼 대가를 주지 않아서, 회사 구조조정이나 매각에 반대하기 위해서, 노동자나 특정 산업에 불리한 정부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서, 다른 파업 노동자와 연대하기 위해서…

파업이 일어나는 이유는 참 다양하지만, 정치적 파업을 제외하고 보면, 노조는 대개 임금 인상이나 근무시간 축소, 작업장 노동 환경 개선 등을 파업을 끝내기 위한 협상 조건으로 내건다.

인력 확대 또한 단골 협상 조건이다. 자본가나 주주에게 인건비는 될 수 있으면 줄여야 하는 요소고, 그것을 줄이기 위해서 기업은 노동자에게 어떻게 하면 적게 주면서 많이 일을 시킬지 고민한다. 고강도 노동이 이어지다 보면 대개 파업이 일어나고, 기업에서 전체 생산량을 줄이지 않고 노동 강도를 떨어뜨리려면 기계를 더 사던가, 노동자를 더 뽑을 수밖에 없다. (아니면 커피를 마시면서 코피 터질 때까지 일을 강제로 하던가 하하하…)

최근에 주요 사업장에서 벌어졌거나 벌어질 뻔한 파업을 보면 인력 확충하라는 문구가 반드시 나온다. 아니, 그런데… 여기서 구구절절하게 쓰는 게 손 아플 정도로 너무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사람이 모자란다면서, 사람 늘리지 말라고 파업한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주장이, 전국 상위 1% 수재들만 모인다는 의사들에게는 아닌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노동 강도가 원래부터 빡센데다가, 코로나 때문에 지칠 대로 지쳐있다는 의사들이, 노동 강도를 줄이기 위해서 의사 정원을 늘리겠다는 정부 주장에 맞서 파업을 한다는, 평범한 사람들 상식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을 떳떳하게 할 수 없지 않겠는가?

의사들은 이번 사태 이전에도 의사 정원을 어떻게든 늘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2020년 현재 전국 의과대학 입학 정원은 3,058명이다. 왜 3,000명이나 3,100명이 아닌 어중간 숫자로 떨어진 걸까?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라는 말이 지금은 당연하지만, 1990년대까지는 병원이 약을 처방할 뿐만 아니라 약을 지을 수도 있었다. 의사들은 처방과 조제를 분리하는 정책에 강하게 반발했고, 결국 2000년에 의사협회가 사상 처음으로 집단 휴진에 들어갔다. 의사협회 간부가 처벌받는 끝에 의약분업은 강행되었지만, 의사들은 계속 항의했다.

정부는 기세 좋게 정책을 추진했지만, 의사 눈치를 아예 안 볼 수는 없는 모양이었나 보다. 의사 반발을 누그러뜨릴 방안을 모색하다 찾은 것이 바로 의대 정원 축소였다. 해마다 새로 나오는 의사 수가 줄어들어야 기존 의사들은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와 의사협회는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의과 대학 정원을 3,500명에서 3,058명으로 10% 넘게 감축하기로 합의했고, 실행되었다.

이때 의대 정원을 감축한 건 정부의 크나큰 실책이었다. 합의한 지 10년도 지나지 않은 2012년, 보건복지부는 의사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연세대 의료 · 복지연구소에 의뢰한 ‘적정 의사인력 및 전문분야별 전공의 수급 추계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에 가면 국내 의사가 3만 4,000명~16만 명 부족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후 서울대 이외 몇몇 대학에서 의사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따졌고, 한결같이 미래에는 의사가 부족해질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럴 때마다 의사협회는 ‘한국 의사 수가 공급 과잉 상태’라는 소리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오히려 의대 정원을 줄여야 한다고 큰소리쳤다. 지방이나 일부 기피과(흉부외과,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 등등)에서 의사가 부족해지는 문제는 수가를 올려주기만 한다면 다 해결된다고 장담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토록 타령해댔던 의사가 넘쳐난다는 주장은 현실이 되었는가? 2009년, 의사협회는 국내 의사 인력이 공급 과잉 상태라고 주장하면서, 10년 뒤 의사가 OECD 평균을 웃도는 수준이 되리라 예측했다. 2007년 OECD 통계에 따르면 인구 1,000명 당 의사 수는 OECD 평균이 3.1명이었고, 한국은 1.7명으로 터키 다음 뒤에서 두 번째였다.

오늘날은 어떤가? 한국 의사 수는 인구 1,000명 당 2.4명으로, OECD 평균인 3.5명에 여전히 못 미치며, 또다시 콜롬비아 다음으로 뒤에서 2위를 차지하고 말았다. 지금 지방 병원, 공공의료, 의사가 기피하는 진료 과에서는 의사가 없다고 아우성이다. 적게는 3억, 많게는 5억을 준다고 약속해도 말이다.

대한의사협회는 예전부터 집요하게 의사가 넘쳐난다고 주장했다. 해당 기사는 2009년 7월 7일 데일리 메디에서 작성.

100명과 500명 사이

국회는 다른 의미로 평범한 사람들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대중에게 국회의원 의석을 늘리기는 나라 곳간 갉아 먹는 식충이를 더 늘리자는 소리로 밖에 안 들릴 것이다. 놀고먹고 싸우는 의원들을 보고 있노라면 크흠…

여론에 누구보다도 민감한 정치인들은 때때로 정치 개혁을 명목으로 의원 정수 감축 문제를 꺼내곤 한다.

안철수의 공약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의원 정수 100명 감축 공약을 발표했다는 기사를 전철에서 봤을 때 충격이 너무나도 컸다. 당시 그는 청년들의 우상이자 실리주의자이자 새 정치의 선두주자이자 2012 대선 유력 후보였기 때문이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그의 주요 지지층이자 정치 혐오 심리가 있는 부동층을 너무 의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가장 최근에는 국민의힘의 전신, 자유한국당이 의원 270명으로 감축을 주장했다. 더불어민주당과 군소정당들이 내세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맞서는 상황에서 나왔다. 누군가는 미국을 본받아 국회의원을 단 100명만 뽑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실제로 이뤄진 적은 없다. 일반 대중이야 자기들 밥그릇 지키느라 입 싹 닦은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할 수 있겠지만, 의석수 감축이 실현되지 않은 이유는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믿고 싶지 않겠지만, 국민을 대표하는 기구는 대통령이 아닌 국회다. 민주주의가 시작된 근대 유럽에서 민주화는 왕이 자기 멋대로 휘두르던 절대 권력을 국민들이 조금씩 나눠 갖는 과정이었고, 그 권력을 행사하는 공간은 다름 아닌 의회였다. 민주주의가 더욱 발전하면서, 왕은 상징적인 존재로 남은 채 국회가 정부를 장악하거나, 아예 왕이 없이 대통령이나 국회로부터 구성된 내각 행정부가 온전히 권력을 행사했다.

한국은 대통령이 왕 같이 권력을 마구 행사한 적이 많지만, 그때도 국민을 대표하는 곳이 국회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한민국 헌법이 독재자들 손에 휘리릭 바뀌는 동안에도 삼권 분립 주체 중 국회를 가장 먼저 다루고, 국회의원 하나하나를 헌법기관으로 명시했다. 국회가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 갖는 의미는 이 정도다. 이런 국회의원을 하나라도 줄인다는 것은 독재정권이 출현했거나 국가가 위기에 닥쳤을 때가 아닌 이상 평시에서는 명분상으로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정치학개론을 덮고, 현실로 나아가보자. 객관적으로 봤을 때 어엿한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에 국회의원 300명은 턱없이 모자라다.

1948년 남한이 단독으로 총선거를 치렀을 때만 해도 인구는 2,000만 명을 간신히 넘겼으나 지금은 5,000만 명에 이르고 있다. 선거 당시에 선출된 국회의원은 200명으로, 의원 한 사람이 국민 10만여 명을 대변하도록 선거구를 구성했다. 이 기준을 제대로 따랐다면 오늘날 국회의원은 500석이 넘어야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 국회의원 1명이 대변하는 국민 수는 17만 명을 넘었다. 의원 1인당 국민 수는 OECD 국가 중 미국, 일본에 이어 앞에서 3위를 했다. 민주주의가 일찍부터 정착한 유럽 국가들은 10만 명, 심지어 5만 명 아래로 떨어지는 나라들도 많다.

일이 많은데 사람 수가 늘지 않으면, 권한은 자연스레 한 사람에게 몰린다. 예산은 중요한 사례 중 하나다. 기획재정부가 내놓은 내년 예산안은 총지출이 555조 8천억 원이다. 우리나라 예산이 500조 원을 넘어 600조 원 넘어가는 게 시간문제라는 사실도 놀랍지만, 단순 계산하면 의원 한 사람 혼자 1조 8500억 원 어치를 예산을 감시한다는 사실도 놀랍다. 아마 몇 년 뒤에도 의원 수가 늘지 않으면 의원 하나가 2조 원 넘는 돈을 주물럭거리게 된다. 웬만한 대기업 1년 매출액을 의원 하나가 좌지우지하는 셈이다.

꺾은 선 그래프(왼쪽 축)은 역대 국회의원 의석수를, 세로 막대 그래프(오른쪽 축)은 선거가 있었던 해당 연도의 남한 전체 인구에 국회의원 전체 의석수를 나눈 값(의원 1인당 국민 수)을 나타낸 것이다. 국민 인구수는 시점에 따라 참고한 통계 값이 다르지만, 모두 통계청에서 작성한 자료를 참고했다.
(1948년~1954년은 ‘1949년 인구총조사’, 1958년은 ‘1955년 인구총조사’, 1960년부터는 ‘장래인구추계’)

수를 늘리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쪽은 대개 음흉한 속셈을 감추고 있다

수와 관련된 고사성어를 떠올리라면 다다익선과 과유불급이 생각난다. 두 말을 나란히 놓고 보자. 얼핏 보면 이 쌍은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지만, 교집합은 있다. 모자람을 긍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종이 탄생한 이래, 인간은 항상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해 나타나는 문제에 부딪혔고, 이 사태를 제때 해결하지 못할 때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인간 사회는 절대적인 생산량을 늘리거나 한 사람이 독점한 것을 여럿이 나눠 가질 수 있는 규칙을 만들면서 모자람이 불러오는 위기를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인류 역사상 이만큼 풍요로운 적이 없었다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모자람을 호소하는 소리가 들린다. 서울에는 2,000병상 넘는 병원이 속속 생기고, 강남에는 뷰티샵으로 착각할 만한 병원이 발에 채일 정도로 많다. 하지만 시골에서는 의사 선생님 얼굴 보기가 어려워, 큰 병이 들거나 애를 낳으려면 근처 대도시 병원이나 서울 큰 병원을 찾아 몇십, 몇백 킬로미터를 헤맨다. 국회에 금배지가 300개 있지만, 차별금지법이나 중대재해기업처벌법 같이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를 위한 법안을 발의하기 위한 의원 10명은 모으기도 힘들고, 민생 법안이라고 하는 것들은 통과되기도 힘들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의사와 국회의원 이 두 쌍 또한 별 접점 없는 것 같지만, ‘기득권을 가진 소수의 사람’이 공익을 자기 것인 마냥 독점하고 있다는 현실은 똑 닮았다. 의대 정원이 늘어나지 않는다면 의사들은 한없이 나오는 수요를 치열한 경쟁 없이 더 많이 가져갈 수 있다. 의원 정수가 늘어나지 않는다면 국회의원들은 내가 갖고 있는 권력의 크기를 지금 수준으로 유지하거나 더 키울 수 있다. 그래서 머릿수 늘리자는 주장에 반대하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마땅히 늘려야 할 머릿수를 늘리지 못해서 생기는 피해는 ‘우리’가 고스란히 받는다. 돈과 권력이 한 사람에게 쏠렸을 때 나타나는 폐해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 폐해를 타파하려면 사람을 늘리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두서없이 써 내려간 글을 읽어주신 독자들께 감히 충고드린다. 사람을 늘려서는 안 된다는 말을 온전히 믿지 마시라. 그 목소리에는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지 않으려는 소리 없는 아우성도 섞여 있음을 명심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