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한국어에 대한 집착, 이제는 버리자

우리는 난닝구와 쓰레빠를 버릴 수 있을까?


‘벤또’, ‘공구리’.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이 말을 검색하면 아무런 설명 없이 표준어가 나오며, 사람들은 그 사실을 당연하게 여겨지는 듯하다. 반면, 어떤 사전에서는 이 단어를 자세히 설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문제 아닌 문제를 일으켰다.

몇 개월 전, 전북도청은 돈을 들여 전라북도에서 쓰이는 방언을 모아 사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사전에는 우리가 흔히 아는 전라도 방언뿐만 아니라 벤또, 구루마, 공구리 같은 일본어도 포함되면서 논란이 되었다. 이 기사를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전라북도 방언사전에 순수한 토박이말이 아니라 왜놈들의 말이 들어있다니!”라는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혀를 끌끌 차려던 찰나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내 혀를 도로 멈추게 했다.

지금도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 외래어가 많은데 어원이 다른 나라라는 이유로 기록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방언은 어원을 따질 문제가 아니다. 일반인의 시각과 정서상 불편할 수 있지만 타 지역 방언사전에도 당시의 현상 그대로를 반영해 각종 외래어가 등재돼 있다

– 소강춘 국립국어원장(전라북도 방언사전 연구책임자)

생각해보니 그랬다. 그동안 한국어 순화 운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서 건너온 말들이 숙청당했다. 그런데도 그 말들은 어찌 된 일인지 우리 입에 착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고, 그 세월이 100년에 달하고 있었다. 그런 말들을 애써 없는 셈 친다고 해서 없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요것이 문제가 되어버린 전라북도 방언사전이여.

나는 어렸을 때부터 토박이말을 좋아했다. 정겹고 순수한 느낌 때문이었다. 한국어를 나름대로 공부하면서 한국어 단어의 70% 가까이가 한자어라는 사실, 어느샌가 뿅 하고 나타난 외국어 단어가 한국어를 더럽히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글 쓸 때나 말 할 때 외국어나 한자어는 멀리하려고 무진히도 애를 썼고, 나름대로 어려운 한자어 단어를 쉬운 고유어 단어로 바꿔보기도 했다. (하나 예를 들자면, 다른 친구들이 추석을 추석이라 부를 때 나는 한가위를 고집했다.)

내가 내뱉은 말과 글이 많아질수록 이런 노력이 헛수고라는 느낌을 받았다. 국립국어원에서 다달이 순화어를 내놓고 있지만, 그 말은 국립국어원 누리집을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설레발, 댓글, 꼼수와 같은 단어는 방송 한 번 탄 이후로 지금도 널리 쓰이고 있다. 대륙을 건너왔거나 어디서 왔는지조차 모를 말들이 이 땅에 깊게 뿌리내린 말들이 꿰찬 자리를 조금씩 빼앗으려 하지만서도,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유행어는 10년도 못 가서 거름 덩어리가 되었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통해 언어는 인위와 옳고 그름으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진리를 알 수 있다. 언어를 바꾸는 가장 큰 힘은 사람과 사람 사이 소통이다. 고대부터 한반도 국가들은 중국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많이 받아들였고, 자연스레 한자가 많이 쓰이게 되었다. 2000년 넘는 교류에서 한자어는 한국어 단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요즘은 미국과 유럽에서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니 영어식 외래어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위의 사례와는 달리 강압적이고 우리가 원치 않았던 방법으로 교류한 과정에서 넘어온 것이기는 하지만, 전북방언사전에서 논란이 된 말들 또한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함께 건너온 외래어다.

빵구나 기스 같이 멀쩡하고 어감도 좋은 한국어 단어들이 있다면 고치는 것이 좋기는 하겠다. 그런데 테레비, 쓰레빠, 난닝구, 공구리와 같이 고유어나 한자어로 완벽히 순화할만한 단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원어보다 부르기 편하면서 대중들이 널리 쓰는 말에도 순화라는 잣대를 굳이 들이대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어쩌면 그런 단어들을 차라리 표준어로 올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라는 생각도 한다. 추리닝은 이미 표준어로 등재되어 있기도 하다. 사회, 경제, 대통령같이 주로 학문 용어에서 볼 수 있을뿐더러 그것이 일본에서 건너온 말인지 의식조차 못 하는 말들은 순화할 생각조차 안 하고 있기도 하다.

니시 아마네(西周, 1829년 3월 7일 ~ 1897년 1월 31일)는 ‘철학’, ‘과학’, ‘문학’, ‘심리’ 등 서양 근대 용어를 번역해 일본 근대화를 이끈 인물로 꼽힌다. 이후 그가 만든 번역어들은 중국과 한국에서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

광복이 76년 되었건만, 일제 36년이 남긴 흔적은 쉬이 지워지지 않는다. 일제 잔재 청산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고, 한국어 또한 이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말 어법과 동떨어지고, 평범한 사람들에게 어렵게 느낄 수 있는 일본 외래어를 한국어를 쓰는 우리가 손수 다듬는 일은 당연하다.

그러나 일본식 외래어를 한국어에서 완전히 들어내는 일은 가능하지도,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언어는 무균실일 수 없다. 생태계에는 우리 사람과 흔히들 아는 동식물들뿐만 아니라 이름 모를 들풀이나 곤충들, 눈으로 보이지 않아 존재조차 알 수 없는 미생물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아는 동식물 중 많은 것들은 다른 대륙에서 물 건너 온 것들이 많고, 어느 한 종이 다른 종을 절멸시키지 않는 한 생태계는 공생과 기생 속에서 조화롭게 굴러간다.

우리와 일본은 어떨 때는 폭압적으로, 어떨 때는 평화적으로 많은 부분에서 교류하면서 서로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런 과정에서 건너 온 일본식 외래어 중 어떤 것은 평범한 사람들 입에 달라붙었고, 때로는 한국어로 표현하지 못한 것을 충실히 매웠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일본 외래어에 대해서는 마냥 천시하고 면박할 게 아니라 존재하는 현실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고상하지 않다, 순우리말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몇몇 사람들이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봤자, 많은 사람이 그 말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언어는 시대 흐름과 사회 변화, 그리고 사람 개개인에 따라 단어나 말투, 문장이 다를 수밖에 없다. 비속어/은어를 쓰거나 한국어 체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지 않는 이상, 말의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을 필요가 있다. 만인이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정신에 바탕해 만들어진 한글을 이어 받고 싶다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