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부터 비대위?
집권 세력들은 권력이 가장 강한 시기라는 지금 이 순간을 좌충우돌하며 허비하고 있다. 그나마 대통령은 어느 정도 예상한 모습이지만, 여당이 된 국민의힘에서 벌어지는 혼란상은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국민의힘은 민주화 이후 대통령 중에서 가장 이렇다 할 정치 경력과 국정 운영 계획이 없는 사람을 대통령에 올렸다. 그래서 그를 잘 보좌할 무한한 책임감과 국정을 주도적으로 이끌 계획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하지만 현 여당은 그런 의무는 괘념치 않았거나 계획 자체가 없었던 듯하다. 윤핵관들은 차기 권력 싸움에 개인감정을 보태 국민의힘을 여당으로 만든 당 대표를 내쫓았다. 어찌어찌해서 기회를 잡은 권한 대행이라는 사람은 말실수나 정책 혼선으로 미덥지 않은 모습을 여러 차례 보이며 애써 잡은 권력을 내줘야 했다. 국민은 이런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끝에 벌써 여당에 대한 기대를 놓은 듯하고, 의원들은 고심 끝에 지도부 해체와 비상대책위원회 구성을 선택했다.
상황이 수습되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가지 특이점은 남는다. 하나는 집권한 지 100일 채 안 된 상황에서 비대위가 출범한다는 것. 집권 여당은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권력이 강한 때다. 동시에 대통령이 당에 가장 영향력을 많이 미칠 때고, 그래서 대개는 의견이 대통령 중심으로 하나로 모이는 모습이 잘 보일 때다. 그래서 집권 초 여당의 비대위 체제는 유례가 없는 일이다. 대선 3개월 뒤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도 승리를 거둔 걸 떠올리면 더더욱 그렇고.
하나 더. 적어도 2010년 이후부터 보수계 정당에는 후임 대표가 전임 대표로부터 직을 이어받은 적이 없다. 전임과 후임 사이에는 항상 비대위가 끼어 있다. 임기를 채웠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례는 황우여 대표 단 하나였고, 이준석을 포함한 나머지 대표들은 임기를 제 손으로 마무리 짓지 못한 채 비대위에 권력을 넘겨야 했다. 그 임기가 절대 길지 않은 ‘2년’인데도.
최근 비대위를 살펴보면 임기가 제법 길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준석 대표 취임 전 비대위는 1년 가까이 유지되었다. 오랜 기간 당을 이끌며 호평받았던 박근혜 비대위로부터 얻은 혁신형 비대위 체제에 대한 좋은 이미지,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이후 이렇다 할 구심점이 없는 당내 상황, 위원장 개인의 요구 등 여러 문제가 맞물려 장기 비대위를 여러 번 만들어냈다. 그런데 이번에 선임된 비대위원장은 ‘혁신’을 위해서는 비대위를 3개월 이상 운영하는 게 좋다고 주장했다. 혁신한답시고 장기 비대위를 여러 번 세웠는데도 아직도 혁신할 게 남아있나 보다.
비대위 다음은 비대위
비대위의 원조 맛집은 민주당이다. 한때는 애써 만든 당을 몇 달 못 가고 깰 정도로 이합집산이 심한 것이 민주당계 역사였다. 그만큼 비대위가 많이 구성되었고, 올해 국민의힘보다 앞서서 비대위를 꾸렸다. 촛불 정국과 문재인 정권하에서 민주당계 정당 사상 처음(추미애)과 두 번째(이해찬)로 임기를 무사히 채운 당대표들이 나오면서 찾아 온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 짧은 시간에 민주당은 민주당대로 문제를 보인다. 비대위 뒤에 또 다른 비대위가 기다린다는 점이다. 당장 급한 불을 끄려고 구성된 비대위가 상황을 수습하지 못하고 또 다른 비대위에 일을 떠넘기는 모양새이다. 현임 우상호 위원장은 지방선거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 윤호중-박지현 공동 위원장으로부터 직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8년 전, 재보선 패배를 수습하고자 등판한 박영선 비대위원장은 세월호 정국을 이끄는 과정에서 의원들의 불신을 받아 물러났다.
재선(?) 비대위원장 또한 민주당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이명박근혜 정권 시기에 민주당계 정당의 이합집산은 극심했고, 이 혼란 속에서 박지원과 문희상은 비교적 짧은 시차를 두고 비대위원장직을 두 번이나 맡기도 했다. 이합집산 속에서 상황을 수습할 정치인들이 보이지 않다 보니 그들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그런데 그때와 달리 당이 쪼개질 가능성이 적은 이 시점에도 윤호중은 비대위원장을 두 번 맡았다.
정의당 너 마저 비대위?
진보정당은 당내 민주주의와 활발한 당원 참여를 근간으로 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선출 지도부를 구성한다는 전통을 잘 지키는 편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정의당은 한 해 걸러 비대위 체제를 출범시켰는데, 이것은 정의당이 흔들리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비대위를 구성해야 할 계기를 만든 김종철은 원래 계획보다 일찍 구성된 지도부였다. 그 전 대표 심상정은 신진 인물 발굴과 당 개혁을 위해 혁신위원회를 구성하고 임기를 스스로 단축했다. 위기 상황 수습이라는 비대위적 과제를 짊어지고 출범했지만, 대표 개인의 추문으로 지도부가 사라졌다. 그 뒤를 이어 진짜로 구성된 비대위는 신임 대표를 세우기에 급급했고, 혁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서 위험 요소는 오히려 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첫 비대위 출범 후 1년 뒤 비대위를 꾸리게 되었다.
지지자 사이에서는 이왕 비대위를 할 거면 장기간 혁신형 비대위를 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법 지지를 얻었다. 해왔던 대로 한다면 당 혁신을 이뤄낼 수 없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의당은 9월 당대회를 계획하며 비대위 체제를 3개월만 유지하기로 했다. 그 선택이 옳았는지는 지금 구성된 비대위가 혁신이라는 과제를 잘 수행했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일상화된 비상: 잦은 비대위가 말하는 것들
여당이 비대위를 출범하겠다고 요란을 떨기 이전에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은 이미 비대위 체제가 돌아가고 있다. 소란스러움 때문에 주목받지 못하는 듯하나 국회에 두 석 이상 의석을 낸 모든 정당은 비상 상황을 선언했다. 이거 이상한 일 아닌가?
더더욱 이상한 것은 2010년부터 2022년까지 1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보수계 정당은 9번, 민주당계 정당은 10번 비상대책위원회를 세웠다. 이에 따르면 한국 정당에서 비상상황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일상이었다. 비상이 더 이상 비상이 아니라 일상이 되어버린 말장난 같은 상황이었다.
비대위를 세우는 주된 명분은 원인은 선거 패배와 당내 혁신이지만, 그럴듯한 이유와 달리 비대위는 둘 중 하나의 결말을 맞이한다. 하나는 당내 갈등을 미봉책으로 수습하고 주류 세력에게 당권을 넘기는 것, 또 하나는 혁신안을 애써 만들기는 하나 다음 지도부가 들어서면 휴지조각이 되는 것이다. 당내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은 채 어찌저찌 굴러가다가 당이 작은 위기에 처하면 또다시 비대위라는 똑같은 처방을 내놓는다.
비대위라는 처방이 잘 듣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잠깐 갈등을 가라앉히는 대증요법이기 때문이다. 비대위는 권력 투쟁의 산물로 생겨나거나 혁신 그 자체보다는 혁신한다는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주기 위해, 혹은 특정 인물을 내쫓기 위해 구성된다. 비대위가 만든 혁신안은 별 관심이 없거나 아예 따를 생각이 없었다.
비상 상황에 자주 처하는 정당들을 보며 ‘도대체 정당은 뭐하는 곳이지?’라는 근원적 질문이 나오게 된다. 물론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대학 때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지겹게 읽은 책이 문득 떠올랐다. 그 책은 정당을 ‘한 무리의 공직자 혹은 공직 희망자들이 대규모의 시민들과 연계되어 하나의 조직을 구성’하는 집단이라고 정의한다. (<정치학개론: 권력과 선택>, 필립스 쉬블리)
책에서 정의한 정당과 오늘날 정당 모습 사이에서 보이는 가장 큰 차이는 ‘정치인들이 시민들과 제대로 연계되어 있는가?’이다. 그동안 정당들은 유명 정치인의 행보, 혹은 당내 권력 투쟁에 따라 뭉치고 깨지길 반복했다. 정부와 시민을 연결하는 역할보다는 특정 계파 모임이나 권력 배급소에 훨씬 가까웠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사회가 정당에 요구하는 지도력, 책임감, 정책 의제 발굴 능력, 사회 문제 해결 능력은 정당에서 찾기 어렵고, 정당에 무언가를 기대하기 보다는 정당을 걱정하거나 회의하는 여론은 늘어만 간다.
그래서 한국 정당에 진짜로 필요한 처방은 당을 정책과 이념 중심으로 정비하고, 당내 민주주의와 투명성을 높여 평당원과 일반 시민이 정당에 참여할 수 있도록 바꾸는 것이다. 중상모략보다는 정책과 이념으로 경쟁하는 정치인, 시민들이 원하는 정책을 만들어 내는 정당이 필요하다. 당내 문제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비상 선언하고 사람 바꾸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