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타리(Hatari)라는 아티스트가 있다. 인더스트리얼 테크노/펑크를 하는 아이슬란드 출신 남성 3인조다. 음악을 좀 아는 분들이라면 스칸디나비아의 펑크 음악가가 어떤 퍼포먼스를 보여줄지는 대강 예상이 되실 테다. 안 된다면, 그들의 대표곡 <Hatrið Mun Sigra[혐오가 만연하리라]>를 들어보시기 바란다. 노래 가사도 그렇고 무대 분위기도 그렇고, 썩 무섭고 도발적인 음악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토록 건방지고 위협적인 음악이, 실제로는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다.
절제 없는 방탕!
Hatrið mun sigra (Hatari) 1절 및 프리코러스
내일이 없는 숙취!
삶은 목적 없이 혼란하고 공허가 잠식하리라!
혐오가 만연하리라!
기쁨은 탈선하리라!
환상과 사기와 허무가 뒤통수를 치리라!
이 곡은 아이슬란드에서 대히트를 쳤다. 가사의 의미도 모른 채 “Huh!”를 꽥꽥 따라하는 어린이들의 재롱 영상이 SNS에 돌곤 했다. 의상부터 뮤직비디오까지 온통 디스토피아적 이미지와 사운드로 가득한 이 퍼포먼스는 텔아비브에서 열린 2019년 유로비전 콘테스트 결선에서 잘만 재현됐다. 영상에도 나오지만, 이 무시무시한 음악이 끝나자 돌아온 것은 경악이 아니라 박수 갈채였다. 혼란, 혐오, 논쟁을 일으키려고 작정한 듯한 음악이었지만, 음악 자체는 그러지 못했다.
진짜 혼란, 혐오, 논쟁은 이 무대 밖에서 일어났다. 하타리는 이 결승 무대에 소품을 하나 몰래 들고 가서, 시상 축하 자리에서 그걸 꺼내 보였다. 팔레스타인 국기를 말이다.
<혐오라는 이름의 노래>라는 다큐멘터리에 이 “사고”가 발생하게 된 이면의 경위와 그 후일담이 자세히 나온다. 이들의 ‘테러'(?)는 계획적인 것이었다. 이 무대는 보안이 꽤 삼엄했고, 사전 협의되지 않은 요소는 어떤 것도 들고 올라갈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지레 단념하긴커녕 어떻게든 이걸 해내려고 갖은 꾀를 낸다. 깃발 모양이 저렇게 길쭉한 것도 그 이유다.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저보다 더 크고 제대로 된 팔레스타인 국기를 숨기고 들어가기에는 무리가 좀 있었다나.
아까 이 무대가 2019년의 텔아비브였다고 말했던가? 이들이 팔레스타인 국기를 꺼내든 순간, 아까까지만 해도 그들을 좋아라고 환호하던 객석에서 야유가 터져나왔고, 이 대회 주최측은 “그들의 행동에 어떤 조치를 취할지 논의하겠다”라고 화를 냈다. 아마 텔아비브는 이스라엘 영토여서 그랬겠지. 그리고 이 모든 “논란”과 “혼란”을 가디언지 기고자는 아주 점잖게 꾸짖는다.
주최국 이스라엘은 그토록 염원하던 자기 나라 소개 시간을 무려 네 시간이나 받을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똑같은 영토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고 있는 나라 팔레스타인에게는 30초의 시간도 허락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 모든 상황을 보고 있자면 아무래도 이 갈등을 항구적으로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는 그른 것 같다. 딴에는 리버럴입네 퀴어입네 파티피플입네 하는 관중조차도 그들 바로 옆에 살고 있는 나라의 국색인 적녹흑에 이렇게 길길이 뛰는데, 이스라엘 여론이야 더 볼 것이 있겠는가?
<유로비전에서 나부끼는 팔레스타인 국기가 뭐가 문제란 말인가> (가디언) 중
하타리의 사례를 보며, 정말 논란을 일으키고 싶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한때는 음악 자체가 충분히 충격적이면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시대가 있었다. “교회에서 일렉기타를 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 논쟁하던 시기가 대표적으로 그렇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는 아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수준이 꽤 올라가서, ‘장르’를 메시지와 구분할 수 있게 됐고, 그리하여 이제 둘은 따로 팔리거나 따로 구매된다. 메시지 없는 장르물이 가능하고, 장르물에 함유된 메시지를 선택적으로 “흐린눈 하고” 무시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아무리 표현물 안에 메시지를 구겨넣어도 그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흔해졌다. 이 변화는 아무래도, 음악, 예술, 표현이 훌륭한 소비재로 시장에 편입한 시점과 그 시기가 일치할 것이다.
이제 메시지는 표현(물)에 내재하기도 하되, 그 표현(물)이 위치하는 장소/시점/맥락에 의해야 비로소 발현되기도 하는 것 같다. 뒤집어 말하자면, 표현(물)이 적당한 TPO를 만나지 못하는 한 그 표현물 안에 들어간 어떤 메시지도 결국은 감춰지거나 “먹금”된다는 것이다. 다음 메시지를 잘 생각해 보시라. 그들이 초대받고 환영받은 무대에서 모두가 그들을 듣고 싶어하는 상황에서 그들이 스스로를 홍보한 모습 그대로 흉내내고 있을 때 이 메시지는 누구에게도 ‘부딪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팔레스타인 국기를 꺼냈을 때부터는? 다음 가사가 고스란히 그 현장을 고발하며 꽝꽝 울리기 시작한다.
사방에 널린 난독!
Hatrið mun sigra (Hatari) 2절 및 프리코러스
일방적인 저주!
아둔한 환상에 출구는 좁아져 공허가 잠식하리라!
혐오가 만연하리라!
찔린 유럽의 심장이 거짓의 그물에 걸려 불타는 이 난리를 나와 연대하자!
유로비전 2019 이후 하타리는 아예 대놓고 <KLEFI / صامد>라는 곡을 쓴다. 팔레스타인 음악가 바샤르 무라드와 협업했고, 곡의 절반을 그가 쓰고 부른 아랍어 가사로 채웠으며, 뮤직비디오 촬영은 팔레스타인 땅 여리고에서 진행했고 마지막 장면은 정말 큰 팔레스타인 국기가 버젓하게 나부낀다. 그렇게 큰 행사에서 그렇게 논란에 휩싸여 봤으면서도 기죽지 않고 스스로 믿고 있는 바를 표현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 없이 멋진 일이다. 그렇지만 어쩌면, 이스라엘의 학살에 참다 못한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반격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라면 글쎄, 이 곡은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논란을 일으킬는지도 모르겠다.
아랍어 부분 가사는 팔레스타인 인민의 긍지를 표현하려 했다고 한다. 지금 시점이라고 크게 다를 거 같지 않으니, 다같이 한번 보고 들어 봤으면 한다.
맨발로 걷는 지금이 오히려 숭고하고 가치 있고 따뜻하고 낫다네
KLEFI / صامد (Hatari) 인트로 및 후렴
고생 끝에 나는 굽힘 없이 견고해
고문 끝에 나는 굽힘 없이 견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