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주의가 부활했다고라?


지도를 보니 좌우가 딱 갈라져있었다. 각 광역자치단체에서 지역구 의석을 더 많이 차지한 정당의 색깔을 그 땅에 칠한 결과였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 충청도와 강원도를 경계로 했을 때 아래쪽. 땅의 색깔이 더욱 짙었다.

한때 나라가 망할 징조라고 꼽혔던 지역주의가 다시 살아났다는 외침이 들려왔다. 더불어민주당이 호남에서, 미래통합당이 영남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현상은 변함이 없었다. 더욱이 이번 총선에서 양당은 자당이 비토를 받는 지역에서 의석을 하나도 얻지 못했다. 지난 번 총선에서 민주당이 대구 · 경북에서 2석, 미래통합당(당시에는 새누리당)이 2석을 얻은 것과 비교하면 퇴보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이 열세 지역에서 얻은 의석수 현황>
민주당은 대구 · 경북에서, 미래통합당은 호남에서 얻은 의석을 모두 잃었다.
(단위(석)는 생략, 자료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통계시스템 참조.)

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의석수만으로 지역주의 부활을 논하는 것은 민심을 제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의석수 뒤로 숨은, 득표율이라는 숫자는 의석수와는 조금 다른 사정을 말해준다.

영남에서 희망을 본 호남당, 호남에서 절망을 본 영남당

<더불어민주당 영남권 득표율 현황 >
지역구 득표율은 그 지역에 출마한 모든 후보의 득표율을 평균 낸 값이다. 영남 지역 대부분에서 득표율이 상승한 것이 눈에 띈다.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반올림, 단위(%)는 생략, 자료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통계시스템 참조.)

동남권(부산 · 울산 · 경남) 지역 광역자치단체장을 싹쓸이했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경제 침체와 코로나 19에 대한 피해, 민주당 소속 자치단체장의 잇따른 구설수 등으로 인해 정부와 여당에 대한 민심은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이번 총선에서 대경권(대구 · 경북) 전 지역에 후보를 출마시켰다. (지난 총선에서는 대구 7곳, 경북 6곳에 후보를 공천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누가봐도 그곳에 출마한 민주당 후보는 낙선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 보였다.

하지만 득표율에서 민주당은 괄목한 성과를 내놨다. 모든 지역에서 득표율이 올랐고, 특히 지역구 후보자 평균 득표율은 대폭 올랐다. 울산에서는 지난 총선 대비 16% 넘게 득표했고, 경북에서는 전체 유권자의 1/4을 넘는 지지를 받았다. 부산 지역구 후보들은 절반에 육박하는 지지를 받으며, 미래통합당 후보와 대등하게 붙었다. 비례대표 정당 득표도 마찬가지로, 대구광역시에서 살짝 떨어진 것 빼고는 20대 총선에서의 득표율을 유지하거나 올랐다.

덕분에 영남 지역에 출마한 모든 후보자는 선거비용을 보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지난 선거에서 경북에 출마한 후보 2명이 선거비용의 절반을 보전해주는 요건인 10% 이상 득표율조차 넘기지 못했으나, 이번 선거에서는 경북 경주에 출마한 정다은 후보를 제외하고 모두 선거비용을 전액 돌려받을 수 있게 되었다.

<미래통합당 호남권 득표율 현황>
지역구 득표율은 그 지역에 출마한 모든 후보의 득표율을 평균낸 값이다. 득표율을 지키기는커녕 도리어 5%대로 내려 앉았다.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반올림, 단위(%)는 생략, 통계자료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통계시스템 참조.)

미래통합당은 호남 지역구 의원이 비운 자리를 채우는 것 조차 벅찬 모양이었다. 이번 총선에서 광주 2곳, 전남 6곳, 전북 4곳에 후보가 출마했다. 지난 총선 광주 7곳, 전남 10곳, 전북 9곳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하다.

성적도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 지역구 후보 평균 득표율에서나 비례대표 정당 득표율에서 숫자는 한 자릿수에서 벗어나기는커녕 오히려 퇴보했다. 지난 선거와 이번 선거에서 지역구 후보 평균 득표율의 차이가 두드러지는데, 통합당 출신으로 당선된 의원들이 불출마해서 생긴 영향으로 보인다. 지역구 후보 중 득표율이 10% 이상인 후보는 당연히 하나도 없었다.

졌지만 잘 싸웠다

득표율에서 양 당은 서로 다른 성적표를 받았다. 두 당이 서로 열세인 지역에서 이렇게 다른 결과가 나타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나는 그 원인을 그 정당이 열세 지역을 어떻게 대했는 지로 답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 지속적으로 부산 지역에 출마했고, 이 영향을 받아 민주당은 이후로 지속적으로 영남 지역에 공직 선거 후보자를 공천했다. 19대 총선에서는 영남 지역 중 상대적으로 민주당 지지도가 높은 김해, 양산과 부산 서부지역을 통틀어 낙동강 벨트라는 말을 만들고, 이곳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그 덕분인지 이번 선거에서 낙동강 벨트에서 5석을 얻어, 영남권에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일부 정치인들도 지역주의 구도 타파라는 명목으로 자기 고향에 출마했다. 김부겸과 김영춘은 지역민에게 능력과 소신을 인정받아 20대 총선에서 당선했다. 당과 정부는 두 의원을 각각 문재인 정부 첫 행정안전부 장관과 해양수산부 장관을 맡기며 이들을 많이 밀어주고, 영남권 의원들은 정부에 지역 현안 사업 처리나 예산 확보를 요청했다. 당이나 정치인은 지역구민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려고 노력했다.

선거 결과를 분석하는 지역 언론들의 논조는 대경권에서 민주당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보여준다. 대구 · 경북 지역 신문들은 이번 선거 결과를 지역민들의 민주당에 대한 심판 심리라고 해석하면서도, 대구 · 경북에 여당 의원 하나 없는 상황은 지역 현안 해결과 예산 확보에 큰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기사를 실었다. 한 지역 신문은 사설에서 낙선한 김부겸 의원에게 ‘염치없지만 대경권을 위해 힘써달라’고 말할 정도였다. 영남 지역에서 민주당을 기피하는 정서가 많이 누그러진 것이다.

매일신문과 함께 대구 양대 신문으로 꼽히는 영남일보가 4월 17일자 신문에 올린 사설. 김부겸 낙선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심정이 느껴진다.

노력을 해야지 노오력!

그에 반해 미래통합당은 호남 지역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어보였다. 호남 지역민에게 호감을 얻을 행동을 해도 지지를 얻을까 말까인데, 호감을 얻을 행동을 하지 않거나 오히려 분노만 사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통합당 출신 지역구 의원들은 힘겹게 얻은 자리를 비우며 유권자의 신뢰를 저버렸다. 정운천 의원은 의원직을 유지하지만, 지역구 의원이 아닌 미래통합당 위성비례정당인 미래한국당에서 비례대표로 활동하게 되었다. 찐친박 이정현은 당을 탈당한 이후로 지역구 관리에 소홀한 모습을 보이더니, 정치 개혁을 주도하겠다는 명분하에 서울에 출마했다. 지역주의 타파를 내걸며 호남 지역 지역구를 출마한 4년 전 모습과는 생판 다른 모습이었다. 지역민들에게는 지역구를 떠나 의원직을 어떻게든 지키려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당은 호남 지역 출마(예정)자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이정현의 빈자리를 채운 사람은 당에서 젊은 보수 인재로 영입된 천하람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고향인 대구에 공천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자신만의 정치를 하고 싶다는 이유로 아무런 연고도 없는 순천에 과감하게 출마했다.

당 내에서 호응을 받을 줄로 알았으나 그에게 돌아온 반응은 “어렵게 합류시킨 청년인재가 수도권 격전지에서 한 석을 빼앗아 와야지 무슨 순천 출마냐”라는 참으로 꼰대스러운 대답이었다고 한다. 당에 대한 유권자들이 비호감 정서와 당 내부에서 제대로 지원을 못 받는 상황에서도 그는 끝까지 선거에 완주해 3%대 득표율을 얻었다.

위 인물들은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물의를 일으켰지만, 미래통합당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세 후보는 끝까지 완주했고, 모두 낙선했다. 왼쪽부터 강원도 춘천시·철원군·화천군·양구군 갑에 출마한 김진태, 광주광역시 서구 갑에 출마한 주동식,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에 출마한 장동혁.
(자료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통계시스템 참조.)

호남 사람들에게 아직도 아물지 않은 큰 상처인 광주민주화운동을 대하는 태도는 참담했다. 지난해 국회의사당에 태극기부대를 들이게 한 의원 다섯 명(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이완영, 백승주)은 제대로 된 징계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김진태는 이번 총선에서 미래통합당 당적으로 달고 춘천에 출마했고, 이종명과 김순례는 위성 정당을 세우는 과정에서 의원수를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제명당해 의원직을 유지했다.

이번 선거에서 다른 곳도 아닌 광주에 출마한 후보는 “광주는 80년대 유산에 사로잡힌 도시, 생산 대신 제사에 매달리는 도시, 과거 비극의 기념비가 젊은이들의 취업과 출산을 가로막는 도시로 추락했다.”했다는 헛소리를 후보자 TV 연설회 시간에 늘어놓았다. 사자명예훼손 행위로 재판을 받고 있는 전두환에게 불출석을 허용해 논란을 일으켰던 판사는 대전에 한 지역구에 출마했다.

과거사 청산하거나 성찰하는 태도를 보여 전국민에게 지지를 호소하기 보다는, 국민정서와 동떨어진 사람들을 자유 우파, 애국 보수라는 이유로 감싸며 극우 유권자 표를 노리는 데에 급급했다. 당연히 호남 사람들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는 행보였다.


정진석은 이 발언과 곁들여 “보수 존립에 도움 되지 않는 사람들은 육모 방망이로 뒤통수를 뽀개버려야 한다”고 말해 막말 논란에 휩싸였으나 오늘날에는 통합당 몰락을 예언한 발언으로 재평가 받았다.

‘자민련'(정식 명칭은 자유민주연합)은 시대에 따라가지 못하고, 지역에만 안주하는 정당을 비판하는 용도로 자주 소환된다. 그 자민련을 세운 사람은 김종필이다.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3김시대’라는 한국 정치사에서 큰 줄기를 만들고, 충남이라는 지역 연고를 중심으로 대권을 노렸던 인물. 그 김종필은 자민련을 이끌고 김대중과 손을 맞잡아 국민의 정부를 세우고, 국민의 정부 초대 총리를 맡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하지만 노무현 탄핵 정국의 역풍이 불어 닥치던 2004년, 자민련은 지역구는 물론 비례대표 후보자조차 당선하지 못한 채 몰락해버렸다. 시간은 더 이상 김종필과 자민련이 정치 생명을 이어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3김은 나이상으로나 시대 흐름상 저무는 해였고, 대중은 지역주의에만 의존하는 정치를 낡은 것으로 여겼다.

정진석은 그 자민련 소속으로 2000년 총선에서 충남 공주 · 부여 선거구에서 당선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어두운 과거를 꺼내면서까지 TK자민련 이야기를 꺼냈던 이유는 그만큼 지금 상황이 절실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몰락한 정당에서 몸담은 사람만큼 정당이 어떻게 하면 망하는지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은 더 이상 3김시대가 아니다. 많은 지역 유권자는 지역감정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는다. 지역감정에 의한 투표 성향은 더디더라도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다. 이때 상대 지역 당이라 불리던 정당이 지역주의 틀을 깰 준비가 되어 있다면, 유권자들은 그 정당에도 표를 줄 것이다. 반대로 그 구도에 머무르려 한다면, 그 지역 유권자만 아니라 전국의 유권자가 그 당을 외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