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광주에서 열리는 KIA 타이거즈 홈경기는 특별하다. 왜일까? 특급 신인 이의리가 선발 등판하는 날이라서? 아니면 SSG가 처음 광주에 원정경기 와서? 답은 야구장 담장 바깥에 있다.
오늘이 5월 18일이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프로 스포츠와 민중 항쟁, 누가 봐도 뜬금없는 조합이지만, 타이거즈라는 팀은 하필이면 참혹한 비극이 펼쳐졌던 공간에 뿌리내리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41년 전 그날에 아무 일도 없었더라면 타이거즈는 지금보다는 훨씬 평탄한 운명과 역사를 맞이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다.
홈경기가 허락되지 않은 날
해태 타이거즈가 MBC 청룡을 홈으로 불러들인 1986년 5월 17일과 18일에 평범하지 않은 2연전이 열렸다. 첫날은 당연히 광주 무등야구장에서 열렸는데, 둘째 날은 전주야구장에서 경기가 진행되었다. 연전 기간에는 경기장을 옮기지 않는 것이 상식인데도.
상식에 어긋나는 일은 상식이 모자란 사람들 때문에 일어난다. 그 사람들은 다름 아닌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였다.
그들은 광주 사람들이 모여서 한풀이할 공간조차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마침 무등경기장은 계엄군에 분노한 운전기사 100여 명이 차량 시위를 시작한 곳이기도 했다.
한국야구위원회는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잘 헤아렸다. 해태 타이거즈는 그날에 무조건 원정을 다녀야 했고, 어떤 해는 아예 경기를 열지 않았다. 덕분에 타이거즈는 1999년까지 5월 18일에 홈경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이 타지로 떠돌아야 하는 까닭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선수들은 비장한 각오와 울분을 한가득 안고 경기에 임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타이거즈가 1999년까지 5월 18일에 거둔 성적은 9승 2패였다.
호남 대표, 타이거즈
부와 여유, 해태 타이거즈는 명문 구단에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모자랐다. 그런데도 호남 사람들의 응원과 악바리 정신으로 부족한 부분을 메우며 명문구단이 되었다.
창단부터 그랬다. 전두환 정권은 프로야구 창설에 적극적이었다. 많은 국민이 공놀이에 홀려 정치에 외면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청와대 관심 속에 각 지역에 창단할 기업들이 정해졌지만, 호남 지역을 맡겠다는 기업은 좀체 없었다. 경부축 위주 경제개발에서 전라도는 소외당했고, 향토 대기업이 별로 없었다. 판이 엎어지려던 찰나 해태제과가 응하기는 했으나, 당시 야구단을 창단한 MBC, OB(두산), 삼성, 롯데에 비하면 이름값이나 자본 상으로나 산업 규모 면에서 너무나 초라했다. 창단식에 참석한 선수는 총 15명. 6개 구단 중 적었던 것은 물론이고, 현재 최소 등록 인원 22명에도 못 미친다.
리그 사무국이나 구단들 모두 백지상태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 해태 타이거즈에 다행이었다면 다행이었다. 실력 있는 연고지 출신 선수들을 모조리 흡수한 데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선수단을 장악한 김응룡 감독의 능력이 어우러져 해태는 두 번째 시즌에 우승컵을 거머쥐었고, 그 이후 해태왕조라는 역사를 써 내려 간다.
호남 사람들은 그런 타이거즈를 보며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고향에서는 5 ․ 18로 인한 상처를 치유 받지 못했고, 타지에서는 지역 차별을 고스란히 겪었다. 전라도 사투리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곳이 야구장밖에 없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야구장은 해방구였다. 그들은 9회 즈음에 ‘목포의 눈물’을 큰 목소리로 부른 뒤 각자가 있어야할 자리로 되돌아갔다.
무등산 호랑이는 여전한데
타이거즈도 새천년이 불러온 변화를 피할 수는 없었다. 과자만 만들 줄 알았던 해태 그룹은 사업을 중공업, 전자, 건설 등으로 무리하게 확장하다가, 외환위기 때 거하게 한 방에 얻어맞아 결국 부도났다. 왕조를 이끈 선수와 감독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이 떠난 자리는 해태처럼 부도났으나, 해태보다 훨씬 부유한 재벌 현대자동차그룹이 인수해서 살아남은 기아자동차가 메우게 된다.
바뀐 것은 그것뿐이었다. 다른 야구단들은 해체 후 재 창단이라는 형식으로 그동안 자기들이 갈고 닦은 명맥이 끊겼지만, 타이거즈는 인수 기업이 이름과 역사를 이어받은 유일한 사례가 되었다. 팬들이 자리를 지킨 덕분이었다.
해태가 아닌 기아를 응원해야 함에도, 호남의 인물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어 한이 어느 정도 풀렸어도, 타이거즈를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했다. 한국시리즈만 열리면 출근 도장 찍던 해태처럼은 아니어도 한국시리즈에 진출만 하면 무조건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전통, 대한민국 최고 인기 구단이라는 명예도 여전하다.
이런 역사가 있음에도, 구단은 5월 18일에 소극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아 아쉽다. 국민의례 때 희생자 묵념을 하는 것과 응원단 없이 경기를 치르는 것 외에는 희생을 기억하는 별다른 행사가 없다. 게다가 올해는 5 ․ 18과는 전혀 상관없는 특정 선수 이벤트를 준비하다가 팬들 항의로 접는 소동도 있었다.
프로야구와 타이거즈가 어느덧 내년이면 40살이다. 대머리 할배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타이거즈는 호남 대표로 자리 잡았다. 광주민주화운동 42주년이기도 한 내년 이맘때에는 원정을 마지못해 떠돌아다녔던 슬픔과 해태 왕조라는 찬란한 역사, 변함 없이 응원하는 팬들의 마음을 아우르는 시간이 챔필에서 열리기를…